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일타의 추측이었다. 어쨌든 이런 이야기는 방안 사람들에게 유쾌한 것은 아니었다.
“사직을 지키는 일은 선수를 쓰는 일입니다.”

이제가 결론처럼 말헀다. 그러나 정도전은 눈만 지그시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문하부 참사 이무가 들어왔다.
“여기들 계셨구먼요. 전하께서 환우가 점점 깊어가는 모양인데 걱정입니다.”

그가 이제의 곁에 앉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무는 정도전, 남은 등의 모임에 불청객으로 잘 나타났다. 그러나 정도전이나 남은은 그가 약삭빠르기는 하는 사람 됨됨이가 크게 모나지 않고 그들을 따르는 것 같아 그냥 두었다.

“아니 할 말로 만의 하나라도, 신덕왕후도 안 계신데 전하마저 망극한 일이 생긴다면 이 나라 사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일을 튼튼하게 하려면 권력을 탐하는 자들을 미리 제거해야 합니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흥분해서 큰 소리로 떠들었다.
“공이 제거해야 한다는 자들이란 누구를 말함이요?”

정도전이 정색을 하고 물었다. 그는 좌중을 한 번 돌아본 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여기서 정안군과 양 정승을 밀어낼 공론을 하신 것 아닌지요?”

“어험!”
남은이 헛기침을 했다.
“자, 약주들 드세요. 어려운 이야기는 뒤에 하시구요.”
일타가 분위기를 바꿀 양으로 이렇게 말하면서 일어섰다.
“저는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무안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도 좀…….”
심효생이 따라 일어섰다. 이렇게 해서 이 날 모임은 결론 없이 흩어졌다. 그러나 모두가 나름대로 가슴에 무거운 짐을 하나씩 안고 나갔다.

시절이 8월 하순에 접어들었는데도 무더위는 계속되었다. 김용세는 왕의 환우가 점점 깊어간다는 것을 전의나 의생들이 바삐 들락거리는 것을 보고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어느날 저녁, 홍례문 안 빈청에서 나오는 문하부 참사 이무를 만났다.
“날씨가 시절을 잊은 것 같은데 이것은 서운관 사람들이 책임질 일 아닌가?”
그가 농을 건 것이다.

“농사가 잘 안 되면 황소가 책임을 지는지요?”
“하하하, 그거 말 되는군.”
그는 한참 웃다가 넌지시 말했다.
“요즘 공도 정안군 댁에 드나들던데 몸조심하이. 잘못하면 휩쓸려 떠내려가는 수가 있어.”

그가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이무는 정도전과 방원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이쪽 이야기를 저쪽에 전하고 저쪽 이야기를 이쪽에 전하는 사람이란 것을 신 상궁이 이야기한 일이 있다. 그뿐 아니라 정기준도 무골호인인 것처럼 보이나, 자기 계산에 빠르고 결정적일 때는 명분보다 실리를 택할 사람이라고 이야기했다.

언젠가 김용세가 정안군의 사랑방에 갔을 때였다. 안산 지사인 이숙번이 와 있었다.
그가 안채에서 나오자마자 모여 있던 의안군, 민무질, 이거이 등을 보고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간악한 무리들이 마침내 일을 저지를 것 같다. 평소에는 아무 일 없는 것 같지만 주상이 우환중이어서 거동이 어렵게 되면 반드시 변란을 일으킬 것이다. 이때는 당신이 사람을 보낼 테니 즉각 갑사들을 이끌고 한성으로 와야 한다’고 정안군 나으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숙번의 말을 듣고 모두가 놀라는 것 같았다.

4. 모반의 밤

나라를 세운 개국 공신들과 나라의 지주인 왕실이 서로 반목하여 죽고 죽이니 이는 사실 집안의 일로부터 비롯됨이라, 기억할지니 수신제가 연후에 치국평천하니라. - <무인록>

개국한 지 7년째 되는 무인(戊寅)년의 한여름, 8월 26일 기사(己巳)일, 서운관 일관들은 천체의 특별한 변화를 보지 못한 무더운 날이었다. 그러나 이 날 한양은 유혈의 변괴가 일어나고 왕권이 바뀌는 중대한 일이 벌어진 날이었다.

아침부터 왕의 병환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도승지 이문화는 세자와 의논한 뒤 왕자들과 가까운 종친들을 경복궁으로 모두 불러들였다.

집이 먼 곳도 있고 가까운 곳도 있어 모두 기별을 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이 일은 주로 승정원의 사알이나 승전색들이 맡아서 했다.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의안군 이화가 궁으로 들어왔다.
그는 근정전 문 밖 빈청(賓廳)에서 기다렸다. 빈청은 궁에 온 고관이나 종친들이 대기하는 곳으로 방이 여럿 있었다. 근정전을 나와 오른쪽, 즉 서쪽에 있는 월화문(月華門)을 나가면 빈청이 있었다.
이곳은 뒤에 있는 승정원 집무실과도 가깝고 문 두개만 지나면 사정전까지 갈 수 있는 곳이었다.

제일 먼저 도착한 이화가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빈방에 앉아 있었다. 어디서인지 매미 우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의 어머니가 종만 아니었더라면 지금쯤 팔자가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자신은 아래채에서 태어나자마자 유모 손에 넘어가고 생모는 보고 싶어도 마음대로 만날 수 없었다. 만난다고 해야 정실부인인 최씨에게 불려가 수모를 당하는 일뿐이었다.

목이 통통하고 얼굴이 흰 어머니의 모습이 어렴풋했다. 뒤에 정안 옹주로 추존되고 성도 김씨를 얻기는 했으나 그것은 어머니가 설움 끝에 죽은 뒤의 일이었다.

두 번째로 궁에 달려온 사람은 회안군 방간이었다.
“숙부님께서 빨리 오셨구먼요. 아버님의 병환은 어떠십니까?”
방간이 말에서 금방 내린 듯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말했다. 그는 성질이 급해 도성 안에서 말을 탈 때도 속력을 내어 달렸다.
“나도 아직 다른 전갈은 못 받았네. 타고 온 말은 어떻게 했는가? 내사복시에 두었나?”

그들의 대화는 여엄집 가족 간의 말투 그대로였다.
“말은 돌려보냈습니다. 언제 갈지도 모르고…….”
그들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이 정안군이 들어왔다.
“숙부님도 벌써 와 계셨군요. 아무래도 이상한 조짐이 보이는데……. 봉화백은 지금 안에 있습니까?”

정안군이 이화를 보고 물었다. 그의 이마에서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저포 시복(時服)의 등이 땀에 젖어 큰 얼룩을 만들었다.
“나도 방금 왔기 때문에 궐 안 기미는 전혀 모른다네.”’
“정도전과 김사행이 무슨 장난을 치고 있는 건 아닌지…….”

그때 흥안군 이제가 들어오자 정안군은 입을 다물었다. 곧 이어 경선궁주(慶善宮主)의 부군인 청송백 심종이 들어왔다. 그는 조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왕의 장녀인 경신궁주의 남편 이백경이 들어온 것은 신시가 넘어서였다. 김용세는 자신이 직접 누국의 시각을 알리러 홍례문(弘禮門) 안으로 들어가면서 빈청을 슬쩍 보았다.

승정원으로 가자면 빈청 앞을 지나야 한다. 거기 모인 종친과 부군들 그리고 왕자들은 한결같이 침통한 표정들이고 분위기는 대단히 무거웠다.

무료하게 앉아 있던 정안군은 슬그머니 나와 내사복시 쪽으로 갔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말을 보냈으나 그는 말과 함꼐 민무질을 기다리게 했었다.

“처남, 이리 좀 오게.”
그는 민무질을 불러 세워 귀엣말을 했다.
“안산에 이숙번 지사를 부르러 간 무구가 한양에 당도했는지 빨리 알아본 뒤 단단히 준비하고 기다리라고 일러주게.

[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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