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무질이 말을 타고 급히 영추문으로 나갔다.
다시 빈청으로 돌아온 정안군은 일행을 돌아본 뒤 입을 열었다.
“영안군은 아직 오지 않았소?”

누구를 지목해서 묻지 않았는데 이제가 대답했다.
“영안군은 소격전에서 전하의 쾌차를 비는 제를 올리고 있소.”
영안군 방과는 원래 겁이 많고 행동이 소극적이라 사람들이 모이는 일에 잘 동참하지 않았다. 그러나 형제들 중 여색을 가장 밝혀 기방 출입이 잦았을 뿐 아니라 첩까지 두고 있었다.

예조전서를 지낸 조박(趙璞)의 누이뻘 되는 유씨를 첩으로 두었는데, 그 여인은 다른 사람에게 시집간 일이 있어 아들까지 달린 여인이었다.
이들이 무료하게 앉아 궐내에 신경을 쓰고 있는 동안 정안군의 집에서는 부부인을 중심으로 숨가쁜 일이 논의되고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민무질이 말을 타고 달려와 숨을 헐떡이며 부부인 민씨 방으로 뛰어갔다.

“누님! 누님, 큰일났습니다.”
땀에 젖은 그의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무슨 일인데 오라비는 그렇게 정신을 못 차리나.”
“자형이 잘못하면 큰 봉변을 당할지 모르겠습니다.”
“뭐야? 자세히 이야기해 봐.”

부부인은 동생의 팔을 잡고 안방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정도전이 드디어 음모를 꾸몄습니다. 오늘 아침부터 전하의 병환이 위중한 것을 핑계삼아 종친들과 대군들을 궁 안으로 불러들였습니다.”
“그래서?”

“근정문 안에서 세자 방석이 지휘하여 박위, 노석주, 변중량 등이 대군들을 불러들이면 갑사와 내노內奴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불시에 덤벼들어 공격하고, 밖에서는 정도전과 남은 등이 사병을 데리고 있다가 공격하여 다 죽이고 저들이 나라를 차지하겠다고 합니다. 이런 변괴가 어디 있습니까? 안산 이숙번 지사를 부르러 간 동생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이구, 정말 큰일이 닥쳤구나. 누구한테서 들은 이야긴지 틀림없겠지?”
“그쪽에 드나들던 문하부 참사 이무가 직접 들었다고 합니다.”
부부인 민씨는 잠시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 주저앉았다.

박위란 친군위 도진무사를 말함이요, 노석주는 좌부승지, 우산기상시 변중량은 우부승지를 겸하고 있었다.
그때 민무구가 들어왔다.

“이숙번 안산 지사가 장사들을 모아 남문 앞에 대기해 있습니다.”
한참 앉아 있던 삼남매는 부부인의 지시를 받고 급히 뛰어나갔다.
“여봐라! 소근이를 들라 일러라.”
부부인이 문 밖을 향해 소리쳤다. 목소리가 몹시 떨리고 있었다.
곧 문 밖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근이놈 대령했습니다, 부부인 마님.”

소근이는 정안 대군 집의 노비지만 정안군이 근수노비로 쓰고 있기 때문에 중요한 일을 많이 하는 편이었다.
“이리 들어오너라.”
뜻밖의 분부에 소근은 어리둥절했다. 남녀의 법이 엄중한데 아녀자가 노비를 안방으로 들어오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빨리 들어오지 않고 무엇을 우물쭈물하느냐?”

불호령이 떨어지고서야 소근이 방 문을 열고 엉금엉금 기어들어갔다.
부부인의 윗목에 단정히 앉아 서슬이 퍼런 눈을 하고 있었다.
“잘 들어라! 나으리의 목숨이 걸린 일이다.”
“옛?”
소근의 눈이 둥그래졌다.

“나으리의 목숨뿐 아니라 왕실의 목숨도 풍전등화에 이르렀다. 내 말을 잘 들어라! 지금 즉시 나으리의 말을 끌고 대궐로 들어가 나으리를 모시고 오너라.”
소근이 한참 동안 생각하고 앉아 있었다.
“빨리 가지 않고 무엇을 우물쭈물하느냐?”
“그런데 마님, 여러 사람들이 한 방에 앉아 기다리고 있을 텐데, 무슨 말씀을 드려 나으리만 나오시게 합니까?”

민씨는 그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내가 갑자기 가슴앓이가 도져 시각이 급하다고 여쭈어라. 그러면 급히 달려오실 것이다. 말을 가지고 가는 것을 잊지 말아라.”
소근이 벌떡 일어나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이 무렵, 조금 늦게 퇴청한 김용세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고 광통교 나무 다리를 막 건너고 있었다. 급히 말을 달려가던 한 무관이 말에서 내렸다.
“김 공 아니오?”
그는 몇 번 본 적이 있는 마천목이었다.
“마 장군께서…….”
“빨리 나를 따라오시오. 일이 급하게 돼가는 것 같소. 정안군 댁 부부인꼐서 모두 모이라는 전갈이 왔소.”

벌써 해가 지고 인왕산 위에는 붉은 노을이 걸려 있었다. 이 저녁에 무엇 때문에 사람을 불러 모은단 말인가? 김용세는 별 생각을 다하면서 마천목과 함께 정안군의 집에 도착했다. 노을이 진 하늘은 금방 어둠이 끼었다.
김용세가 객사에 들어서자 거기서 이무와 박포가 막 나오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도 무척 상기되어 있었다. 특히 이무는 굉장히 겁에 질려 있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사랑방에 들어가 앉았다.

“무슨 일이 났나요?”
김용세가 앉자마자 물었다.
“봉화백 일당이 오늘 밤에 일을 저지른다고 합니다.”
“옛? 일을 저지르다니요?”
김용세는 깜짝 놀랐다.

“왕자들을 모두 모살할 획책을 하고 있답니다.”
“모살이라니요? 모사할 사람들이 그런 말을 미리 흘립니까?”
김용세는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으로 말했다.
“문하부 참사 이무와 박포의 말이라고 하더군.”
“이무 참사? 중추원 박포 지사?”

김용세는 두 사람의 사람됨에 대해 들은 바가 있기 때문에 믿기 어려웠다. 이무는 문관이고 박포는 무관인데, 두 사람 모두 사리사욕을 밝히고 이 세력 저 세력 눈치를 보는 무소신자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김용세는 이 일에 휩쓸리지 말고 빠져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좀처럼 기회가 없었다.
그들이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경복궁에서 정안군과 소근이 함께 돌아온 것이다.

정안군은 부부인과 함께 안방으로 들어갔다. 민무질이 따라 들어갔다. 김용세와 마천목은 안마당을 서성이며 안에서 나누는 대화를 들었다.
“그러니 다시 궁으로 들어가지는 마십시오. 여기서 병사를 모아 집을 지키고 있다가 날이 새면 이숙번 지사에게 합류를 청하시어 일을 평정하심이 옳은 줄로 압니다.”
부부인 민씨의 권유였다.

“그건 안 될 말이오. 정말 그런 일이 있다면 대궐에 남아 있는 형님들이 어떻게 되겠소? 봉화백이 그렇게까지 할 사람은 아니오.”
정안군이 부부인을 오히려 나무라고 궁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부인이 아프다고 하니까 의안군이 급히 청심환과 소합환을 구해다가 나에게 줍디다. 자, 간수했다가 정말 아프거든 쓰시오.”

정안군은 이렇게 말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제야 그는 마천목과 김용세를 발견하고 웃어 보였다. 옆에서 보니 그의 코밑 수염이 긴장해서 쭈뼛하게 선 것 같았다. 

[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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