-
방원의 말을 이거이가 받았다.“정도전은 이제 저승 사람이 되어 제 죄값을 치르게 되었소. 그 자는 전하의 총애를 받아 높은 자리에 오르자 방자해졌소. 그 자가 방자하게 된 데에는 현비의 총애도 부채질을 한 셈이오. 그 자는 현비와 짜고 철부지 방석을 세자로 만든 뒤 전하의 기력이 약해지자 신의왕후 소생 다섯 대군을 무엄하게도 해치고 방석을 왕에 앉힌 뒤 이 나라 사직을 제 마음대로 주무르려 하였소. 죽어 마땅하오.”이어 회안군 방간이 말했다.“정도전은 처음에 조준 대감과 함께 이 나라 여러 제도를 개혁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특히 문
방원, 복수의 칼
이상우 작가
2024.09.20 16:58
-
“가서 빨리 자세한 것을 알아 전하와 저하께 보고 드리도록 하시오.”이제는 그 말을 남기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누워 있는 왕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말했다. 옆에는 세자 방석과 세자빈 현빈 심씨가 앉아 있었다.“전하, 지금 송현 고개 너머 수진방 정 대감의 집 근처에 큰 불이 나서 밖이 매우 소란합니다.”“누구의 짓이냐?”왕은 환자답지 않게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안산 지사 이숙번이 저지른 일 같습니다.”“이숙번? 그렇다면 그 배후는 분명 방원일 터이다. 고얀 놈들…….”왕은 부르르 떨면서 일어나려고 했다. 곧 세자가 부
방원, 복수의 칼
이상우 작가
2024.09.13 10:15
-
“역적모의를 한 주제에 무슨 변명이 그렇게 많은가? 여봐라, 저 역신의 입을 영원히 봉하라!”방원이 그렇게 말하고 말고삐를 돌렸다.“대군…….”정도전의 절규가 채 끝나기도 전에 종 소근이 들고 있던 칼로 정도전의 가슴을 찔렀다.“으음……. 네 놈들이…….”정도전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소근이 다시 들고 있던 철퇴로 그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붉은 피가 사방으로 튀는 처참한 모습을 횃불이 비추고 있었다.“왕, 왕후 마마…….”정도전은 말을 잇지 못한 채 땅에 엎어졌다. 그 위에 소근이 다시 짓이기다시피 철퇴질을 해댔다.뒤에 멀리 서서 이
방원, 복수의 칼
이상우 작가
2024.08.30 16:06
-
‘아이쿠, 죽었구나!’김용세는 겁이 덜컥 났다. 그러나 다음 순간 죽은 줄 알았던 종놈이 벌떡 일어나 바지를 움켜쥐고는 줄행랑을 쳤다. 급하게 도망가느라 누가 자기를 습격했는지조차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뜻밖에 구원을 받은 여인은 곧 옷 매무새를 고치고 김용세 앞에 앉았다.“어느 어르신인지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김용세는 언뜻 보기에도 이 여인이 여염집 부인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그만 하기 다행이오. 뉘 집 마님이신진 모르지만 이 야밤에 혼자 나오시다니…….”“소녀는 의령군 나으리의 소첩이옵니다. 방금…….”“예?”그러면 이
방원, 복수의 칼
이상우 작가
2024.08.23 16:34
-
“이제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정안군이 말에서 내리지도 않고 이숙번을 내려다보며 황급히 물었다.“간악한 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요절을 내야 합니다.”“그들은 어디 있느냐? 대궐 안에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정도전과 남은 등은 지금 솔재 고개 넘어 남은의 첩 일타의 집에 모여 있습니다.”민무질이 자신있게 말했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낮에 이무가 자기도 거길 간다고 알려주었습니다.”“그 집을 포위하고 불을 지르면 제 놈들이 나오지 않고 배기겠습니까? 그리로 갑시다.”이숙번이 앞장서서 맞은편 호조 건물 뒤로 해서 솔재(松
방원, 복수의 칼
이상우 작가
2024.08.16 16:41
-
왕의 신열은 좀처럼 내리지 않았고 게다가 해소까지 겹쳐 가끔 비몽사몽을 헤매기도 했다.“현비! 현비! 어서 이리오오.”가끔 이렇게 현비의 환상이 보이기도 했다. 왕은 교태전의 사방을 둘러보았다. 궁을 처음 지어 들어왔을 때 현비는 이 교태전에 주로 있었으나 나중에는 강령전의 서침을 주로 침실로 사용했다.왕의 곁에는 어린 세자 방석과 세자빈 심씨가 무릎을 꿇고 지키고 있고 조금 떨어져 홍안군 이제와 무안군 방번, 그리고 전의감 양홍달이 앉아 있었다. 제조 상궁과 승지, 김사행 등은 밖에 기다리고 있었다.“어머니가 받들던 천축국 불상은
방원, 복수의 칼
이상우 작가
2024.08.09 17:09
-
마천목은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나으리, 급하옵니다.”마천목은 계속 재촉을 했다.그러나 무안군은 도로 뒤로 벌렁 드러눕고 말았다. 마천목과 김용세는 할 수 없이 외궁 마당으로 다시 나왔다.“빨리 집으로 가자.”정안군이 양 발로 말의 잔등을 찼다. 궐내서는 말을 탈 수 없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때 회안군, 익안군 등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상당군은 정안군의 말꼬리를 잡고 있었다. 그들은 누국 앞을 지나 영추문으로 나와 도당을 뒤로 두고 정안군의 집을 향해 달렸다.김용세도 숨이 턱에 닿을 정도로 헉헉거리며 뛰었다. 그는 뛰
방원, 복수의 칼
이상우 작가
2024.08.02 16:04
-
“제발, 제 말 좀 들으시고 다시 대궐로 들어가지 마십시오. 제발…….”민씨 부인이 정안군의 소매를 붙잡았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정안군의 입궐을 막으려 했기 때문에 곁에서 누가 보고 있다는 것쯤은 개의치도 않았다.“어허, 부인 오늘따라 어찌 이러시오. 죽는 것이 두렵다고 전하가 계신 대궐에 들어가지 않는단 말이오? 정녕 그런 일이 있다면 빨리 가서 형님들에게 알려야 할 일이오. 만약에 변란이 일어난다면 내가 다시 나와 군사를 일으킨 뒤 백성들의 뜻을 살필 것이오.”그는 부부인의 손을 뿌리치고 말 위에 올랐다.“아니 됩니다. 가시면
방원, 복수의 칼
이상우 작가
2024.07.26 16:41
-
민무질이 말을 타고 급히 영추문으로 나갔다.다시 빈청으로 돌아온 정안군은 일행을 돌아본 뒤 입을 열었다.“영안군은 아직 오지 않았소?”누구를 지목해서 묻지 않았는데 이제가 대답했다.“영안군은 소격전에서 전하의 쾌차를 비는 제를 올리고 있소.”영안군 방과는 원래 겁이 많고 행동이 소극적이라 사람들이 모이는 일에 잘 동참하지 않았다. 그러나 형제들 중 여색을 가장 밝혀 기방 출입이 잦았을 뿐 아니라 첩까지 두고 있었다.예조전서를 지낸 조박(趙璞)의 누이뻘 되는 유씨를 첩으로 두었는데, 그 여인은 다른 사람에게 시집간 일이 있어 아들까지
방원, 복수의 칼
이상우 작가
2024.07.19 17:01
-
그것은 일타의 추측이었다. 어쨌든 이런 이야기는 방안 사람들에게 유쾌한 것은 아니었다.“사직을 지키는 일은 선수를 쓰는 일입니다.”이제가 결론처럼 말헀다. 그러나 정도전은 눈만 지그시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때였다. 문하부 참사 이무가 들어왔다.“여기들 계셨구먼요. 전하께서 환우가 점점 깊어가는 모양인데 걱정입니다.”그가 이제의 곁에 앉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무는 정도전, 남은 등의 모임에 불청객으로 잘 나타났다. 그러나 정도전이나 남은은 그가 약삭빠르기는 하는 사람 됨됨이가 크게 모나지 않고 그들을 따르는 것 같
방원, 복수의 칼
이상우 작가
2024.07.12 17:47
-
“정안군은 어릴 적부터 전하의 생사를 같이해 온 터니까.”“정도전과 남은은 새 왕조의 권세를 독차지한 것이나 다름없지요. 거기다가 자손 반대까지 자기들 세상을 만들기 위해 강비와 어린 방석을 혼미케 하고 방번, 이제등과 파당을 만들어 국기를 불안하게 하고 있질 않소? 그렇다고 방원과 방간 형제는 제대로 된 인물이오? 한술 더 뜨려는 것이지요. 현비가 없는 지금이 절치부심 해오던 권력 되찾기의 호기가 아니냐고 생각하는 것이오.”정기준은 혼자 흥분해서 술상을 차리라고 내실 쪽을 향해 소리쳤다.“술은 무슨 술입니까? 오늘은 이만 늦었으니
방원, 복수의 칼
이상우 작가
2024.07.05 17:22
-
남은은 누가 보든지 세자와 정도전의 오른팔 노릇을 하고 있는 실세 중의 실세였다. 전주 의령이 본향으로 전왕조의 문하부 시중 남을번의 아들인 그는 일찍부터 관운이 있었다. 왕의 위화도 회군을 앞장서 지지한 공로로 밀직부사를 지냈다. 그와 정도전의 관계는 운명적이라 할 만큼 끊을 수 없는 사이였다. 공양왕 때 대간들이 정도전을 죽이자고 간하여 정도전이 옥에 갇힌 일이 있었다. 그때 남은은 목숨을 걸고 정도전의 구명 운동을 했었다.이 일로 왕의 미움을 사 결국 벼슬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그 후 정도전 등과 함께 개국하는 일을 도와 개국
방원, 복수의 칼
이상우 작가
2024.06.28 16:20
-
“전하, 회안 대군 나으리 댁의 전 노비였던 석구지란 놈의 행패가 엊그제 같습니다. 종의 신분으로 감히 주부 이항의 집에 찾아가 여종을 내놓으라고 행패를 부리다가 목이 달아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회안 대군 댁 종이 또 무수리를 욕보이고 죽인단 말입니까?이는 대군 나으리들께서 너무 만용하신 탓이오니 다시 교지를 내리시어 남은 사병을 모두 해산하고 기강을 엄히 하라고 하심이 어떠할지요?”왕은 이런 주청을 들을 때마다 괴로웠다. 더구나 봉화백 정도전은 더욱 강경했다.“신 등이 사병을 해산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 주청 드리는 것은 그들의 군
방원, 복수의 칼
이상우 작가
2024.06.21 16:08
-
“철썩! 철썩!”신장을 삼십여 대나 맞았으나 그들은 비명만 지를 뿐 실토를 하지 않았다. 두 죄인의 엉덩판은 터져서 피범벅이 되었다. 피범벅 된 자리를 다시 치자 피가 사방으로 튀어 집장 사령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 정도였다.“안 되겠다. 매질을 거두어라.”위관 이직이 소리쳤다. 두 사령의 매질이 멈추어졌다.“지독한 놈들. 신장으로는 안 되겠으니 주뢰를 틀어라.”주뢰란 주리라고도 하는데 전도주뢰(剪刀周牢)의 약칭이다. 고신 중에는 무거운 형벌에 속하며 자칫하면 병신이 되기 쉬운 고문형이다.이번에는 두 죄인을 형틀에서 풀어놓은 뒤, 순
방원, 복수의 칼
이상우 작가
2024.06.14 15:38
-
김명률은 붓을 놓고 잠시 임검장을 떠났다. 신홍아는 흰 저포를 가지고 나와 시신을 덮었다. 잠시나마 하늘 아래 알몸을 두기가 민망했기 때문이다.앞마당 차일에 보고 겸 하명을 들으러 갔던 김명률이 임검하는 뒷마당으로 다시 돌아왔다.“수고했소. 개복 검험은 이제 하지 않아도 될 것 같군. 목을 졸려 질식 절명한 증험이 분명하고 겁간당한 흔적도 분명하니 초검(初檢)으로 끝내도록 하라는 대사헌 나으리의 분부가 계셨소.”김명률은 엄숙한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일이 잘못되면 시신을 개복해서 오장 육부를 다 검험하는 고역을 치러야 하고 그것으
방원, 복수의 칼
이상우 작가
2024.06.07 16:25
-
다름, 수생파는 시신의 한삼을 벗겼다. 저고리 밑에는 치마 쪽과 달리 중의를 입지 않고 바로 살에 닿는 한삼만 입고 있었다. 흰 한삼을 벗기자 유백색의 상체가 드러났다. 시신이긴 하나 피부가 탄탄하고 부드럽게 보였다. 봉긋한 두 개의 유방에는 연자색의 유두가 작은 꽃망울처럼 달려 있었다.수생파는 이어 중의 치마를 벗겼다. 단속곳이 나왔다. 흰 단속곳도 찢겨 가랑이가 너덜너덜하고 배설물이 묻어 있었다. 수생파가 여종의 도움을 받아 그것을 벗겼다. 이제 샅을 가린 속속곳만 남아 있었다.“어험!”김명률이 헛기침을 했다. 부녀자만 둘러서
방원, 복수의 칼
이상우 작가
2024.05.31 16:57
-
상황이 이쯤 되니 문제를 삼지 않을 수 없었다. 형조에서 죄를 주자고 왕에게 청했다. 그 사이에 왕미와 그 아내는 또 눈이 맞았는지 함께 도망을 치고 말았다. 왕은 비록 현직이 아닌 산관이었지만 정3품인 왕미의 첩지를 회수하라고 명했다.왕이 대사헌을 급히 부른 것은 사알의 말대로 겁간 사건이 났기 때문이었다. 그 사건이 민가에 나가 있는 상궁 신홍아의 집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뒤늦게 안 김용세는 놀라 숨이 멎는 줄 알았다.더구나 그들이 혜화문 밖 삼선 계곡에서 단풍을 즐기고 온 그날이었다. 겁간 사건이라고 말을 해서 그렇지 사실은 살
방원, 복수의 칼
이상우 작가
2024.05.24 16:47
-
하급 관리가 상급 여관을, 그것도 왕과 왕비를 모시던 상궁을 처첩으로 삼는 것은 강상(綱常)의 범죄에 버금가는 일이라고 규탄 받을 것이다.김용세는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우울해졌다. 그뿐 아니라 화난 동의의 모습도 떠올랐다.그러나 그는 그 스무엿새 날 혜화문 밖으로 나가 가슴을 두근거리며 신홍아를 기다렸다.한참 만에 신홍아를 만난 김용세는 그녀를 못 알아볼 뻔하였다. 신 상궁은 평소 궁녀였기 때문에 특이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우선 머리는 다리[月子]를 넣어 땋은 뒤 비비틀어 뒤에 소라껍질처럼 말아 붙이고 가리마 위에 은첩지를 붙이고
방원, 복수의 칼
이상우 작가
2024.05.17 17:23
-
“정 형 계시오?”그래도 기척이 없었다. 그는 열려있는 문틈으로 안채의 동향을 살폈다. 머리에 가채를 올린 젊은 아낙이 바삐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갸름한 얼굴에 깨끗한 명주치마 저고리가 한눈에도 정기준의 처임을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인가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다시 한번 기척을 했다.“정 형 계시오?”한참 있다가 정기준이 안채에서 나왔다.“아니, 김 형 아니오? 어서 이리로 오르시오.”그는 김용세를 반가워했으나 얼굴에는 착잡한 표정이 흐르고 있었다.김용세는 사랑으로 들어가 정기준과 마주 앉았다.“조금 앉아 계시다가 가친께서 나
방원, 복수의 칼
이상우 작가
2024.05.10 17:16
-
세자측의 무안군 방번도 사병을 놓지 않겠다고 버텨 가장 많은 병졸이 그대로 남았다.정안군의 잔졸들은 남문 밖에서 가끔 훈련을 했고, 세자 측의 군졸들은 흥인문 안에서 진법을 익혔다.왕도 친위군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그 조직은 거의 의흥삼군부에 편성되어 있었다. 궁성을 지키는 시위군은 대부분 갑사甲士들인데 이들은 양인이나 양반의 후예로 구성되어 가장 질이 좋은 갑옷 무장의 병사들이었다.갑사는 상당한 녹봉을 받고 있었으며 신분이 보장되어 충성심이 강했다.무반의 말단 군직인 갑사는 지망자가 많았기 때문에 개국초에 갑사 시취령試取令을 내려
방원, 복수의 칼
이상우 작가
2024.05.03 16: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