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이 이쯤 되니 문제를 삼지 않을 수 없었다. 형조에서 죄를 주자고 왕에게 청했다. 그 사이에 왕미와 그 아내는 또 눈이 맞았는지 함께 도망을 치고 말았다. 왕은 비록 현직이 아닌 산관이었지만 정3품인 왕미의 첩지를 회수하라고 명했다.

왕이 대사헌을 급히 부른 것은 사알의 말대로 겁간 사건이 났기 때문이었다. 그 사건이 민가에 나가 있는 상궁 신홍아의 집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뒤늦게 안 김용세는 놀라 숨이 멎는 줄 알았다.

더구나 그들이 혜화문 밖 삼선 계곡에서 단풍을 즐기고 온 그날이었다. 겁간 사건이라고 말을 해서 그렇지 사실은 살인 사건이었다.
신홍아가 김용세와 하루를 보내고 해질녘에 태평방 집에 들어왔을 때 집 안은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비자들이 통곡하고 있고 무수리 유연분은 처참한 모습으로 뒤꼍 평상 위에서 죽어 있었다.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 연분아, 연분아!”
신홍아는 이미 싸늘해진 무수리를 안고 몸부림쳤다. 유연분은 저고리가 반쯤 벗겨지고 치마와 속옷까지 다 찢어져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우리도 잘 몰라요. 방에 있다가 비명 소리가 들려 나와 보니까 시커먼 남자 둘이…….”
여종들이 울면서 말했다. 알 수 없는 남자 두 명이 들어와 유연분을 겁탈하고 반항하는 그녀를 목졸라 죽이고 사라졌다는 것이다.

사건은 곧 한성부 형방에 알려지고, 상대가 여염집 여인들이 아닌 첩지받은 궁인이라 형조와 도평의사, 승정원에까지 보고되고 이튿날 아침에는 왕에게까지 전해졌다.
왕은 대단히 진노하여 대사헌 이직으로 하여금 위관(委官)이 되어 사건의 진상을 철저히 가려내고 범인들을 잡아 대명률에 따라 엄중히 다스리라고 명했다.

형조와 순군부, 그리고 한성부까지 협력해 범인 색출에 나섰고 밤새 용의자로 두 명을 잡아다 순군부에 가두어 두고 있었다. 그 범인 두 명은 장차 정치 파란을 일으킬 불씨가 될 수 있는 자들이었다.

중근(重斤)이라는 면천된 노비와 이수돌(李洙乭)이라는 건달 등 두명이 그들이다. 이들 중 중근이란 자는 전에 회안군 방간의 노비였다가 힘이 세고 칼을 잘 다루어 사병으로 올려주고 변정도감에 연락해 노비 문서를 빼준 자였다. 뒤에 사병 해산 때 회안군의 집에서 나가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니는 자였다. 그러나 일단 회안군이 찾으면 곧 돌아올 수 있는 자이기도 했다.

이수돌이란 자는 중추원 상의 박포의 식객이었는데 삼군부의 말직 나장으로 있는 자였다.
이들이 왕을 뫼시던 궁녀를 대낮에 겁탈하고 죽였다는 것은 강상 범죄 이상의 중죄임이 틀림없었다.

정도전이 동북 순무순찰사로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잠잠히 지내던 친봉화백 대신들이 가만 있을 리 없었다. 범인 중근은 정안군의 주요 측근인 회안군 방간의 사람이요, 이수돌도 정안군 측근인 박포의 식객이었다.
내시 김사행, 우산기상시 변중량, 의성군 남은 등이 왕에게 진상을 철저히 가려 그 상전들도 혼내야 한다고 청했다.

“개국 이후 아직 법도가 확립되지 못하고 권도도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그 책임이 모두 딴 뜻을 품고 있는 무리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차제에 이들의 연루자를 엄중히 가려내어 파직 치죄함으로써 사직을 튼튼히 하고 백성에게 기강을 세우는 본보기가 되도록 해야합니다.”
남은이 아뢰었다.

“그 일과 사직까지야 무슨 관계가 있을까마는 과인이 거느리던 아이를 그 모양으로 만들었으니 보통 일은 아닌 것 같소. 경은 일이 밝혀지는 대로 과인에게 알려주시오.”
두 손을 부들부들 떨며 진노하던 왕이 조금 누그러진 것 같았다.
순군부에 갇힌 두 죄인은 그 집에 들어간 것은 인정했으나 겁간과 살인은 좀처럼 불지 않았다.

마침내 위관 이직 대사헌의 지휘로 시체에 대한 검험(檢驗)이 시작되었다.
변사 사건이 생겼을 때는 보통 한성부나 형조의 하급 관원들이 검험을 하는 것이 상례였으나 이 사안은 특별히 대사헌이 직접 지휘를 하고 한성부와 형조에서도 간여하게 되었다.

검험은 먼저 사건 현장인 태평방 신홍아의 집에서부터 시작이 되었다. 집 주위는 순군부의나장들이 나와 잡인의 접근을 엄중히 금한 가운데 앞마당에 차일을 치고 지휘부를 만든 뒤 대사헌이 좌정하였다. 그리고 사헌부 판관 이속들이 시위했다.

검험을 받아야 할 시체가 여자인지라 난처한 일이 많았다. 여자 변시체의 검험에 대해서는 이직 대사헌이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형조의 전문 이속들에게 맡기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이런 일에 경험이 많은 형조의 종7품 명률 김주선(金周善)이 검험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시신은 어디 있습니까?”
김주선이 울어서 눈이 퉁퉁 부운 신 상궁에게 물었다.
“어젯밤 노천에서 이슬을 맞게 할 수가 없어 방에 옮겨 두었습니다.”
“허허, 그렇게 옮기면 안 되는데. 원래 죽었을 당시의 모습대로 옮겨 놓아야겠습니다.”
그가 지휘하는 대로 노비들이 유연분의 시신을 들어다가 뒷마당 평상 위에 놓았다. 노비들이 기억을 살려 처음 발견된 모습대로 해놓았다.

시신은 평상에 반듯이 누운 채 하반신은 평상에 거의 걸쳐져 두 발이 당에 닿아 있었다. 흐트러진 옷 차림도 당시와 비슷하게 재현되었다. 신발은 벗겨져 어디론가 가고 없었다. 버선은 신지 않아 하얀 발목이 그대로 보였다.

이제 현장 모습을 기록한 뒤 옷을 벗기고 초험(初驗)이 시작된다. 원래 남자의 시신들도 관원들이 검험을 기피하는데 이번 경우는 여자라서 더욱 어려운 점이 많았다. 비록 시신이지만 처녀를 발가벗기고 내장을 드러내는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여자들이 그 일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증험을 하는 증언자로는 대개 여자의 이모나 올케, 또는 이웃 부인 서너 명이 입회를 한다. 이번 경우는 신 상궁과 이웃집의 검교 부인 및 선략장군 첩 한 사람 등 세 명이 증험하기로 했다.

지휘와 기록을 맡은 김명률만이 유일한 남자였다.
그는 검험의 절차를 규정한 <백헌총요>(百憲摠要) 형전에서 검험조를 펼쳐 들었다. 실제로 검험을 할 수생파收生婆가 들어와 시신 앞에 섰다. 신 상궁은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겨우 몸을 가누고 서 있었다. 나이가 마흔은 족히 넘어 보이는 수생파는 약간의 의원 지식을 갖춘 여자로 이런 일에는 익숙해 있었다.

우선, 김명률이 시신의 모습을 세세하게 기록하기 시작했다. 저고리는 고름이 떨어진 채 흩어져 있고 치마와 속옷들은 찢긴 채 헤쳐져 있었다.
그는 사지(四至) 기록, 즉 시신의 형태와 주위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빠짐없이 기록했다. 기록이 끝나자 그는 여종들을 보고 말했다.
“시신을 평상 위에 반듯하게 눕혀라.”

시신이 눕혀졌다. 햇볕을 받아 머리칼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었다. 이어서 수생파가 옷가지를 하나씩 하나씩 벗겼다. 먼저 고름이 떨어져 나간 저고리를 벗겼다. 아청색의 겹당저고리는 무수리들의 평상복이었다.
다음에 같은 아청색의 치마를 벗기자 폭이 넓은 하얀 중의 치마가 나왔다. 그것은 여러 곳이 찢기고 더러는 핏자국과 배설물들이 묻어 있었다. 김명률은 그 모양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었다.

[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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