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제 말 좀 들으시고 다시 대궐로 들어가지 마십시오. 제발…….”
민씨 부인이 정안군의 소매를 붙잡았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정안군의 입궐을 막으려 했기 때문에 곁에서 누가 보고 있다는 것쯤은 개의치도 않았다.

“어허, 부인 오늘따라 어찌 이러시오. 죽는 것이 두렵다고 전하가 계신 대궐에 들어가지 않는단 말이오? 정녕 그런 일이 있다면 빨리 가서 형님들에게 알려야 할 일이오. 만약에 변란이 일어난다면 내가 다시 나와 군사를 일으킨 뒤 백성들의 뜻을 살필 것이오.”
그는 부부인의 손을 뿌리치고 말 위에 올랐다.

“아니 됩니다. 가시면 아니 됩니다. 이제 저와 하직이란 말입니까?”
부부인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이제 울음까지 섞였다.

“어허, 염려 마시오. 내가 누굽니까? 함길 영흥에서 여진의 말굽도 물리쳤고 남도에서 간악한 왜구와 싸우면서도 화살 한 대 맞지 않은 유덕(遺德)이오. 걱정하지 마시오.”
유덕은 그의 자字다. 그가 말에 채찍을 가하자 부부인은 포기한 듯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그녀는 말발굽 소리를 내며 광통교 쪽으로 사라지는 정안군의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정안군은 갑자기 말을 되돌려 다시 왔다.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 보고 있던 부부인이 반가워 와락 달려갔다. 그러나 정안군은 부부인은 제쳐 두고 민무질을 보고 말했다.
“이숙번 지사에게 가서 일러라. 우리 집 앞에 있는 신극례(辛克禮)의 집에서 기다리라고 하라.”

정안군은 다시 말 머리를 돌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정안군 방원이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와 빈청에 들렀을 때 의안군을 비롯한 종친과 왕자들은 그대로 있었다. 등촉방 노비들이 청내에 기름불을 밝히고 있었다.
정안군은 따라온 소근에게 서쪽 내사복시에서 말을 지키고 있다가 내가 나오면 언제라도 타고 달릴 수 있게 하라고 지시했다.

정안군은 빈청에서 수심에 싸여 있는 무안군 방번의 곁으로 가서 앉았다. 방번은 정안군을 보더니 슬그머니 일어섰다. 그는 아직 나이 스물도 채 안 되었다.
“아우, 어디 가려는가?”
방원이 그의 소매를 잡으며 물었다.
“근정문 안에 좀…….”

그는 일어서려다 머리를 긁적이며 도로 엉거주춤 앉았다.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않고 있던 그는 다시 슬그머니 일어섰다. 방원이 쳐다보자 다시 머리를 긁적긁적 하더니 빈청을 나가고 말았다. 빈청을 나서자 그는 근정문으로 서둘러 갔다. 근정문 앞에는 갑사 두 사람이 돌부처처럼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사방은 완전히 땅거미가 지고 광화문 위로 별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유시나 술시쯤 된 시간이었다. 근정문 안에서 승지 정담이 나왔다.

“전하의 환우는 어떠하시오?”
의안군이 물었다.
“아주 위중합니다.”
“어느 전각에 계시오?”
정안군이 물었다.

“지금 청량전(淸凉殿)에 계신데 위중하시어 교태전으로 옮기려고 합니다. 종친 어른과 대군들은 모두 들어가시지요. 근수하는 관원이나 노비는 두고 들어오시라는 세자 저하의 분부십니다.”
수행자들은 두고 단신으로 들어오라는 뜻이다. 모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하기에 바빴다.

“봉화백도 그 안에 계시오?”
정안군이 물었다.
“없소이다.”
승지는 그 말만 남기고 근정전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의안군이 앞장서고 심종, 이제가 뒤따라 마당으로 나섰다. 그들은 천천히 월화문 쪽으로 걸었다. 월화문을 지나면 정문인 근정문이다.

그러나 정안군과 회안군, 익안군, 상당군 등은 마당에 내려서기는 했지만 월화문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형님, 저것 보시오. 월화문에 등불을 켜지도 않았군요.”
정안군이 회안군을 보고 말했다.
“그뿐 아니라 근정문에도 등불이 없소.”

상당군이 말했다. 예부터 해가 떨어지면 대궐의 모든 문 앞에는 등불을 밝혀 왔다. 등불을 켜는 일은 등촉방 내관의 지휘 아래 내노비들이 하는 일이었다.
정말 그러고 보니 궁정 전체가 음침하여 옆에서 철퇴가 날아와도 잘 보이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을 자아내게 했다.
의안군과 심종, 이제는 근정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네 사람은 잠깐 빈청 마당에 서서 망설였다.

“나는 갑자기 배탈이 났소. 측간에 다녀오리다.”
정안군 방원이 슬그머니 빠져 빈청 뒤에 있는 측간으로 갔다. 달이 그믐에 가까운지라 사방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측간에 들어간 방원은 여러 가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등불을 켜지 않은 것은 기습을 노리기 위한 술책일 것이다. 근수원을 데리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도 기습을 쉽게 하기 위한 것이리라. 그들의 목적은 종친들이 아니고 자기나 회안군 방간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목숨이 두렵다고 자식된 도리로 이 세상을 하직할지도 모르는 아버지를 보러 가지 않는다는 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왕은 이 나라의 주상이기 이전에 한 가정의 아버지이다. 방원이 갈등에 싸여 있을 때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방원아! 방원아!”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형들의 다정한 목소리였다. 그는 어릴 적 생각이 났다. 지금 저세상 사람이 되고 없지만 언제나 너그럽던 큰형 진안군 방우, 여자처럼 속이 좁고 마음이 약한 영안군 방과, 무던하고 참을성 있는 셋째형 익안군 방의, 그리고 욕심 많고 성질 급한 회안군 방간.
“정안군!”

다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방원은 할 수 없이 측간에서 나왔다.
‘할 수 없군. 이 기회에 끝장을 내야 한다.’
그는 형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혼자 결심을 하고 내사복시로 황급히 걸어갔다. 부부인 민씨의 손길을 뿌리치고 나올 때와는 조금 달라졌다. 그곳에서 소근이 말고삐를 잡고 충실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곁에는 언제 왔는지 김용세와 마천목도 있었다. 방원은 마천목을 보고 급히 일렀다.
“빈청에 들어가 빈청 궁노를 시켜 방번을 불러내라. 방번이 나오거든 빨리 우리 집으로 오든지 아니면 달아나야 한다고 일러라.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너도 결국 죽일 것이라고 이야기해라.”

그 말을 듣자마자 마천목과 김용세는 도로 홍례문으로 뛰어가 빈청으로 갔다. 그들은 방원이 말한 대로 빈청 궁노를 시켜 무안군 방번을 급히 불러오도록 했다. 얼마 있다가 무안군이 나와 머리를 긁적이며 빈청 방안에 비스듬히 누웠다. 만사가 귀찮다는 표정이었다.

“나으리, 정안군 나으리의 전갈입니다.”
마천목이 읍하고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안군이 부스스 일어나 앉았다.
“정안군이 모시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계시면 그들이 필경 나으리도 해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초점 잃은 눈으로 마천목과 김용세를 한참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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