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쿠, 죽었구나!’
김용세는 겁이 덜컥 났다. 그러나 다음 순간 죽은 줄 알았던 종놈이 벌떡 일어나 바지를 움켜쥐고는 줄행랑을 쳤다. 급하게 도망가느라 누가 자기를 습격했는지조차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뜻밖에 구원을 받은 여인은 곧 옷 매무새를 고치고 김용세 앞에 앉았다.
“어느 어르신인지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김용세는 언뜻 보기에도 이 여인이 여염집 부인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만 하기 다행이오. 뉘 집 마님이신진 모르지만 이 야밤에 혼자 나오시다니…….”
“소녀는 의령군 나으리의 소첩이옵니다. 방금…….”
“예?”

그러면 이 여인이 저기 불타는 집에서 도망쳐 나온 남은의 첩실 일타란 말인가?
“빨리 도망쳐 목숨이나 건지시오. 내가 누군지는 알 필요가 없소.”
김용세는 그 말을 남기고 솔밭에서 나왔다. 그는 다시 살육이 계속되고 있는 골목으로 갔다.

“우리 집 마루 밑에 어떤 뚱뚱한 놈 하나가 상투바람으로 숨어 있습니다.”
웬 사나이가 뛰어나와 정안군 앞에 고했다.
“댁은 뉘시오?”

이숙번이 물었다.
“저는 여기 사는 민부(閔富)라는 사람입니다. 전에 판사를 지냈습니다.”
“대감 댁 마루 밑에 수상한 놈이 숨어 있단 말이지요?”
“예. 덩치가 크고 뚱뚱한 놈입니다.”

그 모양이 정도전임에 틀림없었다.
“들어가서 정가 놈은 끌어내라.”
이숙번이 소리치자 갑사 여러 명이 우르르 민부의 집으로 뛰어들어갔다.
“죽이지 말라.”

정안군이 소리쳤다.
소근과 다른 세 명의 갑사가 조금 뒤에 정도전을 개 끌듯이 끌고 나왔다. 벌써 초주검이 된 정도전은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손에는 단검을 꼭 쥐고 있었다.
정안군이 칼을 뺏으라고 명했다.

소근이 발로 정도전의 턱을 차고는 칼을 뺏으려 했다. 그때였다. 정도전이 벌떡 일어서더니 칼을 팽개치고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나를 죽이지 말라. 한마디만 하게 하라!”
어디서 그런 소리가 나왔는지 모두가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그때 어디서 나팔 소리와 북 치는 소리가 갑자기 요란하게 들렸다.
“저게 무슨 소리냐?”

정안군이 물었다.
“대궐의 숙위병들이 이곳의 불길을 보고 그러는 것 같습니다.”
이거이가 대답했다. 말에 탄 방원과 입에 피를 문 채 상투바람의 정도전이 마주 서서 불꽃 튀듯 서로 노려보았다.

5. 심야의 대학살

이 날 살고자 해도 살지 못하고, 살리고자 해도 살리지 못하니 하늘에는 붉은 기운이 뻗치고 땅에는 귀신의 곡소리만 가득하였도다. - <무인록> 

정도전은 핏발이 선 눈으로 장안군을 노려보며 한참동안 서 있었다.
“이제 와서 나에게 무슨 할 말이 있단 말이오.”
정안군 방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공은 왜 이런 일을 저지르시오. 일찍이 주상 전하와 함께 흥국사에서 맹세를 하고 나라를 일으킨 일을 잊었단 말이오?”
정도전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말했다.

“공이야말로 딱한 사람이오. 조선의 봉화백 자리에 있으면서 무엇이 부족해 작당을 해 나라를 그르치려고 하오? 사직을 공의 손아귀에 넣고도 부족해 통째로 삼키려고 하다니……. 죽은 현비의 그늘 아래서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이 나라 왕통을 위태롭게 만들고 있으니 그도 딱한 일이고 게다가 나라를 사욕 아래 두려하다니…….”
“그게 무슨 당치도 않은 역설이오.”

정도전이 목청을 높였다. 종 소근이가 흥분해 정도전의 목에 칼을 가져다 댔다. 정도전이 움찔하며 비켜섰다. 그러나 다른 무사들이 그의 팔을 잡고 방원의 말 앞에 꿇어 엎드리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방원은 그냥 두라고 말했다.

“공은 <경제문감>이란 책에서 모든 정사의 결정권, 병마권, 재정권 등 모든 실권을 한 사람이 쥐어야 한다고 주장했소. 그 한 사람이란 것이 왕이 아니라고 했소. 왕이 아니면 그 사람이 누구요? 바로 그대 봉화백 아니오? 그게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은 다 알 거요. 공은 판삼사사가 되어 이 나라의 모든 논밭 토지에 관한 권한을 다 쥐었고, 삼군부를 손아귀에 넣어 병마권을 쥐었고, 파당을 구축하여 모든 정사의 결정권을 쥐었소. 그 다음은 뭐요? 왕손들을 없애고 그대가 주장하는 방벌(放伐)을 이루자는 속셈 아니오? 죽어 마땅한 죄요!”

<경제문감>이란 정도전이 쓴 저서 중의 하나로 <경제문감 별집>과 함꼐 정치의 도를 논한 책이다. 그는 이 책을 비롯해 정치, 역사, 병법, 음악에 이르기까지 십여 권의 저서가 있었다. 

“그것은 대군이 크게 오해한 것이오. 나는 순리적으로 주상 전하가 선택하신 왕통을 지키려 한 것뿐이오. 내가 방벌을 논한 것은 주상 전하의 개국을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입니다. 따라서 군도君道는 그런 사람을 선택할 절대적인 권한을 가졌기 때문에 아무도 범접할 수 없다고 논한 것은 왜 잊으십니까?”
“방자하다!”

그때 이숙번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것을 제지하고 방원이 다시 말했다.
“그러면 공은 <경국전>(經國典)에서 부민자국지본야(夫民者國之本也)라고 하며 군주보다는 국가가 위에, 국가보다는 민이 위에 있다고 주장하여 왕권을 땅에 떨어뜨린 것은 목적이 어디 있는지 천하가 다 아는 일 아니오?”
“그것은 맹자의 사상을 인용했을 뿐이오. 우리 개국의 뜻을 알리고자 한 것인데 어찌 그렇게 곡해를 하시오?”
“저 자가 아직 주둥이가 살았군.”

이번에는 마천목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대군은 임신년에도 나를 살려준 일이 있소. 이번에도 살려주리라 믿소. 나는 방벌을 꿈꾼 일이 없소이다. 그것은 전 왕조를 밀어내야 한다는 뜻일 뿐이오.”
방벌이란 인심을 잃은 왕조를 쫓아내고 새 왕권을 세워야 한다는 중국의 역성혁명의 방법을 말함이다.

“그대는 전하가 가짜 왕조 신돈의 핏줄 우와 창을 쫓아내고 새 왕조를 일으킨 것을 핑계 삼아 왕손들을 다 없애고 역성혁명, 아니 방벌의 수단으로 혁명을 일으키려고 한 죄인임이 다 탄로났소. 그러니 죽음으로 그 죄를 씻어야 하오.”

“대군이 지금 하는 일은 대역에 해당하는 일이오. 전하의 윤허를 얻어서 지금 군사를 일으킨 것이오? 사사로이 군사를 일으켜 나라의 중신들을 해치는 것은 반역이 아니오?”
정도전이 피를 뿜어내며 소리를 질렀다.
“반역은 그대가 먼저 저지른 것이오!”
방원도 눈을 부라렸다.

“꼭 이렇게 해야 할 일이 있으면 전하에게 상계(上啓)하여 조정의 공론을 거쳐 일을 처리해야 합니다. 전하께서 내가 죽어야 한다면 달게 따르겠소. 그러나 야밤에 몰래 사병을 일으켜 중신을 마구 가두고 죽이는 것은 천추에 용납 안 될 역모요.”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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