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외는 잘했어?”
현덕이 물었다. 희수는 양복 윗주머니에 참하게 꽂혀 있는 손수건을 쏙 뽑아 얼굴의 땀을 닦았다.

“땀이나 식히고 얘기합시다.”
“오늘이 뭐가 덥다고 그래?”
현덕이 한심하다는 투로 말했다.
“쳇, 형은 모르우. 집 안에 턱 틀어박혀서 명상이나 퍽퍽 하고 있으면 뭐 더울 것도 없지요.”

희수의 말은 지아에게 암시하는 바가 있었다. 잠깐의 환상이 그녀의 망막 위에 번쩍였다.
“나처럼 피부가 연약한 사람은 이런 날씨도 못 견딘다고요.”
희수는 과장스레 떠들어댔다.
“그래, 알았다, 알았어.”

현덕이 포기했다는 몸짓을 하며 다시 물었다.
“사람들은 다 구했냐고?”
“어이구, 형님도 걱정이 팔자요. 다 구했으니까 들어왔지. 못 구하고서 들어올까.”
희수는 지아를 엉덩이로 툭 밀더니 옆자리에 앉았다.
“그나저나 이제는 고물가시대(高物價時代)라는 게 실감이 나우.”
“그건 또 왜?”

현덕이 시큰둥하게 물었다. 무슨 대답이 나올지는 그 스스로 잘 알고 있었지만 희수의 떠들고 싶어하는 기분을 맞춰 주기위해 내놓은 말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뻔한 얘기잖우? 조수를 더 구하는 것이 낫지. 이제 사람 사서는 더 이상 일을 못해먹겠더라고요.”
“이 계통의 일들도 전문화, 조직화시켜 나갈 필요가 있긴 하지.”
현덕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전문화, 조직화라니오?”
지아가 솔깃해서 물었다.
“말 그대로지. 동네 꼬마들 모아놓고 사기치듯이 하는 것으로는 안 된단 말야.”
“그럼요?”
지아가 부쩍 흥미를 나타냈다.

“마술을 보러 오는 사람들은 마술사가 자신을 멋지게 속여 주기를 바라지. 만약 마술사가 어설퍼서 자신을 멋있게 속여넘기지 못한다면 본전을 생각하게 되고 마는 거야. 우리는 속일 의무가 있는 사람들이지. 허가받은 사기꾼이라고나 할까?”
“그런데요?”
희수가 심드렁하게 말을 받았다.

“남들이 다 알고 있는 것으로 속이는 것은 이제 그만해야 할 단계에 이르렀다고 생각해.”
“형 말은 어려워서 통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희수가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더니 종래 자신의 숙소로 쑥 들어가 버렸다. 그러나 현덕은 말을 그치지 않았다.

“마술사란 고대에 있어서는 왕권을 좌지우지하는 중요한 직책이었지. 그러나 오늘은 이게 무얼까? 사기를 쳐서 목에  풀칠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의 말은 어느 새 독백의 단계로 넘어가 있었다.

“나는 그렇게 본다. 고대의 마술사들이라 해도 사람을 속인 것은 사실이야. 그들에게 어쩌면 약간의 초능력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지아는 현덕의 '초능력' 이라는 소리에 움찔 몸을 움츠렸다.
그의 말에는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실려 있었다.

갑작스레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비가 한차례 올 모양이었다. 비가 오면 관객이 줄어들 텐데. 지아의 관심은 어느 새 날씨로 넘어갔다. 때문에 현덕의 말을 잠깐 놓치고 말았다.
“......필요한 것은 조직, 새로움에 대한 도전이야. 그것이 없으면 우리는 정말 사기꾼이야."
현덕은 듣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고 말이 끝났다고 여겨지자 벌떡 일어서서 방으로 들어갔다.

다시 지아는 혼자가 되었다. 지아의 가슴이 갑작스레 답답해졌다. 아직 비는 내리지 않고 있었다. 모든 것을 토해 버릴 수 있으면 좋을 것을, 비도 내 답답함도.....
지아는 웅얼거리며 거실의 유리문으로 다가섰다. 정원으로 바람이 움직이고 있었다. 넓은 정원의 수풀을 헤치며 죽음이 걸어가는 것이 그녀에게 느껴졌다. 아직은 그림자일 뿐, 실체가 어느 곳에서 손을 내밀지 그녀는 알지 못했고 그 대상이 누구인지도 떠오르지를 않았다.

갑작스레 예민해진 그녀의 감각기관을 통해 집 안의 온갖 움직임이 전달되어졌다. 현덕의 고른 숨소리, 희수가 음란한 잡지를 들춰 가며 군침을 삼키는 소리, 남녀가 얽혀서 절정을 맞고 있는 느낌까지도 모두 전달되었다. 그녀는 흠칫 몸을 떨었다.
비가 마침내 쏟아졌다. 그 속에서 불안한 그림자가 무너지고 있었다. 지아는 미친 듯이 뛰어나가 빗속으로 몸을 던졌다. 몸에 묻어 있는 끈끈한 느낌들을 모두 떼버려야만 했다.

[작가소개] 권경희는 한국 여류 추리작가이다. 1990년 장편소설 '저린 손끝'으로 제1회 김내성 추리문학상을 수상하고 문단에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 장편 추리소설 '거울 없는 방', '물비늘', 실화소설 '트라이 앵글', 단편으로 '검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등 수십 편이 있다. 수필집 '요설록', '흔들리는 삶을 위한 힌트'등이 있다. 중견 소설가이면서 상담심리 전문가로 <착한벗 심리상담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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