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하, 회안 대군 나으리 댁의 전 노비였던 석구지란 놈의 행패가 엊그제 같습니다. 종의 신분으로 감히 주부 이항의 집에 찾아가 여종을 내놓으라고 행패를 부리다가 목이 달아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회안 대군 댁 종이 또 무수리를 욕보이고 죽인단 말입니까?

이는 대군 나으리들께서 너무 만용하신 탓이오니 다시 교지를 내리시어 남은 사병을 모두 해산하고 기강을 엄히 하라고 하심이 어떠할지요?”
왕은 이런 주청을 들을 때마다 괴로웠다. 더구나 봉화백 정도전은 더욱 강경했다.

“신 등이 사병을 해산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 주청 드리는 것은 그들의 군세가 겁나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병은 국가의 정병正兵으로 편성시켜 요동을 치는 일을 앞당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 개인의 병졸이 되어 기강을 무너뜨리면 큰 일을 도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전왕조가 무너진 것도 사병 제도 때문이라는 것을 전하께서도 너무 잘 아시는 일입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정도전의 말은 옳은 점이 많았다. 정도전뿐 아니라 의성군 남은도 요동 정벌을 서두르기 위해 군사력을 결집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계속했다.
그러나 정안군 측에 있는 좌의정 조준도 가만있지 않았다.

“전하, 봉화백 등은 계속해서 명나라의 요동을 정벌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신 등 도당에서는 가당치 않은 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첫째, 이소역대以小逆大하여 대명을 친다고 하는 것은 언어도단입니다. 그것은 봉화백이 표문사건을 모면하고자 하는 얕은꾀에 불과합니다. 둘째, 수도를 한양으로 옮긴 후 궁전 공사와 도성 축조 공사, 그리고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정릉 공사 및 흥천사와 사리전 공사 등으로 백성이 지쳐있는 상태입니다. 출역이 잦아 백성들이 농사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 판국에 또 출병을 한다는 것은 보통 무리한 일이 아닌 줄로 아룁니다. 이 말씀은 신 등의 의견이 아니라 전하가 하신 말씀입니다. 전하께서는 전왕조 때의 일을 기억하시고 계실 것입니다. 무진년에 전왕 우(禑)와 최영(崔瑩)이 요동을 치자고 했을 때 전하께서는 네 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하셨습니다. 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칠 수 없음이요, 둘째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할 수 없고, 셋째 그 사이 왜적의 침입이 우려되고, 넷째 무더운 장마철이라 돌림병이 우려된다고 전하께선 말씀하셨습니다. 그 뜻을 지키시옵소서.”

겁간 사건은 마침내 신덕 왕비 모독 사건으로 번져 방간과 방원의 집 사병 진무들과 소근 등 종 수십 명이 순군부에 투옥되었다. 왕은 두 왕자와 박포의 직위를 박탈하려고 했다. 그러나 의안군 이화를 비롯한 한씨 소생 다섯 왕자가 한꺼번에 왕 앞에 몰려와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 일은 근 석 달간 조정 안팎을 시끄럽게 했다.

겁간 사건 연루자인 종 중근과 이수돌에게는 능지처참형을 내려 사지를 찢어죽였다. 연루가 있다고 생각되는 진무, 종 등 수십 명은 장형을 맞고 귀양갔다.
그러나 왕은 대군들은 그냥 두었다. 사건의 배후에 있었던 소근도 어느 틈에 정안군의 사저로 돌아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지내고 있었다. 

궁 내외에 일고 있는 먹구름이 날이 갈수록 짙어진다는 것을 김용세는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소근이 제대로 처벌을 받지 않았으니 자연히 신홍아가 걱정이 된 그는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신홍아를 만날 방법이 혹시 있을까 하여 태평방에 가려고 광화문을 막 나섰다.
“김 공!”

사나이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 돌아보았더니 거기엔 뜻밖에도 정기준이 삿갓을 걷어 올리며 서 있었다.
“아니, 노형이 웬일로?”
“여기서 반나절은 기다렸소. 동문 밖 외가에 좀 다녀오다가 문득 김 공 생각이 나서…… 오늘 남문 밖에서 석전이 벌어진다는 것 아시오? 거기 구경이나 갑시다.”

그날 남문 밖 병마 단련장에서 석전이 있다는 것을 김용세도 알고 있었다. 이번 석전에는 병사가 1천 명이나 동원되며 왕도 관전하기 위해 행차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석전이란 돌파매질을 잘하는 군사들을 두 패로 갈라 돌싸움을 하게 하고 왕과 왕세자 및 왕실 종친, 고관들이 관전하는 일이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면 가서 구경이나 하지요.”

김용세는 신 상궁 집 근처에 가서 얼씬거릴 일은 포기하고 정기준과 함께 남문 밖으로 갔다. 석전은 그때까지 끝나지 않고 계속되고 있었다.
“김 공이 여길 웬일이오?”
김용세는 거기서 뜻밖에도 마천목을 만났다. 그는 정안군과 늘 행동을 같이했기 때문에 근처의 정안군이 와있으려니 하고 생각했다.
“그냥 퇴청하다가…….”

마천목은 삿갓을 쓴 정기준을 흘끔흘끔 보았다. 위로 쭉 찢어진 그의 눈이 그리 곱지는 않았다. 김용세가 인사를 시키려고 하자 정기준은 돌아서서 딴전을 피웠다.
“석전은 아직 멀었나요?”
병졸들의 고함 소리와 쫓고 쫓기는 숨가쁜 모습이 한창 고조에 이른 것 같았다.
“수십 명이 죽고 백여 명이나 다쳤지만 아직도 끝나지 않았소.”

마천목이 차고 있는 자기 칼을 흔들면서 말했다. 석전 단련은 그냥 장난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전과 똑같기 때문에 목숨을 잃는 병사도 많았다. 단련장 중앙이 잘 보이는 목멱산 서쪽 기슭에 차일을 치고 앉아 있던 왕이 자리를 뜨자 석전도 막을 내렸다. 흙바다 위에는 격전을 치른 전장답게 부상당해 신음하는 병졸들이 많았다.
“마침 잘 만났소. 나으리 댁에 좀 같이 가시지요.”

마천목이 김용세를 보고 말했다. 말은 그렇게 해도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명령이었다. 품계로 보면 상장군인 마천목은 정3품으로 김용세보다는 훨씬 위이지만 그는 김용세에게 깍듯이 했다.
“김공, 나는 그만 집으로 가겠소. 내 걱정은 말고 다녀오시지요. 근데 저놈은 조심해야 합니다.”

정기준이 김용세의 귓가에 대고 이렇게 말하고는 홀연히 돌아서서 가버렸다.
김용세는 마천목을 따라 목멱산 북쪽 기슭에 있는 정안군의 집으로 갔다. 그는 객사에 안내되었다. 거기에는 여러 명의 높고 낮은 문무관이 모여 있었다.
정안군의 객사에는 여러 번 와본 일이 있는데 그때마다 이상히 여긴 것은 품계가 낮건 높건 상관하지 않고 한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종놈들도 가끔 끼여들어 말을 걸다가 혼쭐이 나기도 했다.

그날도 객사에는 이거이, 정안군의 처족인 민무질, 민무구 형제, 그리고 이숙번 등이 있었다.
“나으리, 소인 서운관 승 김용세 문안 여쭙니다.”
김용세가 좌상의 자리에 있는 이거이와 이숙번에게 인사를 했다.
“어서 오게. 지난번에 정안군 나으리의 무인년 운세는 참으로 애쓴 것이었네.”
이숙번이 치하를 했다.

“죽는 것이 무섭지 아니한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만은…….”
민무질이 불청객인 김용세를 흘끔흘끔 보면서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김용세는 그들이 이야기하는데 불편하지 않도록 옆방으로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옆방에서 팔베개를 하고 벌렁 누웠다. 천장 서까래에 파리똥이 잔뜩 묻어 새집을 무색하게 했다.
“그럼 우선 베어야 할 놈부터 말해봐.”

옆방에서 하는 말소리가 장지문 사이로 막힘없이 생생하게 들렸다.
‘베어야 할 놈?’
김용세는 귀가 솔깃해졌다. 벌떡 일어나 앉아 귀를 곤두세웠다.
“정가만 베면 다른 자들이야 오합지졸, 흉년의 좁쌀처럼 흩어지지 않을까?”
누구의 목소리인지 확실히 구분이 가지 않았다. 정가라고 한 것은 봉화백 정도전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내시 김사행을 먼저 목 베야 하지 않을까요? 그놈이 온갖 나쁜 이야기를 주상께 일러바치고 있으니…….”
“그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럼 우선 죽여야 할 자들의 이름을 대보게.”
“남은…….”
누군가가 얼른 대답했다.

[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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