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형 계시오?”
그래도 기척이 없었다. 그는 열려있는 문틈으로 안채의 동향을 살폈다. 머리에 가채를 올린 젊은 아낙이 바삐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갸름한 얼굴에 깨끗한 명주치마 저고리가 한눈에도 정기준의 처임을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인가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다시 한번 기척을 했다.

“정 형 계시오?”
한참 있다가 정기준이 안채에서 나왔다.
“아니, 김 형 아니오? 어서 이리로 오르시오.”
그는 김용세를 반가워했으나 얼굴에는 착잡한 표정이 흐르고 있었다.
김용세는 사랑으로 들어가 정기준과 마주 앉았다.
“조금 앉아 계시다가 가친께서 나오시면 인사나 여쭙고 저녁을 같이하시지요?”
그의 집에 수없이 드나들었으나 그의 엄친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김용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버님이 오늘 관직을 그만두셨다오.”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아니, 무슨 일로 그리 결단을 내리셨습니까?”
“밀직사 첨사란 게 뭐 그리 대단한 자리도 아니긴 하지만…….”
그는 중추원을 옛 이름대로 밀직사라고 불렀다.
“밀직사 첨사직은 정3품 당상관으로 대단한 자리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산관을 택하셨는지요?”
산관散官이란 현직에서 물러나 있는 자리를 말한다.

“아버님께서는 원래 성정이 유하셔서 웬만한 일은 참고 견디시는 어른입니다만……. 반면에 너무 자상하고 세심하셔서 께름칙한 일은 곁에도 가시지 않는 분입니다. 원래 고려조에서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가신 뒤 왕조가 바뀌면 당연히 물러나야 함에도 그냥 녹봉을 먹고 있는 일을 그리 탐탁하게 생각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요즘 나라가 돌아가는 것을 보니 더 이상 입조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판단하신 것 같습니다. 그보다 내가 불효스럽지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정도전과 이방원의 싸움판에 휘말려들어 생명 부지가 어렵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아버님은 그런 분입니다. 자, 우리 그 이야기는 잊어버리고 저녁이나 하면서 반주 한잔합시다.”

김용세는 비교적 솔직한 정기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가 왜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백두 생활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잠시 자신의 위치를 생각해 보았다. 정5품이면 낮은 벼슬도 높은 벼슬도 아니다. 그런데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는 이 시점에서 과연 옳은 일을 하고 있는지 반성해 보았다.

그날 밤 늦게 집에 돌아온 김용세는 이 생각 저 생각 하느라고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기만 했다.
며칠 후 김용세가 어수선한 궁을 뒤로 한 채 착잡한 심경으로 퇴궁할 때였다. 그는 정문인 광화문으로 나가지 않고 서문인 영추문으로 잘 다녔다. 광화문으로는 당상관들이 많이 다니기 때문에 그들과 마주치면 자신을 마치 점쟁이로 여겨 온갖 개인적인 주문을 많이 하기 때문이었다.

정안군의 무인년 운세를 봐 달라는 숙제도 해결하느라고 혼이 났는데, 그쪾 사람들을 만나면 입장이 난처해질 것 같았다.
그가 영추문을 서둘러 나서서 혜정교 쪽으로 막 돌아섰을 때였다.
“나으리.”
누가 나직이 불렀다. 여자 목소리였다. 그가 소리 나는 쪽을 보았다. 궁장에 웬 여인이 딱 붙어서 있었다. 그는 첫눈에 그녀가 궁내에서 일하는 무수리라는 것을 알았다. 방석처럼 둥글게 틀어 올린 머리에, 우중충한 아청색의 섶이 긴 저고리와 치마를 입고 있었다.

허리에 폭넓은 띠를 두른 것까지 무수리 복장인데 다만 그 허리띠에 패(牌)는 차지 않았다.
“나를 부른 것이오?”
김용세는 의아해하며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이목구비가 반듯하고 귀엽게 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 따라오시겠어요? 신 상궁 마마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소녀 유가입니다. 앞장서 걸을 테니 멀리 떨어져서 따라오시지요.”
그녀는 그 말을 하고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유가란 현비 전각 소속의 무수리 유연분이라는 것을 신 상궁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김용세는 그녀를 따라 혜정교를 건너 정도전의 양마장(養馬場) 앞을 지나 취현방 쪽으로 갔다. 그녀는 취현방이 백보 이내에 건너다보이는 군기시를 지나 골목으로 들어가 반듯하게 생긴 대문을 열었다.

거기는 정릉의 곁이긴 하지만 지명은 취현방이 아닌 태평방이었다.
김용세는 사랑방에 안내되었으나 그곳은 남자가 거처하지 않는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조금 있다가 간단한 주안상을 든 비자(婢子)를 앞세우고 신 상궁이 들어왔다.
“이렇게 무례하게 모셔오게 한 소녀를 용서하십시오.”
그녀는 다소곳이 절을 하고 앉았다.

“궁살이를 할 때 각별히 저를 돌봐주신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어떻게 사시는지 몹시 궁금했습니다. 수소문해서 찾아오고 싶었습니다만 남녀가 유별한지라 그것도 마음대로 안 되고…….”
“저희들이야 뭐 여자 축에 듭니까? 평생 수절하는 죄인인데요.”
신홍아는 쓸쓸한 웃음을 흘렸다. 김용세는 오래 머물지 않고 그 집을 나왔다.
“이제 집을 알았으니 수시로 오겠습니다. 쫓아내지는 마십시오. 허허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잊지 마시고 자주 오십시오. 그리고…….”
그녀는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은 것 같았다.
“무슨 말씀이든지 하시지요.”
“오는 스무엿새 날이 나리께서 번을 서지 않는 날이라고 들었는데…….”
“아니, 그것은 어떻게 아셨소?”

“소녀가 어디 출신입니까? 그래서 그날 혜화문 밖 삼선계곡에 바람이나 쏘이러 가실 의향이 없으신지요. 지금 단풍이 곱게 물들어 아주 볼 만하다고 합니다.”

신홍아는 얼굴까지 약간 상기되면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기는 여자가 외간 남자에게 단풍놀이를 가자고 자청하는 일이니 보통 일은 아니었다.
“알겠소. 스무엿새 날 사시(巳時 오전 10시경) 경에 혜화문 밖에서 기다리겠소.”
신홍아와 헤어져 돌아오면서 그는 가슴에 무슨 보물이라도 품은 듯 흐뭇한 심정이었다. 그는 신홍아를 재취로 맞아들이는 생각을 잠깐 해보았다. 당장에도 몇 가지 문제가 부닥칠 것이다.

먼저 신홍아의 출신에 관한 문제이다. 비록 왕으로부터 품계와 성과 이름을 하사받긴 했지만 그녀가 여진족이기 때문이다. 홀어머니와 문중에서 가만있을 리가 없다.
그 다음, 더 큰 문제는 그녀가 상궁이라는 점이다. 비록 민간인으로 내쳐졌지만 상궁은 영원한 상궁이다. 왕과 왕비를 모시던 궁녀들이 내쳐졌을 경우 전 왕조에서는 사대부들이 첩실로 삼는 경우가 가끔 있었지만 그때마다 말썽이 있었다. 정승이나 상서 위치 정도에 있는 사람이니까 견딜 수 있었겠지만 김용세의 경우는 다르다.

김용세가 겨우 종5품직 서운관 승에 불과한데 정5품직 지밀 상궁을 처첩으로 삼는다는 것은 언어 도단이다. 신홍아는 왕이 총애하던 궁녀다. 왕이 그녀에게 하룻밤 승은을 내리지 않은 이유도 그녀가 현비의 본방 상궁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방 상궁이건 간에 왕의 마음에 들면 승은을 피할 길이 없지만, 왕은 신홍아를 수침들게 하는 것은 현비를 모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만약에 김용세가 신 상궁을 처첩으로 맞아들인다면 보통 시끄럽지가 않을 것이다. 양사(사헌부, 사간원)는 물론이요, 도당, 승정원, 내명부를 비롯해 봉상시와 유림에서도 펄쩍뛰며 상소장을 올릴 것이다.
 

[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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