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진은 초면이 아닌데

경감은 그때야 생각이 났다. 자하문장 정필대 피살 사건을 조사할 한번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유선은 추경감을 기억하지 못하는 같았다.

저를요? 죄송합니다.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진유선은 여전히 상냥한 웃음을 지우지 않고 말했지만 약간은 당혹스런 표정이었다.

미안해. 내가 잘못 같아

경감은 어물거리며 시선을 데로 돌렸다. 뒷벽에 빽빽하게 놓은 스케줄 판을 보았다. 날짜가 적힌 캘린더 같은 보드 위에 비닐을 씌우고 위에 사인펜으로 붉은 글씨, 푸른 글씨 등이 잔뜩 쓰여 있었다. 경감은 담배 연기를 길게 뿜으면 그것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22 박사장과 점심, 25 14 3 마을회관 기공식. 19 김여사 신도들과 만찬

대체로 이런 유의 글씨가 여러 사람 필체로 쓰여 있었다.

경감은 정필대 사건이 6 칸을 찾아 보았다.

자하문장
 

정사장 2

이렇게 쓰여 있었다. ‘자하문장 이란 것은 6일자 칸에 쓰인 분명했으나정사장 2 다음 7일인지 6일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만약 그것이 6일을 말한다면 정사장은 정필대일 가능성이 많았다. 차주호가 허름한 여관인 자하문장에서 무엇 때문에 정필대를 만나려고 했을까? 더구나 그때는 진유선을 데리고 갔었지 않은가? 만약 차주호가 진유선을 데리고 그곳에 가서 정필대를 만났다면 여기까지 생각한 경감의 뇌리를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경감이 진유선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출중한 미인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생긴 편이다.
 

치켜올라간 꼬리며 검은 눈썹, 날카로운 , 얇은 입술이 대담한 일을 저지를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필대가 발가벗은 권총을 맞았다는 것은 어느 여자와 정사를 하려고 했거나 뒤임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진유선을 용의 선상에서 배제할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유선은 자기의 보스인 차주호를 위해 무슨 일이든지 있는 여자인지도 모른다고 경감은 생각했다.
 

하나자하문장 이란 무엇일까? 남이란만남이라고 것이 오래되어자가 지워졌다고 수도 있다. 아니면이란 사람의 이름이거나 성이라고 수도 있었다.

경감이 골똘히 추리에 사로잡혀 있을 진유선은 계속 걸려오는 전화를 받고 있었다. 전화 중의 하나가 경감을 긴장시켰다.
 

, , 사장님이시군요. 위원장님이 몹시 기다렸어요.

, , 지금은 계시구요. 뒤면 들어오십니다.

, , 칠칠공육에 사사이삼, , 적었어요. 그럼 그리로 연락드릴게요.”

7706 4423. 경감은 전화번호임에 틀림없는 숫자를 재빨리 머리속에 적어 두었다. 남사장이 저기 적힌자하문장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님이 오셨다고? 이거 죄송합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풀칠 하느라고

그때 차주호가 들어오며 너스레를 떨었다. 경감이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자자, 들어갑시다. 미스 , 당귀차로 부탁해요.”

경감은 떠밀리다시피 방안으로 들어섰다.
 

사무실은 널찍하고 으리으리한 집기로 있었다. 방태산의 선거사무실과는 비교가 되었다.

강의를 해도 법한 넓은 한편에는 회의 탁자가 놓여 있고 옆에 은회색의 고급 소파가 있었다. 사무용 고급 가구 책상에는 위원장 차주호라는 자개로 새긴 팻말이 얹혀 위엄을 과시했다. 의자 뒤에는 수놓은 깃발이 있고 위에는 총재의 컬러 사진이 액자가 걸려 있었다.
 

, 앉아서 이야기하지요. 시경에서 오셨다구요?”

검고 굵은 안경테 너머로 미소를 띠며 차주호가 말했다

저어, 추라고 합니다.”

경감은 명함을 건네주었다. 사람은 소파에 마주 앉았다.

무슨 좋은 정보라도 있습니까?”
 

차주호는 목소리가 듯했다. 매일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니까 목이 법도 했다.

수사만 맡고 있기 때문에 정보는 별로 없는 사람입니다.

다만 여쭤볼 말씀이
 

하하하, 그래요? 그럼 정필대나 방태산 수사를 맡고 있나요?”

차주호는 일순 당황하는 듯한 그림자가 스쳐갔으나 너털웃음으로 자기 표정을 감추어 버렸다.

정필대 사건은 직접 담당이 아닙니다만 연관은 있습니다.

방태산 사건은 바로 담당입니다. 위원장님은 역시 날카로우십니다. 금방 의도를 꿰뚫어 보시니까요.”
 

, 저야 눈치로 먹고사는 정치인 아닙니까 정치인. 그래

내가 무슨 도움을 있습니까? 나도 이거 사람이 없어져 싱겁게 되었습니다.”

정필대 씨는 평소에 돈이 없어 쩔쩔맸다고 하던데요.”

, 그야 정치인이 쓰는 제스추어 아닙니까? 하긴 형인 정용대 씨가 돈깨나 있는 사람이지만 동생한테는 푼도 준다고 하더군요.”
 

그래요? 아무러면 형제간인데

, 정치와 돈에 형제 부모가 있습니까? 정필대가 나와봤자 돈만 쓰고 떨어질 뻔한데 어느 형이 대겠습니까? 철없는 하다가 쯧쯧 아마 모르긴 해도 빚만 잔뜩 졌을 겁니다.”

그럼 그가 죽기 전에 돈에 쪼들리고 있었겠군요.”
 

경감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야 내가 어떻게 압니까. 우리한테 들리는 소문으로는 사퇴할 것이란 이야기였습니다.”

, 그랬군요. 방태산 씨는 어땠습니까?”

어떤 말입니까?”
 

가령

작자는 여자 좋아하다가 망했습니다.”

?”

치마만 둘렀다고 하면 부하 직원이고 친구 여편네고 가리지 않으니...... 친구 여자 칼에 죽을 알았다니까.”

?”
 

친구 계엄령 도망 다니면서도 여자 없인 사는 친구였어요. 숱한 여자를 건드렸다가 돈으로 때우고 꿇어앉아 빌고 것이 한두 건이었나요?”

이번에도 무슨 확증이

여보슈 경감, 자기 사무실에서 여자하고 노닥거리다가 죽은 것이 뻔한데 자꾸 그러시요? 보수당에 모여 있는 정치꾼들치고 좋아하고, 여자 좋아하지 않는 어디 있어요. 우선
 

, 알겠습니다.”

내가 형사하는 낫겠어, 허허허. 이건 농담이고 , 우리 경감 봐주시오. 나는 장관 만나면 얘기하리다.”

경감은 씁쓸한 기분으로 방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사무실로 돌아온 경감은 형사에게 7706 4423이란 전화번호를 주고 그곳에 남이라는 사람이 있는지를 알아보라고 했다.

형사가 그곳에 전화를 걸었다.
 

, 살롱입니다.”

상냥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살롱이라구요? 어느 살롱이지요?”

형사가 되물었다.
 

양반이 대낮부터 취했나. 어느 살롱인지도 모르고 전화질을 해요?”

상냥하던 목소리가 금방 짜증으로 바뀌었다.

메모를 놓았는데 지워져서 번호만 남았어요. 나는 반도 그룹 비서실장인데 손님 접대할 일이 있어서 그럽니다.”
 

아이구, 그러세요? 진작 그렇게 말씀하시지요. 마담이라고 합니다. 여기가 바로 황금 살롱이에요. 한남대교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마담이란 여자는 갑자기 껌벅 죽는 시늉을 하면서 좔좔 이야기를 쏟아 놓았다.

사장 오셨나요?”
 

형사가 이판사판으로 말을 던져 보았다.

사장?”

마담이 약간 주춤했다.

조금 전에 그리로 간다고 갔는데 , 사장 말예요, 남사장. 천하의 사장을 몰라요?”

, , 큰형님 말씀이군요. 남봉철 사장님 말씀이죠? 조금 전에 나가셨어요.”

어디로 간다고 그랬습니까?”
 

형사는 열심히 메모를 하면서 물었다.

글쎄요, 자기 사무실에 갔겠죠. 신사동 말입니다.”

위원장 만나러 아닙니까?”

선생님 전화 받고 나가셨어요. 아마 신사동 계실 거예요.”

거기 전화번호가
 

아니, 사장님 사무실 전화번호도 모르셔요?”

마담이 갑자기 의심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 여기 있습니다. 그리로 전화해 보죠. 외국 바이어 오면 다시 전화할게요.”

형사는 얼른 전화를 끊어버렸다.

남봉철이 누굽니까?”
 

형사가 경감에게 물었다. 형사의 전화하는 모습을 보고 있던 경감은 아무 대꾸도 않고 마약반에 전화를 걸고 있었다.

남봉철에 관한 자료 보내 주시오.”

경감은 전화를 끊고 형사에게 말했다.

그는 옛날부터 유명한 마약 밀수업자였어.”
 

마약 밀수업자라구요?”

형사 생활 년인데 남봉철도 모른단 말이야.”

경감이 언제나 처럼 형사를 비웃듯이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면 정치와 마약의 결탁이 이루어진 아닙니까? 재미있는 모종을 부어 놓은 같은데요.”
 

형사가 괜히 신이 나서 떠들었다.

마약과 정치만 있는 것이 아니고...”

경감이 담배를 꺼내 입에 물며 소파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렇지요. 여자가 빠져서 되는 있나요?”

형사가 재빨리 복도로 나갔다. 조금 있다가 그는 자판기에서 커피 잔을 뽑아 들고 들어 왔다.
 

마담과 여비서와 마약과 정치라...”

그는 계속 신이나서 떠들었다.

 

23. 미망인의 증언

 

명자야!”

오랜만에 오명자를 만난 송희는 그녀의 손을 와락 잡으면서 눈물부터 글썽거렸다.

송희야!”
 

정말 해치웠구나. 천하의 악당이 드디어 지옥으로 갔어. 우리 그이한테 소리로 떠들고 싶어.”

송희는 커피숍에 빽빽하게 앉아 있는 다른 사람들은 전혀 의식히지 않고 소리로 말했다.
 

, 진정해. 우리 앉아서 천천히 이야기하자.”

오명자가 주위 사람들을 의식하고 송희를 앉혔다. 그녀는 쥬스 잔을 시킨 심호흡을 몆번 하면서 송희의 마음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니?”
 

송희는 계속 울먹울먹하면서 말을 참느라 애를 썼다. 그녀는 비로소 주위 사람들을 의식한 같았다.

일각이 여삼추라는 옛말 있지. 우리 여고 다닐 말라깽이 한문 선생이 하던

케케묵은 얘기를 꺼낸다.”

오명자가 미소를 머금었다. 송희는 말을 놓고는 자신의 마음이 조금 누그러진 것을 느끼는 같았다.
 

방태산! 원수를 어떻게 갚느냐 하는 생각만으로 생활이 있었어. 너에게서 무슨 소식이 오지 않을까 하고. 그야말로 하루가 1년처럼 괴롭고

미안해, 자주 연락 못해서.”
 

그런데 말야, 어느 텔레비전에 마침내 녀석 얼굴이 크게 나오잖아. 나는 밥을 먹다가 놀라 쳐다보고 있었더니 죽었다고 하는 거야. 나는 숟가락이 떨어지는 것도 몰랐어.”
 

그런데 너는 방태산이 너의 허즈를 해쳤다고 확실히 믿고 있는 거니?”

지금 무슨 얘길 하는 거야? 방태산이 아니고 우리 그일 죽일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 네가 겪어 보았으면 작자가 어떤 못된 인간인가 하는 것을 알았을 텐데

송희는 새삼스럽게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는 태도였다.
 

녀석이 무슨 나쁜 짓을 하고 다녔는지 알지? 내가 메모한 주었잖아.”

, 대강은 보았어.”

거기 적은 말고도 얘기하자면 얼마든지 있어. 우리 집에 와서 얼마나 행패를 부렸는데
 

? 집에까지 방태산 씨가 찿아왔었단 말야?”

오명자는 처음 듣는 이야기라 귀가 번쩍했다.

, 내가 얘긴 했었나?”

송희가 갑자기 실수라도 꺼림칙한 표정이 되었다.

어디 자세히 이야기해 보아.”
 

송희는 한참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방태산은 세상에서 가장 악랄한 인종에 속하는 인간이야. 우리 그이의 약점을 잡아 가지고 얼마나 괴롭혔는지 몰라.”

무슨 약점을 잡았길래?”


 

[작가소개]

이상우;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학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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