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은 내시 김사행을 시켜 왕에게 새로운 제안을 내놓았다. 궁내의 양팔 격이었던 내시 조순이 먼 곳에 유형 안치된 후로 김사행이 더욱 두드러지게 일을 처리했다.
“상감마마, 대군들이 경조京兆에서 할 일은 거의 이룬 것 같으니 이제 지방 일에 눈을 좀 돌리게 하는 것이 어떠하올지요?”

김사행은 눈치를 보아 가며 그 특유의 말씨로 왕의 의견을 엿보려 했다.
“지방?”
왕이 의아해했다.

“대국에서는 예부터 지방에 제후를 보내어 나라를 평안하게 다스리게 했습니다. 황제의 입장에서 보면 제후는 곧 왕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대군들을 지방에 보내서…….”
김사행의 말을 왕이 가로막았다.
“그래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우선 우리 왕실의 연원이 되는 전라 지방과 동북 지방이 가장 중요하고…….”
그것은 이씨 왕조가 전주를 관향으로 쓰고 있고 실질적인 근거지는 동북, 즉 함길 영흥 지방이기 때문에 한 말이었다.

이 일이 있는 후 왕은 정안군을 전라도, 방번을 동북면 도백으로 임명하고 별전을 떼주었다. 그러나 실제로 임지에는 가지도 않고, 별전만 관리하는 정도였다. 이때 정안군은 동북면에 있는 왕가의 가전(家田) 중 자기 몫으로 배당된 것을 방번에게 주는 아량을 베풀기도 했다.

정안군은 같은 현비 강씨의 소생으로 왕세자 자리를 아우에게 빼앗긴 무안군 방번의 입장을 동정하면서 그를 동복 아우 편이 되지 않도록 신경을 쓰고 있었다.
정도전 측에서 한씨 소생 왕자들의 전력을 분산시키려는 책동에 대해 정안군 측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이제 왕조의 기틀을 다졌으니 공신을 동북면에 보내 열성조의 능을 돌보고 북방 변비도 든든히 해야 할 줄로 압니다. 봉화백 같은 분이 그 일을 맡는다면 조상들께서도 저세상에서나마 기뻐하실 것입니다.”
정안군의 간곡한 건의를 왕이 받아들였다.

왕은 봉화백 정도전을 동북 도선무순찰사로 임명하고 왕이 등극 전에 있던 함길 영흥 지방을 순시하며 북쪽 방어 시설을 정비하고, 왕의 조상들 즉 4대조 목조, 익조, 도조, 환조로 추존된 할아버지들의 유택을 고쳐 쓰도록 했다.
왕은 정도전을 떠나 보내기 전날 궁의 북쪽 후원 정자에서 술상을 같이 했다. 현비 국상 후로 전국에 음주가무 금지령을 내린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거기에 초청된 사람들은 거의 정도전의 동조자들이었다.

문하부 참찬 이지란, 월성군 설장수(?長壽), 판한성부사 성석린(成石璘), 문하부 참사 심덕부(沈德符), 영삼사 권중화(權仲和), 좌정승 조준, 우정승 김사형, 의성군 남은 등이 주요 참석자였다. 여기서 반봉화백파로 색깔이 선명한 조준 외에는 거의 중립이거나 정도전의 수하였다.

왕은 손수 정도전에게 술을 내리며 말했다.
“내가 오늘 이렇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모두 봉화백의 덕택이야. 가짜 왕조 시절부터 나에게 용기를 주었고 개국의 거사도 사실은 공의 힘으로 된 것이나 다름없지. 한양으로 천도한 것도 공의 결단한 바가 컸고…….”

정도전은 어쩔 줄 몰라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엎드렸다.
“전하, 소신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과찬의 말씀 거두어 주십시오.”
“과찬이 아니오. 자초 대사는 내가 사람을 잘못 보는 돼지라고 했는데, 봉화백 한 사람만은 틀림없이 잘 본 것 같소. 허허허.”

왕이 크게 웃자 모두 따라 웃었다. 자초 무학 대사가 왕을 돼지라고 했다는 것은 연유가 있었다. 한양 정도 후 경복궁 공사가 한창일 때 독려차 행차한 왕이 때마침 그곳에 들른 자초와 차일 안에서 점심을 함께했다. 그 자리에서 왕은 자초에게 농을 걸었다.
“국사는 불경을 통달하여 득도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현비가 말했지만 과인이 오늘 자세히 보니 꼭 돼지같이 생겼구려. 하하하.”

좌중이 웃을 수도 안 웃을 수도 없어 자초의 얼굴만 보고 있는데 자초가 껄껄 웃었다.
“아니 국사를 돼지 같다고 했는데 어찌 성을 내지 않고 웃기만 하오? 그래 국사는 과인이 무엇처럼 보이오?”

“예. 소승의 눈에는 전하가 부처님처럼 보입니다.”
자초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요? 어째서 그렇게 보이오?”
왕이 흡족해 하며 되물었다.
“부처님께서 이르시기를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고 하셨습니다.”
자초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

“뭐, 뭐라고? 그럼 나는 돼지고 국사는 부처? 하하하, 과연 명답이오.”
좌중이 모두 파안대소했다. 왕의 말은 이 일을 두고 한 것이었다.
후원의 잔치가 한참 무르익자 봉화백에 대한 왕의 칭찬이 더 계속되었다.
“<경제육전>을 짓고, <경국대전>을 알기 쉽게 정리한 것도 공의 덕이요, <오행진출도> 같은 병서를 만든 것도 공의 노력이오. 그뿐이오? 경복궁이란 이름부터 각 전각의 이름, 문의 이름, 다리 이름, 이 모두가 공의 박식한 지혜로 지은 것들 아니오.”

그 날의 일을 두고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해석했다. 친정도전 측에서는 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과시한 것이라고 했고, 반정도전 측에서는 동북쪽으로 쫓아내니 미안해서 그랬을 뿐이란 해석이었다.
그러나 왕은 정도전을 보내놓고는 가만있지 않았다. 계속 사람을 시켜 옷가지, 살림 도구 등을 보내고 안부를 물었다. 봉화백이 북변에 새로 성을 쌓았다는 봉서를 받고는 과히 윤관(尹瓘) 장군의 업적과 맞먹는다고 칭찬했다.

왕은 어느 날 지방서 온 장계를 올리고 나가는 도승지 이문화를 보고 느닷없이 물었다.
“내가 별호를 하나 지을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원래 내 이름은 단(旦)이고, 이름은 성계고, 자는 군진(君晉)이 아니냐. 그런데…….”

이문화가 갑자기 당하는 일이라 무어라고 답을 못하고 있자 왕이 다시 말을 계속했다.
“내가 들으니 먼저 왕조의 충숙왕이 거사라는 칭호로 예천군 권한공(權漢功)에게 서찰을 보낸 일이 있다고 하더군.”
“전하께서는 별호를 지으셔서 어디에 쓰시려는지요?”
“나는 동북에 가서 고생하는 봉화백에게 글을 써 보낼까 한다.”
그제서야 이문화는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전하께서 등극하시기 전의 거소인 개경 싸릿골의 송헌이 생각나십니까? 그 이름을 따서 송헌거사(松軒居士)로 하심이 어떨지요.”
“송헌거사라, 그거 좋겠구나.”
왕은 흡족해하면서 곧 정도전에게 편지를 쓴 뒤 중추원 부사 신극공을 동북면 도선위사로 임명하고 서찰과 함께 옷가지와 술을 가지고 정도전에게 가도록 했다.

현비의 소상, 대상이 다 지나 세자도 상복을 벗고 평상복을 입었다. 그러나 궐내의 분위기는 아직 완전히 현비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해야 할 것 같았다. 왕은 아직도 정릉 나들이와 흥천사 돌보기가 주된 일과가 되어 있었다. 승지들은 왕이 흥천사에 궁전 전래의 보물을 많이 주었다는 말을 쉬쉬해 가면서 발설했다.

정도전이 한양을 떠난 뒤 해가 바뀌자 정안군과의 팽팽한 대립이 좀 누그러진 것같이 보였다. 그러나 실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힘겨루기가 더욱 더 팽팽해져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정도전을 동북으로 보낸 것은 대군들의 성과라고 하겠지만 그들도 상당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우선 데리고 있던 사병을 거의 해산시켜야만 했다. 그러나 정안군의 사병은 2백여 명에서 50명 이하로 줄었다. 남은 사병의 대부분은 병사가 아니라 노비였다. 방간도 거의 해산을 시켰으나 수십 명은 데리고 있었다. 회안군 방간의 사병들은 장안의 건달 주먹패가 주력이기 때문에 거칠기로 이름이 났었다. 그리고 그들은 해산했다고는 하지만 회안군이 필요할 때 부르면 언제나 재편성이 가능한 가동 인력이었다.

[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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