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서 빨리 자세한 것을 알아 전하와 저하께 보고 드리도록 하시오.”
이제는 그 말을 남기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누워 있는 왕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말했다. 옆에는 세자 방석과 세자빈 현빈 심씨가 앉아 있었다.
“전하, 지금 송현 고개 너머 수진방 정 대감의 집 근처에 큰 불이 나서 밖이 매우 소란합니다.”
“누구의 짓이냐?”

왕은 환자답지 않게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산 지사 이숙번이 저지른 일 같습니다.”
“이숙번? 그렇다면 그 배후는 분명 방원일 터이다. 고얀 놈들…….”
왕은 부르르 떨면서 일어나려고 했다. 곧 세자가 부축을 했다.
“지금 시각이 어떻게 되었느냐?”
“예. 이경이 조금 지난 줄로 아룁니다.”
도승지 이문화가 대답했다.

“봉화백을 빨리 찾아오라고 했는데 무엇들 하느냐?”
그러나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갑사들을 대동하고 봉화백 집에 가던 승전색이 방원의 군사들을 멀리서 보고는 겁이 나 도로 광화문 안으로 들어와 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 동안에 대궐의 각 문루에서는 군사들이 진군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계속 비상사태를 알리고 있었다.

그러나 박위 혼자 동분서주하고 다닐 뿐 군사를 집결시킬 중심 인물이 없고, 모두 자기 몸부터 추스리는 분위기였다. 이경이 한참 지나서야 친군위 도진무인 조온(趙溫)이 궁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그는 적극적으로 군졸을 모아 역모를 토벌할 자세를 취하지 않았다. 그는 왕의 잠저(潛邸) 시절부터 왕을 도와온 공신이었다.

이와는 반대로 방원의 진영은 열기가 하늘에 치솟았다. 그들이 정도전을 죽이고 남은 등을 쫓고 있을 때 건장한 남자 둘이 숨을 헐떡거리며 뛰어왔다.
서른 살 전후의 남자들인데 그들도 급해서인지 상투 바람에 중의 적삼만 입고 있었다. 그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처참하게 쓰러져 있는 정도전의 시체를 보자 엎어지며 통곡을 했다.

“아버지! 아버지! 이게 웬일입니까?”
보고 있던 이숙번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너희들은 웬놈들이냐?”
“우리는 봉화백의 아들 유와 영이다. 누가 우리 가친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원수를 갚고 말겠다.”

형제가 가슴에 품고 온 단검을 꺼내들고 이숙번의 말 앞으로 달려들자 소근과 무사들이 칼을 휘두르며 형제를 공격했다. 가슴과 팔에 칼을 맞은 형제는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싸웠다. 그중 하나가 말을 타고 있는 사람 가운데에서 방원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대군은 들으시오. 우리 아버지는 개국 공신이오, 이 나라 천추에 빛날 충신입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이런 천인공노할 일을 저지르시오. 대군은 왕륜동의 맹세를 저버리면 어떻게 되는 줄 으, 윽…….”

그는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갑사의 칼이 그의 목을 내리쳤기 때문이다. 그의 머리는 피를 뿜으며 무참히 땅바닥에 떨어졌다.
보고만 있던 방원이 왕륜동의 맹세라고 하는 말에 크게 화를 내었다.
“저 발칙한 놈들을…….”

방원의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소근의 철퇴가 남은 아들의 머리를 후려치자 그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벌렁 넘어져서 사지를 꿈틀거렸다.
이렇게 해서 정도전의 삼부자는 수진방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뿐 아니었다. 사태를 알게 된 또 하나의 아들인 정담은 집에서 목매 자살하고 말았다. 그는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 문하부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온건하고 사려가 깊은 젊은이로 평소에 아버지에게 정안군과 손잡고 그를 장차 왕이 되게 도와야 무사할 것이란 권유를 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아들 담의 말에 대해 정도전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평생에 한 번, 이미 고려 왕조를 배반하였다. 그런데 또다시 왕을 배반하고 저쪽에 가서 붙으란 말이냐? 남들이 무엇이라고 하겠느냐? 아니, 남들이 아니라 승하하신 신덕왕후께서 저 세상에서 통곡하리라. 나는 현비의 유지를 배신할 수 없다.”
여기서 정도전의 아들이 방원에게 말한 왕륜동의 맹약이란 조선조 초기에 개성 왕륜동에서 있었던 여러 맹약 중의 하나이다.

이성계가 개국을 하기 전에 배극렴 등이 흥국사에 모여서 새 왕조 건립을 맹약한 것이 <흥국사의 맹약> 이고, 그 후 새 왕조를 세운 후 공신들과 왕자들이 모여 서로 돕고 생사를 같이하자고 한 모임이 <왕륜동 맹약> 이다. 이 모임은 점차 확대되어 공신이나 왕자들의 아들들도 모여 추가 맹약을 하기까지 했다. 특히 그 맹약에는 서로 배신하면 안 된다는 구절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문하부 좌시중 배극렴 등은 하늘과 땅, 송악산과 성황당 모든 신에게 고한다. 삼가 생각컨데 우리 전하가 하늘의 뜻과 백성의 뜻에 순응하여 대권을 받았으며, 신 등은 마음과 힘을 합하여 큰일을 함께 이루었다. 이미 일을 같이하여 모두가 한 몸이 되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있겠는가? 그러나 시작을 잘하는 사람들은 많으나 끝을 잘 맺는 사람들은 적다고 하는 데 대하여 옛 사람들은 경계하고 있지 않는가? 일을 같이한 우리들이 모두 성의껏 왕을 섬기고 믿음으로 서로 사귀어야 할 것이다.

저만 잘되기 위해 서로 해치지 말며, 사리私利를 위해 서로 해치지 말며, 남들이 이간질하는 말을 듣고 딴생각하지 말며, 기색이 잘못되었다 하여 의심하지 말며, 뒤에서 미워하다가 앞에서 좋아하는 척하지 말며, 겉으로 친한 척하고 속으로는 거리를 두는 일을 하지 말며, 잘못한 일이 있으면 서로 고쳐 주고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서로 물어보며, 병이 나면 서로 돌보아주고 재난이 나면 서로 구원할 것이다. 우리 자손 대대로 이 맹세를 지켜나갈 것이며 만약 어기는 일이 있으면 귀신이 반드시 처형할 것이다.’

정도전의 아들들이 들고 나올 만한 맹세였다.
정도전을 쳐 죽이고 수진방을 요절낸 그들은 의흥삼군부 앞에 다시 집결했다. 이숙번의 갑사들이 의흥삼군부를 지키던 몇 명의 숙위병들을 이미 처단한 뒤라 그곳은 텅 비어 있었다.

그러나 방원은 그 안에 들어가지 않고 문 앞에 초소를 만든 뒤 번(番)을 두고, 자신의 왼쪽 옆 감순청 앞에 차일을 치고 임시 통제부를 설치했다. 그리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이숙번의 갑주로 무장한 병졸들을 남문 밖에서 기다리게 했다.
“경복궁의 동정을 살피러 간 척병斥兵이 왔느냐?”
방간이 그가 데려온 병졸을 보고 물었다.

“그곳은 성문을 굳게 닫고 각 문루마다 불을 밝히고 궁사弓士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정안군은 임시 통제부 안에서 회의를 열었다. 이숙번, 마천목, 익안군, 이거이와 이백강 부자, 민무질, 민무구 형제, 신극례, 서익, 조영무, 문빈, 심귀령 등이 모였다. 김용세는 거기까지 따라가기는 했으나 그 안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방원이 흥분해서 얼굴이 상기된 좌중 사람들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가 오늘 목숨을 걸고 봉기한 것은 절대 우리들의 사사로운 영달을 추구해서 한 일은 아님은 공들이 더 잘 알 것이오. 정도전, 남은 일당은 전하가 환우에 시달리고 현비 사후부터 과거사에 집착하여 정사에 소홀하심을 틈타 변괴를 꾀하려 하기 떄문에 우리가 오늘 같은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소.” 

[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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