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민망해하는 사람들 속에 의연한 자세로 앉아 있던 왜소한   사내가 일어섰다.
“너희들 중 나의 자세를 놓고 실망한다든가 싫어한다든가 하는   행동을 하는 이가 많다는 건 나 자신이 잘 알고 있다.”
사내의 목소리는 체구답지 않게 우렁차게 울렸다. 

“그러나 너희들은 이 점을 알아야 한다. 만물을 주관하는 신이 있듯이 너희들을 주재하는 힘이 있다. 그것이 바로 나다. 나없이 너희들이 무엇을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하여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다면 그렇게 하지 말아라."
모여앉은 사람들은 모두 네 명, 남자 셋에 여자 하나다. 모두 젊어 보이는 그들은 일어서 있는 중년 사내와 같은 도포를 입고   있었다.
“나는 오늘 벗어남에 대한 현대적인 공부를 해보겠다.
너희들도 각자 노력하기 바란다.”

“탈출이란 후디니를 가리키는 겁니까?”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한 사내가 물었다. 중년 사내의 눈이 번쩍이며 그에게로 떨어졌다.
“그렇고 그렇지 않은 것에 심한 구별을 짓지 마라.   분별이야말로 우리를 병들게 하는 것이니.”
중년 사내는 말을 다 했다는 듯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각자 반성의 시간을 가져라.”

중년 사내가 사라졌다. 대번에 불평들이 쏟아져 나왔다.
“뭐야? 이젠 사이비 교주가 다 되었군 그래.”
“무게만 꽉 잡으면 단가?”
“반성은 무슨 얼어죽을 놈의 반성!”
“자, 각자 일들이나 하자구.”
모였던 남녀들도 흩어졌다. 금세 있었던 일들은 시간을 쫓아 과거로, 망각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곧 사건이 일어나 앞서 생겨났던 모든 일들이 역류하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처절한 비명이 온 집 안을 메우고 그 틈새로 피비린내가 흘렀다. 놀란 남녀가 한달음에 비명의 장소로 뛰어갔을 때 오만했던 한 생명은 이미 단순한 고깃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사람이라고는 들어갈 수 없는 그곳에 그는 결박되고 칼에 맞아 죽어 있었다. 놀라운 일들을 손쉽게 해치우던 그들이었지만 이일은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믿을 수도 없었다. 곧 시체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일어설 것 같았다.
“문을 부수고 들어가야 해!”
“아니야, 그러면 안 돼. 이미 돌아가신 게 확실하니까 현장을 보존해야 해. 경찰에 신고를 하라고!”

사람들은 우왕좌왕했다. 결국 다이얼이 돌려졌고 수화기 너머에서 소리가 들렸다. 아무도 근접할 수 없는 밀실에서 그는 초능력에 의해 죽었단 말인가?
“시경 강력계의 추 경감입니다."
       
2. 죽음의 그림자

“저는 요즘 불안한 생각이 자주 들어요.”
이지아가 예의 신비로운 목소리로 말하며 쓰다듬어 넘기는 긴 머리카락이 창문 너머에서 떨어지는 햇살에 탐스럽게 출렁거렸다.
“지아의 능력은 예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들은 것 같은데?”
말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기는 사내는 키가 작고 어쩐지 몸의 균형이 맞지 않아 불안정스레 보이는 40대였다.

“스승님께 이미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예지와 후지는 일란성 쌍생아예요.”
지아의 말투는 오후 4시다운 나른함을 띠고 있었다.
“그럼 무엇이 불안하다는 거지?”
스승님이라 불리우는 사내는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고 책상다리로 앉아 있었다. 지아는 묵묵부답으로 창가로 몸을 돌렸다. 햇살이 쏟아지면서 얇은 옷 사이로 육감적인 몸매의 실루엣이 드러났다.

“너와 관계되는 일인가, 아니면 나와......”
사내는 지아의 몸매에 무관심해지려는 듯 스르르 눈을 감았다.
“스승님과 관계되는 것이에요. 그것은 상당히 큰 힘으로 나를 압박하고 있어요. 스승님 자신은 느껴지는 것이 없나요?”

지아가 구름 사이로 언뜻 비치는 태양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없어. 나는 아직 수양이 부족해서....”
사내는 가부좌로 자세를 바꿨다.
“스승님은 하실 수 있어요.”
지아는 다시 몸을 돌렸다. 둘은 사선으로 대하고 있었다.
“후”

[작가소개] 권경희는 한국 여류 추리작가이다. 1990년 장편소설 '저린 손끝'으로 제1회 김내성 추리문학상을 수상하고 문단에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 장편 추리소설 '거울 없는 방', '물비늘', 실화소설 '트라이 앵글', 단편으로 '검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등 수십 편이 있다. 수필집 '요설록', '흔들리는 삶을 위한 힌트'등이 있다. 중견 소설가이면서 상담심리 전문가로 <착한벗 심리상담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