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정안군이 말에서 내리지도 않고 이숙번을 내려다보며 황급히 물었다.
“간악한 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요절을 내야 합니다.”
“그들은 어디 있느냐? 대궐 안에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
“정도전과 남은 등은 지금 솔재 고개 넘어 남은의 첩 일타의 집에 모여 있습니다.”
민무질이 자신있게 말했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
“낮에 이무가 자기도 거길 간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그 집을 포위하고 불을 지르면 제 놈들이 나오지 않고 배기겠습니까? 그리로 갑시다.”
이숙번이 앞장서서 맞은편 호조 건물 뒤로 해서 솔재(松峴) 고개로 올라갔다. 다른 사람들도 따라갔다.

 

조그만 도랑을 건널 때 말발굽이 물을 차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김용세는 두려움으로 이가 딱딱 마주쳤다. 그러나 이마에서는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마음속으로는 몇 번이나 자기가 지금 하는 짓이 역적의 짓이냐 혁명이냐를 따져 보았다.
그들이 솔재를 넘어 수진방 입구에 다다를 때까지 거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저 길에 남은의 소실 집이 있습니다.”

이숙번이 정안군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정안군은 소근을 불러 소리나지 않게 집을 포위하라고 일렀다. 그리고 이백경을 시켜 집 안의 동정을 보고 오라고 했다.
정안군은 사람을 보내면서 누구든지 절대로 죽여서는 안 된다고 재차 당부했다.
이경백이 고양이처럼 소리내지 않고 달려가 동정을 살피고 돌아왔다.
“집 앞에 안장이 얹힌 말 네 필이 있습니다. 노비들은 모두 잠든 것 같고 두 방과 대청 마루에만 기름등이 켜져 있었습니다.”

“방 안에는 인기척이 없었는가?”
이숙번이 물었다.
“이야기 소리와 간간히 남녀의 웃음소리가 들렸습니다.”
“남녀가 웃고 있어?”
정안군이 의외란 듯 되물었다.
“그러하옵니다.”

그때였다. 갑자기 휙휙 화살이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집을 포위하고 있던 종 소근이 뛰어왔다.
“어디서 화살이 지붕으로 날아왔습니다.”
“그건 내가 쏜 거야.”
이숙번이 말 위에 앉은 채 말했다.
“빨리 가서 집 여기저기에 불을 질러라. 그리고 두사람씩 골목 양쪽을 막고 있어라.”

 

이숙번과 그의 갑사들이 그 집 앞에 이르렀을 때 집에서는 불꽃이 일기 시작했다. 곧 이어 남녀의 아우성 소리가 나고 방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뛰쳐나왔다. 거의가 상투바람이었다.
“웬놈들이냐?”
남은이 먼저 뛰어나오며 소리 지르다가 상대가 갑옷에 말을 탄 사람들이란 것을 알자 급히 들어가 버렸다. 자다가 불벼락을 맞은 노비들이 뛰쳐나오다 정안군 군사들이 던진 창과 철퇴를 맞고 하나둘 쓰러졌다. 순식간에 좁은 골목은 아수라장이 되고 불길은 캄캄한 여름 밤 하늘을 대낮처럼 밝히며 붉게 타올랐다.

“이놈들아!”
흰 수염을 날리며 쫓아나오던 남자가 회안군 집 가노의 창을 맞고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세자 빈 현빈의 친정 아버지 심효생이었다. 그는 전주 사람으로 예문관 대제학에 있었다.
“방원이 이놈!”
피를 토하듯 외마디 소리를 남기고 쓰러진 그는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딸이 국모가 된다면 부원군으로서 한때의 호사를 누릴 그가 이렇게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살려주시오, 살려주시오.”
소리치면서 나오던 이근이 갑사의 철퇴를 맞고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죽이지 마라!”
뒤에서 보고 있던 정안군이 소리쳤다. 그러나 이미 피를 본 갑사와 가노들은 닥치는 대로 죽이고 찔렀다.
조영무가 도망가는 홍성군 장지화를 잡아 왔다. 그는 머리를 산발한 채 맨발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오, 살려주시오.”
그가 이숙번의 말 앞에 꿇어앉았다. 이숙번이 미처 무엇이라고 말하기도 전에 갑사 한 사람이 피묻은 칼로 그의 목을 베어 버렸다. 목 없는 몸둥이에서 피가 치솟아 이숙번의 갑옷을 붉게 물들였다.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김용세는 사시나무처럼 부들부들 떨었다. 이것은 지상의 모습이 아니었다. 지옥의 모습이라고 속으로 되뇌었다.

남은의 소실 집을 태운 불길은 이웃집까지 옮겨붙고 있었다.
“정도전과 남은은 어디 있느냐?”
정안군이 소리쳤다. 그러나 어디로 가서 숨었는지 알수가 없었다.
김용세는 겁이 나서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고 솔재 숲속으로 들어갔다. 집들이 타면서 불꽃이 여기까지 간간히 날아왔다. 그가 소나무 아래에 앉아 이마에 흐른 땀을 씻을 때였다. 곁에서 여자의 신음 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숨이 막혀 죽는 소리 같았다.
김용세가 일어서 숨을 죽이고 소리 나는 곳으로 가보았다. 소나무 아래서는 놀라운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피비린내 나는 그 와중에 어느 남녀가 뒤엉켜 야사를 치르느라 한창이었다. 그런데 남녀의 그 짓치고는 모양이 좀 이상했다. 자세히 보았더니 남자가 여자 위에 걸터앉아 겁간을 하고 있었다. 옷이 거의 다 찢겨 허연 살이 다 드러난 여인은 남자의 한 손에 입이 막힌 채 몸부림을 쳤다.

위에서 덮치고 있는 남자는 한 손으로 여자의 목을 누른 채 하체를 꿈틀거리고 있었다. 머리에 흰 수건을 질끈 동여매고 검은 전복을 입은 채 바지만 내리고 덤벼드는 사나이가 누구란 것을 김용세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죽일 놈!’
그것은 지금 습격을 해온 정안군의 일행 중의 하나인 방간의 집 종놈이었다. 김용세는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 같은 분노를 느꼈다. 그는 곁에 있는 머리통만한 돌을 번쩍 들었다.
“이 나쁜 놈!”
김용세는 있는 힘을 다해 사나이의 얼굴을 내려쳤다. 방화, 살인에 겁간까지, 이놈들이 나쁜 짓이란 나쁜 짓은 다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윽!”
사나이는 그대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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