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원의 말을 이거이가 받았다.
“정도전은 이제 저승 사람이 되어 제 죄값을 치르게 되었소. 그 자는 전하의 총애를 받아 높은 자리에 오르자 방자해졌소. 그 자가 방자하게 된 데에는 현비의 총애도 부채질을 한 셈이오. 그 자는 현비와 짜고 철부지 방석을 세자로 만든 뒤 전하의 기력이 약해지자 신의왕후 소생 다섯 대군을 무엄하게도 해치고 방석을 왕에 앉힌 뒤 이 나라 사직을 제 마음대로 주무르려 하였소. 죽어 마땅하오.”
이어 회안군 방간이 말했다.

“정도전은 처음에 조준 대감과 함께 이 나라 여러 제도를 개혁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특히 문란해진 전제 혁신을 단행했고 신분 제도를 개혁하여 인재를 널리 구하려 했소. 그러나 전제 개혁은 재산이 빈약한 자기 집안을 위해 토지를 가로채려는 일이었고, 신분의 혁신은 자기 자신이 종년인 외할미의 손자라는 일 때문에 저지를 일에 불과했소. 조준 대감과 갈라서게 된 것도 전제 개혁의 흑심이 들어 진정한 개혁을 하지 못했기 때문 아니겠소.”
“자, 그 이야기는 그만하고……. 지금부터 수습을 어떻게 해야 하겠소? 이 지사부터 말해 보시오.”
방원이 이숙번을 돌아보았다.

“우선 정도전 등을 처단한 일을 주상께 상계하여 사후 윤허를 받아야 합니다.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도당에서 계啓를 올림이 타당합니다. 그리고 대궐을 지키고 있는 호위扈衛 군을 해산시켜야 합니다.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지금 궐 안에 있는 도진무 조온과 박위를 불러내야 합니다. 지금이 삼경에 이르렀으니 날이 밝기 전에 일을 끝내야 합니다. 우선 여기를 지휘사로 삼고 안국방 어귀와 도당 입구를 잘 지켜야 하고 지방 병력이 들어오지 못하게 성곽 사대문을 잘 방비해야 합니다.”

“옳은 말이오. 그럼 지금부터 일을 시작합니다. 회안군은 도성 안의 동정을 잘 살피고, 박포 장군과 민무질 공은 도당의 양 정승을 비롯한 중신들을 불러내시오. 그리고 마 공은 대궐 앞에 나가 그곳 동정을 잘 살피시오.”

방원의 말이 끝나자 모두 각자의 일을 위해 나갔다. 마천목이 말을 타고 막 의흥삼군부 앞을 나서자 멀리 말을 탄 사람이 대여섯 명의 수하 사람들을 데리고 달리는 것을 보았다. 마천목이 뒤를 쫓아가며 군호를 대라고 소리질렀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 달아나기만 했다. 급하게 된 마천목이 ‘산성, 산성’ 하고 군호를 대보았으나 응답이 없었다. 마천목이 박차를 가해 달리며 그와의 거리를 좁혔다. 마천목은 그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거기 이천우李天祐 공 아니시오?”
그러나 그는 들은 척도 않고 수하들과 함께 계속 달렸다. 마천목이 달리는 마상에서 활을 쏘아 수하 한 사람을 쓰러뜨렸다.

“이 공이 멈추지 않으면 이 화살이 이 공에게로 날아갈지도 모르오. 자아…….”
마천목이 소리지르자 그는 말고삐를 당기고 멈추어섰다. 거기는 안국방 어귀였다. 그는 돌아서서 마천목을 보고 말했다.
“자네는 마사직 아닌가? 무엇 때문에 급한 사람을 부르느냐?”

큰 소리로 말했지만 그의 음성은 겁을 먹고 있었다.
이천우는 이성계가 동북면에 있을 때부터 그 수하에 와 있었으며 개국 공신이고 왜구를 쳐 무용을 떨친 사람이다. 
지금은 동지중추원사로 종2품의 고관이었다.
“무엇이 그리 급하오?”

“자네는 지금 도성 내 변괴를 몰라서 묻는가? 나는 집에 있다가 변괴가 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지금 전하를 호위하기 위해 대궐로 가는 길이다. 길을 막지 말게!”
“허허허. 그 일이라면 걱정하지 마오. 지금 정안군이 일을 처리하고 있소. 감순청 앞에 정안군과 여러 대군들이 모여 있으니 같이 가서 힘을 합칩시다.”
“그게 정말인가? 그러면 같이 가세.”

이천우는 마천목을 따라 도랑을 건너 감순청 앞 임시지휘부로 갔다. 그가 방원 앞에 이르자 방원이 말에서 내려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이 공, 어서 오오.”
“오늘 이런 일을 하면서 어찌 공은 나한테 사전에 한마디도 없었소?”
“급해서 그렇게 되었소. 앞으로 잘 도와주시오.”

김용세는 이때까지 어물어물하면서 대열에서 일탈할 기회만 보았다. 그는 피에 굶주린 이리 떼 같은 인간 사냥꾼 틈에서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우선 이곳을 빠져나가 신 상궁의 집에 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가 슬금슬금 태평방 쪽으로 가기 위해 혜정교를 건너고 있을 때 갑자기 말을 탄 사람들이 운종가(雲從街) 종각 쪽으로 가고 있었다. 방원 일행이었다.

그는 좌정승 조준과 우정승 김사형을 박포와 민무질이 데리고 온다는 전갈을 받고 마중을 나온 것이다. 말을 타고 오는 정승 일행과 방원은 종각 앞에서 만났다.
“이 밤중에 나오시게 하여 송구합니다. 허나 워낙 다급한 지경이라 무례함을 용서하십시오.”

방원이 말에서 내려 두 정승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두 정승도 말에서 내렸다.
“수고가 많소. 오면서 이야기는 대강 들었소.”
조준이 좌우를 살피면서 이야기했다.
“우선 저쪽으로 가시지요.”
일행은 다시 말을 타고 감순청 지휘부 쪽으로 가는 것을 보고 김용세는 군기시 뒷골목으로 들어갔다.

조준은 여기까지 나오기는 했으나 아직도 어리둥절한 상태였다. 그는 방원이 부른다는 전갈을 받고 한참 동안 망설였다. 그는 점쟁이 관식을 몰래 불러놓고 가야할지 말아야 할지를 점쳐보라고 했다. 한참 점괘를 보던 관식은 애매한 말을 했다.
“가도 구설, 안 가도 구설 진퇴양난입니다요.”
“허허, 이사람, 그런 점괘가 어디 있나?”

조준이 초조하여 점괘를 다시 보라고 독촉을 했다.
“목숨이 걸린 일이야. 잘 봐.”
그러고 있는 사이 이숙번이 다시 와서 정안군이 노하기 전에 빨리 와야 한다고 반협박을 하고 갔다.
“이판사판입니다요. 앉아서 당하나 서서 당하나 마찬가지지요.”
관식은 계속 애매한 말만 하다가 꽁무니를 빼버렸다.

그는 한참 망설이다가 이제는 더 버틸 수 없다고 생각하고 숭신방에 사는 우정승 김사형에게 전갈을 보내 그를 불렀다.
“대감 어떻게 해야겠소?”
“나도 송당松堂의 뜻에 따르겠소.”
송당은 조준의 호였다.
“전하께서는 무슨 하명이나 밀지가 없으셨는지요?”

“저렇게 밖에서 피묻은 칼을 들고 기다리고 있는데 무슨 전갈이 오겠습니까?”
“노비들을 시켜 저들을 물리칠 생각을 해보셨는지요?”
김사형이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쉿, 저 자들을 당할 무사가 어디 있겠소? 저들은 이미 봉화백을 요절내고 손에 피를 묻힌 자들이오.”

“음, 이 나라가 또 어디로 가는 것인지……. 좌우간 나가서 그들의 진의가 무엇인지 알아보고 태도를 정합시다.”
김사형이 결심한 듯이 일어섰다. 그의 흰 수염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분노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것밖에는 지금 선택의 방법이 없습니다.”
이렇게 하여 두 사람은 사지에 가는 기분으로 박포와 민무질을 따라 나섰다.
“이 밤중에 모신 것을 용서하십시오.” 

[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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