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누군 줄 아느냐? 내가 바로 천하의 회안 대군 나으리를 모시는 석구지다. 빨리 그 여자를 내놓지 않으면 요절이 날 줄 알아라.”
이 일은 정안군 측에는 큰 악재가 되었고, 정도전 측에는 호재였다. 이 일은 내시 김사행과 조순을 통해 과장되어 왕에게 보고되었다.
석구지는 즉각 순군부에 끌려가 목이 베였다.

노비들의 기강이 헤이해지자 정도전 측에서 노비의 기강을 세우는 일과 함께 대군을 중심으로 한 문무관들이 기르는 사병(私兵)을 해산해야 한다는 주장을 들고 나왔다. 정도전의 건의를 받아들여 노비를 관리하던 변정도감으로 하여금 철저히 단속하라는 어명이 마침내 내려졌다.

새 왕조가 들어서면서 가장 중요하게 내세운 것은 노비 등 재산 관리의 공정성, 즉 경제 혁신에 관한 일이었다. 그중에도 과거 왕씨 정권 때 재산을 독점하고 있던 소위 기득권 귀족들의 재산 몰수와 공정한 분배 문제가 정책의 초점이었다. 정도전과 방원의 반목도 이 문제와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재산이라고 하는 것은 전답과 노비 및 사병을 주로 일컫는 것이었다. 고려 초기의 전답 제도는 사전은 인정하지 않고, 모든 전답은 국가 소유이고 관리들이나 왕실은 그 정도에 따라 일시 경작권을 주는 제도였으나 왕조 말기에 와서 제도가 극히 문란해져 권력을 가진 자들이 전답을 거의 독점하여 사전화시키고 말았다.

이성계는 배극렴(裵克廉), 정도전 등과 함께 전답 제도의 확립을 내세우고 개국 이전부터 이 일에 착수했었다. 우왕과 고려 귀족들의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전제 개혁을 선포하기까지 했다. 또한 노비도 공정한 분배를 내세워 개국의 명분으로 삼았었다.

그러나 개국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지배층이 생기자 개국 초기의 명분은 퇴색되고 새로운 기득권 층끼리 싸움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김용세는 잘 보고 있었다.
특히 밀직사 첨서의 아들 정기준은 이러한 정권 담당자의 변질에 대해 과도하리 만큼 비판적이라 김용세와 입씨름도 많이 했다.

노비 제도만 해도 세월이 갈수록 문란해지고 부조리가 생기기 시작했다. 개국 초에 전왕조의 왕족과 고관들로부터 몰수한 노비들을 공신과 이씨 왕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노비들이 상전이 바뀌니까 그대로 있지 않고 도망가거나 자살하는 등 손실이 컸다. 이렇게 되니까 노비의 상전들은 노비를 내놓았던 전 주인에게 다른 노비를 내놓거나 노비가 없으면 돈이라도 대신 내놓으라고 횡포를 부렸다.

권력을 빼앗긴 전 주인들은 울며 겨자 먹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 주인이 능력이 없어 돈이나 다른 재산으로 갚지 못하면 그 친척이나 심지어 노비 문서를 대서해 준 이웃 사람에게까지 물리는 일이 생겼다.

그러나 정도전이 노비를 단속하고자 한 것은 단순히 재산상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왕자들이 기르고 있는 막강한 사병 중에는 무술을 하는 노비들이 많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비의 관리가 문란해지고 서로 뺏는 일까지 생기자 형조에서 노비의 값에 대한 안을 만들어 도평의사사에 냈다. 내용은 남자 노비를 기준으로 15세에서 40세까지 한 사람 값은 오승포五升布 5백 필, 14세 이하나 41세 이상은 3백 필 이상은 못 받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왕이 변정도감에 지시하여 그렇게 하도록 했다.
“오늘은 우리 집에 가서 한잔하도록 하지요?”

퇴청 길에 군기시 앞에서 만난 정기준이 김용세를 보고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폐가 되지 않을지?”
전에도 몇 번 그의 집에 가서 술판을 벌여 그의 처를 괴롭혔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오늘은 나라 걱정을 좀 해야겠어요.”
“정 형이야 언제는 나라 걱정 백성 걱정 안 했나요?”

그는 술만 한잔 입에 들어가면 정사 맡은 자들을 닥치는 대로 난도질했다. 그날도 두 사람은 정심방(貞心坊)에 있는 정기준의 집으로 가서 술잔을 기울였다.
“임금부터 그 모양이니 나라꼴이 안 되는 것 아냐! 창칼로 임금 자리를 뺏은 자가 그나마 백성의 고통을 더 가중시키고 있으니……. 더구나 그보다 더 나쁜 자들은 권력 싸움이나 하는 문무 세력가들이야. 어제 중추원에 있는 내 죽마고우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참 기가 막혀서…….”

그는 큰 사발에 따라 놓은 백주를 단숨에 들이켜고는 말을 계속했다.
“봉화백인가 정도전인가 하는 자의 일당과 이방원 일당이 서로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동안 인륜은 다 무너지고 말았어. 그 녀석 이야기가…… 군기시에서 김 형처럼 승 벼슬씩이나 하는…….”
“나하고 비교는 말고.”

“알았어. 하여튼 정5품인 홍미(洪?)라는 자는 나라의 쌀과 콩을 훔쳐내다가 사헌부에 들켜 순군부에 갇혔다더군. 그뿐 아니라 삼군부의 선략 장군이라는 직책에 있는 안을귀(安乙貴)라는 놈은 대낮에 술도 취하지 않은 놈이 부하인 낭장 김구(金龜) 집에 들어가 그의 아내를 겁간하려고 대들었대. 처가 한사코 저항하자 칼을 빼들고 날뛰었다니……. 이 엄청난 일이 임금에게까지 보고되었지만 곤장 몇 대로 끝났다고 하잖아.”
그는 왕을 전하나 상감으로 부르지 않았다. 언제나 임금 아니면 이성계였다. 대신들도 모두 이름을 마구 부르거나 놈자를 붙이는 것이 예사였다.

“그건 큰 벼슬 안 한 놈들이니까 그렇다 치고 임금을 가장 가까이서 보필한다는 내시 조순曺恂이란 자 말이야. 그 천하의 간신배를 정승들이 서로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임금에게 잘 보이려고 난리라니……. 얼마 전에 의성군 남은하고 정가가 조순을 송현에 있는 남가의 첩 집으로 불러내 상다리가 부러지게 진수성찬을 차려 대접하며 아부를 했다더군. 그런데 이번에는 이것을 안 이방원 쪽에서 가만있지 않았다 이거지.”
그 뒷이야기는 김용세도 이미 신 상궁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정안군과 가까운 간관이 조순을 탄핵하는 글을 왕에게 직접 올렸다.
사헌부 간관이 올린 글의 내용은 아주 고약한 것이었다. 조순이 지난번 신덕 왕비의 장례 때 제 올리는 데 쓰인 궁중의 은그릇들을 훔쳐내 자기 집에 모두 숨겨두었다가 들통이 났다는 것이었다.

‘조순은 원래 가짜 왕조인 신가(辛家) 왕조의 내시로서 온갖 아부와 못된 짓을 다해 왔는데, 개국 이후에도 전하의 눈을 속여 못된 짓을 해오다가 마침내 이런 천인공노할 죄를 지었으니 파직시키고 대명률에 의해 처단함이 마땅한 줄로 아룁니다.’
신가라고 한 것은 고려의 마지막 두 왕인 우왕과 창왕이 승 신돈의 사통한 아들이란 뜻이다.

탄핵문을 본 봉화백은 난감함을 느꼈다. 마침내 왕은 그를 극형에 처하지 않고 외지로 내치도록 하명해 정도전의 주요 인물 하나가 제거되었다. 그러나 그는 얼마가지 않아 다시 풀려났다. 그뿐 아니었다. 개국하면서부터 불교를 탐탁히 생각하지 않은 개혁 세력은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그거야 봉화백도 처음에는 같은 입장이 아니었습니까? 모두가 이색(李穡)의 문하생으로서.”
정기준이 닥치는 대로 난도질을 하는 바람에 김용세는 슬그머니 화가 났다. 더구나 그는 김용세가 정안군과 가까이 지낸다는 것을 말면서도 조금도 개의치 않고 욕설을 퍼부어 댔다.

“맞았어. 하지만 여우같은 현비가 불교라면 끔벅 죽으니까 왕도 그렇게 된 거고 정도전도 불제자는 아니었지만 호의적으로 된 거지. 그런데 이제 현비가 없어진 마당인데 사정이 달라져야 하지 않겠어요? 그러나 왕이 하는 일을 봐요. 밤낮 정릉 아니면 회암사 같은 절에만 찾아다니고, 국고를 털어 콩이나 쌀을 바리바리 실어 절에 보내고, 궁중의 보물들도 다 능이나 절에 가져다 놓았을 거야.”

정기준의 말이 모두 틀린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되자 봉화백과 세자의 세력에 타격을 주기 위해 정안군 측에서 불교 사찰의 폐해를 계속 들고 나왔다. 

[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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