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가는 더 크게 숨을 내놓았다. 그 동작을 반복하는 것을 지아는 지그시 바라보았다. 만족스런 눈빛이 잠깐 그녀의 얼굴에 떠올랐다. 숨소리만이 방 안에 가득찬 채 30분이나 시간이 흘렀다. 사내가 가부좌를 풀고 일어섰다.
“어떻습니까? 단전에서 뜨거운 것이 느껴집니까?”
“지아가 물었다.

“아니야. 아직......”
사내가 맥없이 말했다. 숨쉬기가 힘들었던지 땀방울이 얼굴에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그날이 오리라는 것은 믿어 의심치 않지만......”
사내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생각 자체가 자신의 능력에 대한 부정입니다. 위대한 것은 인간, 인간보다 위대한 것은 없습니다. 스승님은 더구나 은혜를 입고 태어난 몸입니다. 이 점을 잊으셔서는 안 됩니다.
지금이 바로 고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난관을 극복하면 능력은 순식간에 자라나지요.”
지아의 말투는 여전히 싸늘하였다.

“목욕이나 하여야겠어.”
사내는 걸치고 있던 헐렁한 가운을 훌렁 벗어 던졌다.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은 빈약한 몸매가 드러났다. 그러나 여인은 그러한 일에 익숙한 모양으로 전혀 거리끼거나 놀라는 기색이 없이 방에 딸려 있는 욕실문을 열었다. 욕실 안에는 이제 적당히 식은 따뜻한 물이 김을 모락모락 올리고 있었다.
“가서 아란을 올려보내.”

사내는 뚜벅뚜벅 욕탕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예”
지아는 공손하게 대꾸하고 방을 나섰다.
밖은 신록이었다. 넓은 정원이 베란다를 앞에 두고도 충분히 펼쳐져 있었다. 그들이 있었던 방은 2층이었다. 좌우 양쪽으로 계단이 원형으로 나 있었으며 방 정면으로는 베란다가 나 있는 구조였다.

지아는 잠시 연한 초록잎들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마치 그들로부터 싱그러운 생명을 빨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흡수할 만큼 흡수했는지 지아는 몸을 거칠게 돌려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수업이 끝났나?”
남자 하나가 지아가 내려오는 것을 보고 물었다. 말투에 묘하게 빈정대는 기미가 있었다.

“그래요 최현덕 씨.”
지아가 사무적인 말투로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대답했다.
“흥!”
현덕은 비웃는 것 같기도 하고 그저 알아들었다는 표시같기도 한 소리를 내며 돌아섰다. 키가 엄청 큰 사람이었는데 이런 이들이 다 그렇듯이 약간 어깨가 처져 마치 건들거리며 걷는 것처럼 보였다.

아란은 자기 방에 없었다. 지아는 짜증스럽게 한숨을 쉬고는 미간을 찌푸리고 방 안을 둘러보았다. 레이다처럼 돌아가던 지아의 눈길이 화장대에 놓여 있는 빗이며 립스틱 따위의 물건에서 멎었다. 잠깐 그 물건들을 바라본 지아는 식당으로 향했다.
“유아란!”

식당으로 들어가며 대뜸 이름을 불렀다. 놀라며 일어나는 그림자가 둘이었다.
“어머, 박형준 씨도 있었군요? 방해가 되었나요?”
식당에 있던 사내는 겸연쩍은 미소를 띄웠지만 낭패한 기색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전체적인 얼굴 형태는 사각형이었는데 눈매가 풀려 있는 탓인지 그런 형의 얼굴이 갖기 쉬운 완고함 따위는 엿보이지 않았다.
“언니, 무슨 일이에요?”

아란이라 불리우는 여자가 말했다. 아름답다기보다는 귀엽고 예쁜, 소녀티가 채 벗겨지지 않은 여자였다. 갓 스물밖에 안 되었을 것 같았다.
“스승님께서 찾으신다. 올라가 보아.”

아란은 그 말에 볼이 발갛게 물들었다.
“빨리 올라가.”
지아는 내숭떨지 말고' 하는 말이 뒷부분에 따라붙으려는 것을 꾸욱 밀어 넣었다. 아란은 아장아장 걷는 태로 식당을 나갔다.
“무슨 이야길 하고 있었어요?”

지아가 아란이 앉았던 의자에 털썩 앉으며 형준에게 물었다.
“그저, 그...... 오늘 공연에 대해서......”
형준은 말을 조금 더듬으며 어눌하게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
같이 이야기를 나누려면 어느 정도의 인내심은 필수적이었다.

형준의 입이 떨어질 잠깐의 시간 동안 지아는 식당을 한눈에 살필 수 있었다. 싱크대에 불쑥 솟아나 있는 그릇들이 설거지를 하고 있던 중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게 하였다.
“...... 이야기를 좀 하고 있었을 따름이에요.”

[작가소개] 권경희는 한국 여류 추리작가이다. 1990년 장편소설 '저린 손끝'으로 제1회 김내성 추리문학상을 수상하고 문단에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 장편 추리소설 '거울 없는 방', '물비늘', 실화소설 '트라이 앵글', 단편으로 '검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등 수십 편이 있다. 수필집 '요설록', '흔들리는 삶을 위한 힌트'등이 있다. 중견 소설가이면서 상담심리 전문가로 <착한벗 심리상담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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