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님은 지금 기절해 있다! 그리고...’
지성천은 이런 생각이 불현 듯 났다. 지성천을 손을 살그머니 내밀어 해월을 한 팔로 안았다.  그리고는 무섭게 꼭 껴안아 보았다. 지성천은 숨결이 가빠졌다. 눈에는 불이 일었다. 해월을 땅바닥에 반듯이 눕혔다. 그리고 허리로 손을 가져갔다. 
바로 그때였다. 
지성천은 등골이 서늘함을 느끼고 육감적으로 뒤를 돌아보다가 하마터면 고함을 지를 뻔했다. 

그의 뒤에는 거대한 검은 옷 괴인이 팔을 벌리고 서있는 것이다. 눈은 사람을 잡아 삼킬 듯이 분노에 차 있었다. 지성천은 부들부들 떨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지성천은 이런 경우 떨기만하는 졸장은 아니었다. 곧 뒤에 있는 녹슨 장창을 손에 쥐고는 용기를 내어 소리를 질렀다.
“귀신이냐!  아니면 사람새끼냐! 정체를 밝혀라!”
그러나 괴물은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서로 말없이 노려보았다. 

지성천은 죽느냐 사느냐하는 생사의 기로라는 것을 알고 창을 번쩍 들어 기합 소리와 함께 괴물의 배를 내리 찔렀다.  흑장 괴인은 재빨리 칼을 꺼내 들고 창을 막았다. 힘이 엄청나  지성천은 창을 아귀에서 놓칠 뻔 했다. 둘이 몇 합을 겨루자 쇠붙이 부딪는 소리에 해월이 깨어나 몸을 뒤틀면서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곤 괴물을 노려보다가 소리를 질렀다.
“악! 너는 옥채유! 귀신이다!”
해월은 일어서려다 비틀대며 다시 기절을 하고 말았다.  
옥 채유란 해월이 본 남편이었다. 

그는 황해도 출신이라고 했고 고향에서 관아의 통인(通引)벼슬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부모는 어릴 때에 죽었지만 본래 머리가 좋고 붙임성이 있어 주위의 귀여움을 받았다. 고을에 부임했던 비장(裨將)이 그를 예쁘게 봐서 항상 곁에 두었다가 포도청의 종사관으로 영전하면서 그를 비서격인 기실(記室)로 데리고 갔다. 그는 포도청에서 우연한 일로 해월을 알게 되어 서로가 다 부모 친척 없는 불쌍한 처지란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모르는 사이에 서로 사랑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결혼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들은 처음엔 재미있게 살았다. 옥채유는 아름다운 아내를 가졌다는 것을 늘 행복으로 생각하고 살았었다. 그러나 어느 날 옥채유는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그는 자기가 해주지도 않았던 해월의 가락지를 발견했다.
“이거 어디서 나왔소?”
옥채유가 묻자 해월은 약간 당황한 듯 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저어...저의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저에게 주신 거예요.” 
해월이 상긋 웃었다. 

그러나 수상한 일은 그 뿐이 아니었다. 
옥채유가 저녁에 퇴청해서 돌아오면 해월이 없는 때가 많았다. 그럴 때면 어디 갔었냐고 옥채유가 캐물었다. 해월은 어느 동무 집에 가서 늦었다는 등 여러 가지 이유를 대곤 했다.  옥채유는 그것을 다 그대로 믿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부인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어느 날 포도대장 석영서가 급히 그를 찾았다.  

옥채유가 석영서 대장에게 갔을 때 석영서는 오늘 저녁에 우리 집으로 좀 오라고 말했다.  옥채유는 이상한 일도 다 있다고 생각하며 그날 저녁 석영서 포도대장의 집으로 갔다. 대문을 들어 설려니 입초를 섰던 안면이 있는 나졸이 깜짝 놀라며 그를 바라보다가 은밀하게 말했다.
“이거 채유아냐? 일루 좀 오게”

나졸은 담 밖으로 나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자넨 번연히 알면서 뭣 하러 오느냐 말이다.” 
정말 자다가 홍두깨 격이다. 
“뭣을 안단 말인가?”

“아니, 아직 그것도 몰랐어? 이런 먹통 같으니, 자네 부인이 이집 사랑방에 나으리와 함께 있는 것도 몰라... 쉿.”
“뭐야? 아니, 그게 정말인가?”
“쉿!” 
 

[작가소개] 권경희는 한국 여류 추리작가이다. 1990년 장편소설 '저린 손끝'으로 제1회 김내성 추리문학상을 수상하고 문단에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 장편 추리소설 '거울 없는 방', '물비늘', 실화소설 '트라이 앵글', 단편으로 '검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등 수십 편이 있다. 수필집 '요설록', '흔들리는 삶을 위한 힌트'등이 있다. 중견 소설가이면서 상담심리 전문가로 <착한벗 심리상담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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