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광해군 말엽의 일이다.
포도대장 석영서(石榮瑞)의 소실 주씨 부인 해월의 집은 장안에서 좀 떨어진 호젓한 곳에 있었다. 집은 크고 넓었으나 쓸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서쪽을 향한 세칸짜리 안채와 남쪽에는 사랑채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오갈 데 없다는 포도청의 젊은 나졸이 거처하고 있었고, 주씨 부인 해월은 몸종 둘을 거느리고 살았다.  

포도대장 석영서는 한 달에 두어 번 찾아오는 정도였다. 보름달이 오히려 처량한 어두운 어느 날 밤이었다.

석영서 포도대장이 오기로 했기 때문에 해월은 일찍 잠이 들지 않았다. 몸종 달래와 소서는 어딜 갔는지 아침부터 보이질 않았다. 해월은 아무리 찾아도 없기에 혼자 저녁을 지으면서 오기만 하면 그저 이것들을 혼을 내야겠다고 속으로 몇 번이나 중얼거렸으나 저녁을 먹고 나서도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해월은 거울을 벽에 기대 놓고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전 보다는 줄음이 늘어나고 피부도 확실히 늙어보였다. 해월은 이맛살을 찡그려 본다. 흉하다. 상긋이 웃어본다. 잔잔하고 하얀 이가 제법 예뻤다.  

해월은 머리를 빗고 화장을 했다. 그러면서도 귀는 곧장 대문을 향해 있었다. 화장을 마칠 무렵 확실히 대문 여닫는 소리가 들렸다.  

해월은 재빨리 켜 두었던 초롱을 들고 나갔다. 그러나 아무도 들어온 기척은 없었다.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해월은 바람소리였나 보다고 생각하며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곤 이불을 펼 양으로 벽장문을 드르륵 열었다. 
“악!” 
그 순간 해월은 기겁을 하며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해월은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정신 없이 뒤로 물러섰다. 

벽장 안에는 몸종 달래가 벌거벗은 채 가슴에 칼을 꽂고 나 둥그러져 있었다. 입에는 옷자락을 찢어서 묶인 채로 눈을 멀겋게 뜨고 처참한 모습이었다. 가슴에 꽂힌 칼에서는 피가 흥근하게 고여 내렸다. 해월은 고함을 지른다고 두서없이 소리를 쳤으나 그건 모기 소리보다 적은 것이었다. 

해월은 넋이 빠진 채 마루로 뛰어 나왔다. 그러나 거기서는 더 무서운 장면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루 끝에는 확실히 귀신이라고 생각되는 괴물이 서 있었다. 달빛에 비쳐서 반득반득 빛나는 새카만 검은 옷에 키가 엄청나게 커 사람이라기보다는 괴물에 가까운 도깨비였다.  손에는 역시 까맣게 번쩍이는 장도를 쥐고 있었고, 얼굴은 우중충해 잘 보이질 않았다. 그 흑장 괴물은 오랫동안 해월을 쏘아보고 있었다.  

해월은 어떻게 어디로 뛰었는지 모르게 마당으로 뛰어 내려섰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달려간다고 간 것이 나졸이 자고 있는 사랑방이었다. 

해월은 방문을 열고 들어서며 푹 꼬꾸라져 정신을 잃고 말았다. 나졸 지성천은 황급히 일어나 불을 켰다. 그리고는 꼬꾸라진 해월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니, 이게 웬일입니까. 마님!” 

지성천은 부인을 손으로 잡아 일으켰다. 해월의 입에는 기절한 대로 컥컥 거품을 내뿜었다.  지성천은 황급히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안 채 대청마루에 시커먼 그림자가 번득였다. 지성천은 곧 사태를 짐작하고는 해월을 들쳐 업었다. 그리고 옆 방문을 열고 들어가서는 벽장을 통해 지하로 내려갔다. 이곳은 어떤 일이 생겨도 들키지 않는 비밀 통로였다. 

이 집은 임진란 때에 이곳에 살던 유지영 진사가 지은 것으로 광대한 지하 구조물이 들어서 있는데 그 구조는 아직도 다 아는 사람이 없었다. 임진란 때 유씨 가문의 선비들이 이 지하실에서 난을 피했다고들 한다. 이 지하도는 통로가 사방으로 연결되어 있다는데 지금 알려진 지하도 입구는 지성천 방의 벽장 하나뿐이었다. 이곳은 당시에는 무기고로도 쓰였는지 녹슨 환도며 창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지성천은 벽장문을 안으로 잠그고는 해월을 땅바닥에 눕혔다. 그리고 부싯돌을 찾아내어 불을 붙이고 나무 부스러기를 긁어모아 불을 일으켰다.  

해월은 옷이 흐트러진 채로 눈을 감고 숨을 가늘게 내 쉬고 있었다. 연하게 한 분화장한 얼굴이 불빛을 받아 발그레하다. 날씬한 허리에는 빨간 허리끈이 야무지게 매여져 있고 볼록한 유방이 숨소리에 따라 움직였다. 성천은 얼굴을 해월에게서 돌렸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서는 음흉한 생각이 났다. 

[작가소개] 권경희는 한국 여류 추리작가이다. 1990년 장편소설 '저린 손끝'으로 제1회 김내성 추리문학상을 수상하고 문단에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 장편 추리소설 '거울 없는 방', '물비늘', 실화소설 '트라이 앵글', 단편으로 '검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등 수십 편이 있다. 수필집 '요설록', '흔들리는 삶을 위한 힌트'등이 있다. 중견 소설가이면서 상담심리 전문가로 <착한벗 심리상담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