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준이 말을 마쳤다.
“오, 그래요?”
지아는 싱크대 쪽으로 걸어갔다. 형준은 불안한 눈길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저 여자는 아란과는 틀려. 형준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뒷모습마저도.
“누가 그릇을 닦았어요?”

지아의 말이 형준의 정신을 퍼뜩 돌아오게 하였다.
“그거야...... 언제나 그렇듯이 아란 씨가 했지요.”

형준의 어눌한 말투는 사람의 비위를 긁는 묘한 뉘앙스가 있었다.
“아란이가 설거지만 한 건 아닌 것 같은데요?”
지아는 답답한 형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식당을 나갔다. 자기 등 뒤로 형준의 시선이 따갑게 쏟아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형준을 이 집안에 소개시킨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기에 그녀는 형준에게 좀 심한 말을 해도 괜찮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지아는 처음 형준을 보았을 때 그가 예사롭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그에게 드리워져 있는 것은 죽음의 그림자였다.

그날은 지아가 난승도사 밑에 들어간 지 꼭 1년이 되는 날이었다. 으레 세상 인심이 그렇듯이 1년을 축하한다며 사람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술을 마시러 나갔었다. 그 후로 지금까지 다시는 그런 날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지아 자신에게도 그날은 자신이 마술을 배우기 시작한 날로써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박형준이라는 묘한 사내를 만난 날로 기억되고 있었다.

그날은 봄비가 처량하게 부슬거리며 내리고 있었다. 일행은 이미 한 잔씩을 마신 후였고 누군가가 "기분이다! 나이트 가자!”라고 소리를 친 것에 동의하여 이태원으로 발길을 돌린 참이었다. 우산을 준비한 사람이 없어서 이태원 거리를  기웃거리는 동안 다들 적당히 머리며 옷이 젖어들었다.

“빨리 아무데나 들어가요.”
지아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녀로서는 이태원이 처음이었고 그곳의 스물거리는 이상한 기운을 감당하기에는 감성이 너무나 어렸다.
“그러자구. 흠뻑 젖겠어. 이러다간!”

현덕이 쾌활하게 말했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난승도사의 수제자였다. 그러나 지아는 그의 쾌활함조차 이해되지 않았다.
그는 이 거대한 동굴 같은 거리에서 스물대는 구역질나는 기운을 못 느끼는 걸까? 이 사람들은 모두 어쩌면 그렇게 태연할 수 있을까 싶었다.
“어머! 저 남자!”

지아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한 사내가 건들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저 술취한 사내 정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심하게 취한 것 같지도 않았다.
“건달 녀석인 모양인데?”
현덕은 혼자말로 지껄일 뿐 그 사내를 전혀 안중에 두고 있지 않았다.
“저 남자를 그냥 보내면 안 돼요!”

지아가 빽 소리를 쳤다. 주위의 사람들이 모두 쳐다볼 정도였다. 그러나 그 사내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 점이 일행에게 이상하게 비춰졌다.
그들은 모두 2, 3년씩 마술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일반적인 행동유형이 보이지 않는 것은 숨겨진 비밀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디 아픈 모양이지?”

지아와 비슷한 때에 들어온 김희수가 앞으로 뛰어나가 그 사내를 툭 쳤다. 그러자 사내는 짚단 허물어지듯이 픽 쓰러지는 것이었다. 사내는 옆구리에서 샘솟듯이 쏟아지는 피를 손으로틀어막고 있었다. 1988년 4월의 일이었다.
지아는 그 이후로도 그에게 큰 관심을 갖지는 않았다. 그날 난승도사에게 제자로 받아들여 달라고 청을 하긴 했지만 그것 역시 자신의 능력에 대한 증거를 소홀히 하기 싫다는 지극히 여성적인 감정에 의했던 것이었다.

그가 왜 칼을 맞았는지, 그의 전직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그에게 물어본 적이 없었다. 다만 그녀의 감정이 허락하는 날 때때로 그의 과거를 짚어보기는 했다. 오늘 같은 날도 그런 날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지아는 다시 기분이 우울해지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너무 빠르고, 모든 것이 너무 얽혀 있었다.
 

[작가소개] 권경희는 한국 여류 추리작가이다. 1990년 장편소설 '저린 손끝'으로 제1회 김내성 추리문학상을 수상하고 문단에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 장편 추리소설 '거울 없는 방', '물비늘', 실화소설 '트라이 앵글', 단편으로 '검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등 수십 편이 있다. 수필집 '요설록', '흔들리는 삶을 위한 힌트'등이 있다. 중견 소설가이면서 상담심리 전문가로 <착한벗 심리상담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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