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급 관리가 상급 여관을, 그것도 왕과 왕비를 모시던 상궁을 처첩으로 삼는 것은 강상(綱常)의 범죄에 버금가는 일이라고 규탄 받을 것이다.

김용세는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우울해졌다. 그뿐 아니라 화난 동의의 모습도 떠올랐다.
그러나 그는 그 스무엿새 날 혜화문 밖으로 나가 가슴을 두근거리며 신홍아를 기다렸다.

한참 만에 신홍아를 만난 김용세는 그녀를 못 알아볼 뻔하였다. 신 상궁은 평소 궁녀였기 때문에 특이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우선 머리는 다리[月子]를 넣어 땋은 뒤 비비틀어 뒤에 소라껍질처럼 말아 붙이고 가리마 위에 은첩지를 붙이고 있었다. 옷은 청홍으로 지은 섶이 긴 당의를 보통 입고 다녔다.

그러나 이 날은 여염집 여인같이 쪽진 머리에 섶이 짧고 반호장을 단 녹색 저고리에 주홍색 치마를 입고 있었다.
삼박한 차림이 복국 여인의 흰 피부와 잘 어울려 대단히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주었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도성 밖에 나오려고 변복을 하느라고…….”

그녀는 김용세를 보자 웃음을 담뿍 담고 말했다. 얼굴이 발그레 상기되기까지 했다.
“오늘 보니 정말 아름답습니다. 선녀인들 신 상궁 마마님만 하겠습니까?”
김용세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했다.
“제발 상궁 이야기는 좀 빼세요. 그냥 신가라고 부르시든지 정 뭣하면 홍아라고 불러 주세요.”

“종5품관인 당하관이 감히……. 어쨌든 저쪽 계곡으로 가서 좀 앉아 이야기하지요.”
두 사람은 징검다리를 건너 삼선평이 내다보이는 바위 그늘에 앉았다.
“날씨가 벌써 아침저녁으로 선들선들하지요? 마마와 세자 저하께서는 어떻게 지내시는지…….”
그는 갑자기 우울한 표정이 되었다.

“아무래도 세상 돌아가는 게 심상치 않습니다. 봉화백이 돌아오면 풍운이 일 것이란 풍문이 자자하구요.”
김용세는 홍아의 고운 어꺠 선과 엷은 명주 치마에 싸인 육감적인 몸매를 눈여겨보면서 말했다.

“봉화백이 너무 권력을 독점했기 때문에 이 나라가 이씨 왕조가 아니라 정씨 왕조라는 말까지 하면서 정안군 나으리 밑에 있는 어른들이 정안군을 부추긴다고 하더군요.”
“사실 그런 점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지요. 개국을 할 때는 모두가 목숨을 걸고 합심했는데, 이제 일을 이루고 나니까 사람들의 욕심이 발동돼 사직이 흔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개국 직후의 공신들은 왕륜동王輪洞 맹세를 잊었는가 봐요. 이 중요한 책임은 봉화백에게도 있는 것 아닙니까?”

김용세가 물이 곱게 든 단풍잎을 홍아의 손에 얹어주며 말했다. 왕륜동 맹세란 혁명을 성공시킨 후 배극렴, 정도전, 이방원, 조준 등이 모여 앞으로 서로 돕고 힘을 합쳐 뜻을 같이하자고 서약한 것을 말함이다.

“봉화백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러나 그 사람들은 봉화백이 정말 어떤 사람인가를 잘 몰라서 하는 이야기 같아요. 특히 그 어른의 할아버지에 관한 일도 아니고 외할머니가 서출이라는 것을 가지고 떠들고 다니는 것은 좀 비겁한 짓이 아닐까요?”
신홍아는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정도전의 외할머니가 서출이라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정도전의 외증조 할아버지 우진(禹振)은 자기 집 노비인 수이(樹伊)의 처와 관계하여 외할머니를 낳았다는 것인데, 이 출생설은 전왕조 때부터 정도전을 괴롭히는 악재였다.

“소녀가 배운 바가 없어 무엇을 알겠습니까만, 이 시대에 정도전만한 인물이 있습니까? 중전 마마가 그 어른을 존경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어느 날 중전마마가 세자 저하께 봉화백 나으리는 전 왕조 때 개혁적인 옳은 말을 했다가 귀양을 가기도 하고 교살형이 내려지기도 하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늙은 왕조는 백성을 이끌 기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혁명의 깃발을 올리고 새 나라를 세우는 일에 앞장섰던 것입니다. 그 어른은 부국 강병책과 경제제도의 혁신을 주장했으며 신분 제도의 차별성도 개혁하려고 애를 썼지요. 그 어른은 중전 마마께서 중히 여기는 불교의 폐단을 조목조목 대면서 척불승유를 주창했지요. 그 어른은 중전 마마께서 어느 날 평생에 가장 즐거운 일이 무엇이냐고 물으시니까 ‘첫눈이 내릴 때 말을 타고 평원을 달리며 사냥하는 일’ 이라고 말씀하시는 걸 들었어요. 얼마나 멋있는 이야기에요? 또한 그 어른이 어느날 등청하는데 수행자가 보니까 신발을 짝짝이로 신고 말을 타고 가고 있었데요. 그래서 신발이 짝짝이라고 하였더니 왼쪽에서 보는 사람은 내 오른발이 안보이고, 오른쪽에서 보는 사람은 내 왼발이 안보이니 걱정 말라고 했대요.”

“하하하, 참으로 재미있는 이야기이군요. 하지만 그 어른이 얼마나 책략가인가를 잘 말해주기도 한 얘기군요. 이제 우리 그런 이야긴 그만두고 우리 이야기나 좀 해요. 궁전 생활은 어땠어요?”

김용세가 슬그머니 신홍아의 손을 쥐면서 말했다. 그러나 신홍아는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뿌리쳤다.
“전하께서 중전 마마를 너무 못 있어하는 것 같아요. 정릉만 해도 그래요. 중전마마가 평소에 아끼시던 비취 부처를 함께 보내주는 것은 이해가 가는데, 전 왕조의 다른 보물까지 상당한 양을 다 보냈으니…….”

신홍아는 하늘을 쳐다보고 한숨을 쉬었다. 역시 그 석감에 들어간 보물은 비취 불상이었던 것이다. 김용세는 그런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해주는 신홍아에게 더욱 친밀감을 느꼈다.

“우리가 전생에서 만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저는 이제야 여자라는 느낌이 들어 행복하면서도 서글퍼집니다.”
그 말에 김용세도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신홍아가 정도전의 편이라면 자기는 정안군의 측근이라는 사실이 그를 더욱 서글프게 했다.

이튿날 아침 등청하던 김용세는 홍례문 안 영제교를 뛰어 건너오는 승정원의 낯익은 사알 한 사람을 만났다.
“웬일이냐?”
급히 서두르는 그를 보고 물었다. 그는 받들고 있는 홍패 주머니를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사헌부 대사헌 대감에게 가는 초패(超牌)입니다.”

초패란 왕이 신하를 지명해서 급히 부르는 것을 말한다. 이때는 붉은색의 명패(命牌) 뒤에 출구할 관원의 이름을 쓴 홍패를 들고 관원이 있는 집이나 관아에 가서 전달하는 것이다.
“무슨 일이냐?”
“저도 잘 몰라요. 겁간 사건이 났다나 봐요.”
그는 이렇게만 말하고 더 물을 겨를도 없이 달아났다.
“겁간 사건?”

김용세는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사건이면 대개 한성부의 형방에서 처리할 일이었고, 중하다고 해도 형조에서 처리할 일이었다. 그 일을 가지고 왕이 대사헌을 부를 일은 아니었다. 더구나 대사헌 이직(李稙)은 개국 일등공신이 아닌가? 그러한 한 나라의 대사헌이 도성의 부녀자 겁간 사건 때문에 왕명으로 초패된다는 것이 이해하기 힘들었다. 현비에 대한 왕의 애정이 여기에까지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 전 도성을 떠들썩하게 한 간통 사건이 있었다. 전교서감 왕미(王?)라는 자가 자기 집 여종을 여러 번 데리고 잤는데 이것이 뒤탈이 났다. 원래 상전이 지아비가 있든 없든 여종을 데리고 자는 것은 죄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지아비가 없는 여종을 데리고 잤는데도 문제가 된 것은 그의 처 때문이었다.

왕미의 처는 그 사실을 알고 질투에 눈이 어두워 그 여종을 고문 끝에 죽여 버렸다. 그리고 죽은 여종을 발가벗겨 길거리에 내다버렸다.
 

[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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