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자측의 무안군 방번도 사병을 놓지 않겠다고 버텨 가장 많은 병졸이 그대로 남았다.
정안군의 잔졸들은 남문 밖에서 가끔 훈련을 했고, 세자 측의 군졸들은 흥인문 안에서 진법을 익혔다.

왕도 친위군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그 조직은 거의 의흥삼군부에 편성되어 있었다. 궁성을 지키는 시위군은 대부분 갑사甲士들인데 이들은 양인이나 양반의 후예로 구성되어 가장 질이 좋은 갑옷 무장의 병사들이었다.

갑사는 상당한 녹봉을 받고 있었으며 신분이 보장되어 충성심이 강했다.
무반의 말단 군직인 갑사는 지망자가 많았기 때문에 개국초에 갑사 시취령試取令을 내려 양민들이나 혈통이 순수한 집 자제로 전답 5~6결, 노비 5~6인 이상을 가진 자라야 응시할 수 있게 했다. 궁 내외를 시위(侍衛)하는 갑사는 2천 명이 있었으나 삼군부를 설치하면서 1천5백여 명으로 줄었다.

이 갑사들은 엄밀히 말해 왕의 직계 군 조직이고, 나아가서는 세자를 보위해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었다.
1천여 명의 갑사가 매일 궁에서 사는 것은 아니고 숙번제를 정해 사가에서 출퇴궁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삼군부의 주요 단위 조직인 상장군, 대장군의 지휘를 받아 몇 개의 위(衛)로 편성되어 있었다.

이 무렵 조정의 파당은 왕을 빼고 크게 두 부류, 세분하면 네 부류로 나뉘어 있었다. 두 부류란 말할 것도 없이 현비의 영향 하에 있었던 봉화백의 세력과 정안군의 세력이다. 정안군은 봉화백보다 나이가 스물다섯 살 이상 어린 서른 살 미만이었으나 그 세력권은 그와 겨눌 만했다.
세력을 넷으로 본다면 정도전의 비호를 받고 있는 세자의 세력과 눈치만 보고 있는 소위 중립 세력이다.

정도전의 측근 중 주요 인물은 의성군 남은, 내시 조순과 김사행, 세자의 장인 심효(생沈孝生), 중추원 판사 이근(李懃), 문하부 참사 이무(李茂), 흥성군 장지화(張至和), 성신군 이직(李稷), 우산기상시 변중량 등이다. 친정도전계의 세자 세력은 세자의 매부 이제, 진군위 도지무사 박위(朴?), 좌부승지 노석주(盧石柱) 등이다.

그리고 정안군 방원의 측근 중 주요 인물은 방의(芳毅), 방간 등 두 형과 문하부 참찬 이거이와 그의 두 아들 이백경(李伯卿 왕의 큰딸 경신궁주(慶愼宮主)의 남편)과 이백강(李伯剛), 좌정승 조준, 우정승 김사형, 정안군의 처남 민무구(閔無咎), 민무질(閔無疾) 형제, 안산 군수 이숙번, 하륜 등이었다.
중립 세력은 찬성사 이지란, 왕의 둘째 사위 심종(沈淙), 학사 정탁 등이었다. 그러나 이들 중립 세력은 거의 결정적인 순간에 유리한 쪽으로 기울어졌다.

매일 입궁만 하면 여기저기서 패 가르는 이야기만 듣던 김용세는 어느 날 오후 서운관 뒤편 옥당 앞에서 신홍아를 만났다. 유달리 피부가 흰 그녀는 그날따라 더 창백한 얼굴에 울먹이는 듯한 표정으로 김용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김용세는 공연히 가슴이 저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웬일이오?”

김용세가 그녀를 옥당 뒤 툇마루에 앉히며 물었다. 그녀는 울음을 참느라고 울먹이며 겨우 입을 열었다.
“저, 하직 인사 올리려고 왔어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눈물을 훔치기 바빴다.
“궁에서 나가는 것이구려.”

김용세는 그녀가 나간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을 몰랐다. 이제 서른을 바라보는 창창한 나이에 일생을 낯선 곳에서 혼자 보내야 하는 그녀의 기구한 운명이 안쓰러워 김용세도 눈자위가 물기에 젖었다.
“언제 나가게 되나요?”

김용세는 그녀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지 못하고 물었다.
“내일 나갑니다.”
그녀는 얼굴을 감싸쥐고 어깨를 들먹였다.
“사가는 준비가 되었나요?”

“전하께서 액정서에 명해 취현방 옆의 태평방(太平坊)에 살림 도구를 장만하게 했다고 하더군요.”
“그 집에는 혼자 있게 됩니까?”
“유연분이라는 무수리 아이 하나와 노비 두 명이 있습니다. 전하께서 중전전에 있던 아이 중에 데리고 가도록 윤허하셨습니다.”

무수리란 궁녀의 일종으로 아직 항아나 상궁이 되지 못한 내인(나인)들을 말한다. 그 당시 경복궁의 궁녀들은 대부분이 고려조 때 개경 수창궁에 있던 내인들이었고, 왕의 사저에서 오거나 새로 민가에서 뽑혀 온 궁녀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내인들은 모두 내명부에 소속되어 있는데, 이들의 사회에도 엄격한 기율과 계급이 있는 것은 물론이다.

개국 이후 정도전 등이 궁인직에 대한 새로운 조례를 만들기는 했으나, 대체로 고려 말에 쓰던 직제를 그대로 이어받고 있었다.
정도전이 정한 것을 보면 내관 여자의 직급으로는 현의(賢儀) 2인, 숙의(淑儀) 2인, 찬덕(贊德) 3인, 순성(順成) 3인, 그리고 상궁, 가령, 사급 등을 둔다고 되어있다.

여기서 현의, 숙의 등은 궁녀 중에서 왕의 승은을 받거나 선택되어 왕후는 아니지만 비빈이 된 여자를 말한다. 현의는 품계가 정1품이나 종1품이며, 숙의는 2품, 찬덕은 3품 등 대단히 높은 품계를 가지고 있다. 상궁 이하는 정5품 이하이지만, 제조 상궁이 되려면 대개 나이가 마흔은 넘어야 하는데도 신홍아는 현비를 따라 들어온 본방 상궁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경우였다.

상궁들은 가령이니 사급이니 하는 공식 계급을 정해놓았지만 그런 호칭은 거의 쓰이지 않았다. 계급을 말할 때는 상궁, 항아, 무수리, 생각시, 아기 등으로만 불렀다.

상궁은 항아 시절을 거쳐 올라가는데 그들은 엄격히 직책이 구분되어 있다. 국초에는 여말 제도인 상서(尙書), 상식尙食 등의 용어와 함께 침소를 맡은 지밀과 의상을 맡은 침방, 장식 수(繡) 등을 맡은 수방, 조석으로 왕, 왕비의 목욕과 세숫물 대령 등을 맡은 세수간, 식사 이외의 과일 등을 맡은 생과방, 조석 수라를 관장하는 소주방, 빨래를 맡은 세답방 등이 있다.

여기에는 각각 상궁, 항아, 무수리, 비자(종)가 적당한 수로 배치되어 있다. 모든 내인들은 무조건 하루 종일 어전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니고 오후 미시를 기준으로 번番 근무를 하게 된다. 그 외 시간에는 정해진 자기 처소에서 사생활을 하게 된다.
항아라고 하는 것은 무수리나 생각시 생활이 십여 년이 되면 신랑은 없지만 성례를 올려주고 그 자리로 올려놓는다. 무수리란 그 밑의 계급으로 각 전각에서 우물물 깃는 일 등 궂은 일을 하게 된다.

무수리란 몽고의 말이다. 고려조 때 원나라 공주들이 왕실에 시집을 많이 왔는데, 그때 원나라에서 따라온 하녀들을 무수리라고 부른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생각시는 장차 상궁이 될 여아들을 민가에서 데려와 훈련시키고 있는 것을 일컬음이다. 네 살짜리 나이 어린 여아들도 있었다.

이들은 일생 홀몸으로 지내지만, 어느 날 왕이나 세자 눈에 들어 침소에 같이 들기만 하면 이튿날부터 신분이 달라지는 행운의 기회는 언제나 가지고 있었다.
“이제 자주 보기가 어렵겠군요. 모쪼록 건강 잘 돌보시고 자애 자중해야 합니다.”
김용세도 눈에 물기가 도는 것을 보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렸다.
“세월이 흐르면 다시 만날 날이 있겠지요. 지금은 시절이 평탄치 않으니 몸조심하십시오.”

신홍아 상궁은 눈물을 더 보이지 않으려는 듯 뒤로 돌아서서 총총걸음으로 수문을 건너 궁의 북쪽 후원으로 사라졌다. 김용세는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신홍아의 얼굴과 죽은 아내 동의의 얼굴이 자꾸 겹쳐 떠올랐다.

신홍아가 의젓하고 어른답고 너그러운 여자라면 동의는 깜찍하고 귀여운 여자였다고 생각했다.
그날 퇴청하던 김용세는 어쩐지 그냥 집에 들어갈 수가 없을 것 같아 정심방 정기준의 집으로 찾아갔다.

“이리 오너라.”
그가 대문에서 조용히 불렀으나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대문은 열린 채로 있었다. 그는 문 안으로 들어서 안문 밖 사랑채 입구에서 다시 불렀다.

[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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