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안군은 어릴 적부터 전하의 생사를 같이해 온 터니까.”

“정도전과 남은은 새 왕조의 권세를 독차지한 것이나 다름없지요. 거기다가 자손 반대까지 자기들 세상을 만들기 위해 강비와 어린 방석을 혼미케 하고 방번, 이제등과 파당을 만들어 국기를 불안하게 하고 있질 않소? 그렇다고 방원과 방간 형제는 제대로 된 인물이오? 한술 더 뜨려는 것이지요. 현비가 없는 지금이 절치부심 해오던 권력 되찾기의 호기가 아니냐고 생각하는 것이오.”

정기준은 혼자 흥분해서 술상을 차리라고 내실 쪽을 향해 소리쳤다.
“술은 무슨 술입니까? 오늘은 이만 늦었으니 집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노모가 기다리고 계십니다.”

김용세가 정중히 만류했다. 그는 정기준의 집에서 도망치다시피 서둘러 나왔다.
정안군 일파가 부부인 민씨를 중심으로 권력 쟁취를 밀의하고 있을 때, 솔재 넘어 수진방에 있는 정도전의 옆집 남은의 첩 일타(一朶)의 집에서도 권력 수호를 위한 모의가 한창이었다. 모인 사람은 정도전을 비롯해 의령백 남은, 심효생, 이제, 무안군 방번 등이었다.
이들은 정도전이 동북면에서 돌아오자 그 동안 소강 상태로 있던 권력 강화 작업을 다시 시작했다.

“주상과 신덕왕후의 뜻을 펴는 일은 우리의 어깨에 달려 있소. 신덕왕후께서 승하하신 후로 주상은 허탈하시어 정사를 어수에서 놓다시피 했소. 더구나 자주 환우를 일으켜 불충한 말로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를 지경에 이르렀소. 일이 급하게 되어 간다는 뜻이오.”
부성군 심효생이 단숨에 술잔을 두어 잔 연거푸 비우면서 말했다.

“부성군 어른의 말씀이 정곡을 찔렀소. 정안군과 회안군은 아직도 상당수의 병졸을 동원할 수 있는 힘을 갖추고 있소. 정안군은 배짱이 대단하고 지모가 뛰어난 사람이요, 회안군은 지모는 없으나 한번 작심을 하면 북악산이라도 허물고 마는 성미 아닙니까? 저들이 무슨 일을 저지르기 전에 우리가 먼저 손을 써야 합니다.”
심효생은 또 연거푸 술잔을 비웠다.
“그들을 동조하는 세력이 자꾸 늘어가고 있소.”
남은의 말을 정도전이 받았다.
“그들이 누구요?”

“다섯 대군은 물론이요, 의안군 이화와 이거이 부자, 그 밖에 조준, 김사형, 조영무, 조박, 이숙번, 민무구 형제, 박포, 정탁…….”
“아니, 정탁까지?”
정도전의 표정이 굳어졌다. 의안군 이화(李和)는 왕의 배 다른 형제요, 정안군의 삼촌인 셈이다. 그는 왕의 선친인 이자춘과 천인 노비 고음가古音加의 사이에서 난 천첩 서얼의 자식이다.

이자춘은 정실 처가 세 사람이나 있는데 고음가 외에도 내은장(內隱藏) 등 천첩이 있었다. 이화는 출생의 불운 때문에 언제나 반골 쪽에 서곤 했다.
“대감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가장 나이가 어린 무안군이 봉화백을 보고 물었다.

“우리가 경솔히 움직이면 도성이 피바다를 이루게 됩니다. 나는 정안군이나 회안군이 어떤 인물인가를 누구보다 잘 압니다. 주상꼐서 심신이 허하시어 나라의 중심이 흔들리고 있소. 잘못하다가는 저들에게 핑계를 주어 왕통을 그르칠 염려가 있습니다.”
“왕통을 그르치다뇨?”
심효생이 심히 불안한 표정이 되었다. 그는 평소에도 담이 약하고 술을 좋아해 무슨 결정을 내릴 때는 술 힘을 빌리는 일이 많았다.

“저들이 노리는 것은 이 사람의 벼슬 자리나 의령백의 벼슬 자리가 아니오.”
정도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렇다면…….”
“뻔한 일 아니오. 세자를 폐하고 신의왕후 한씨의 아들들이 왕통을 잇는 것이 정도라고 할 것이오.”

정도전의 관측은 예리했다.
“예? 설마 거기까지야…….”
이제가 믿기 어렵다는 듯이 정도전을 쳐다보았다. 흥안군(興安君) 이제는 현비 강씨 소생의 경순궁주의 남평으로 우군절제사를 맡고 있었다. 그는 안사람이 세자나 방번의 동복 남매이기 때문에 정도전과 가까울 수 밖에 없었다.
“주상께서 하루 빨리 쾌차하시어 전처럼 정사를 장악하셔야 하는데…….”
심효생이 탄식하듯이 말했다.

“경복궁의 갑사들도 1천 명이 채 안 됩니다. 그나마 도성 밖 집에서 번을 서러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필요할 때 궁을 지킬 병역은 1백 명이 안 될 때도 있습니다.”
남은이 걱정스레 말했다.
“2천 명이 넘던 주상 전하의 충성스런 갑사들이 그렇게 되었단 말이오?”
심효생이 물었다.

“시대가 바뀌면 옛일에만 연연해서는 안 됩니다. 사병제를 혁파하고 정병을 일으키자면 중앙에서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궁성을 호위하는 데는 충분한 병력입니다.”
정도전이 수염을 쓰다듬었다. 쉰도 중간을 더 넘긴 그의 수염은 검은색보다는 은색이 더 역력했다.

그때였다. 문 밖에서 여인의 기척이 나더니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새 상을 보아 왔는데 들여보내도 좋을지요?”
남은의 첩 일타의 목소리였다. 일타는 이제 나이 갓 스물에 이른 옛 수도 개경의 명기 중 하나였다.
“어험, 들라.”

남은의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진 술과 안주상을 두 여종이 마주 들고 들어왔다. 녹요홍상에 가리마를 예쁘게 가른 일타가 치맛자락을 살짝 걷어 붙이고 선두에 서 있었다. 초생달처럼 가냘프게 가꾼 눈썹 밑에 타고난 듯 요염한 웃음을 흘리는 일타의 모습은 가히 고혹적이라 할만했다.
“이리 좀 들어와 앉으오.”
정도전이 농삼아 말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일타는 옳다구나 하고 방 안에 들어와 앉았다.
“어흠, 어흠.”
남은이 정도전의 눈치를 보며 일타를 향해 마른기침을 했다. 봉화백은 남은이 그녀를 첩으로 들어앉히기 전부터 눈독을 들인 것 같았다. 그는 무슨 은밀한 일이 있을 때마다 남은에게 이곳에 오자고 말하고는 했다.

“소녀가 낮에 들은 요상한 이야기가 있어 나으리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일타가 정도전에게 미소를 보내며 말했다.
“나한테? 무슨 말이오?”
“요즘 도성 안에는 요상한 참요(讖謠)가 부녀자나 아이들 입에 오르내린다고 하는데 그 뜻이 참으로 괴이합니다. 소녀들은 감히 입에 담을 수 없는 해석이 붙어서…….”
방 안의 일행이 모두 긴장한 채 일타를 쳐다보았다.

일타는 걱정스레 내려다보고 있는 남은을 슬쩍 보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럼 소녀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가 ‘저 남산에 가서 돌을 뜨는데 정이란 정은 남은 것이 없네’라는 내용이랍니다.”
“그게 무슨 뜻인가?”
남은이 고개를 갸웃했다.

[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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