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태산 사건이 발생했던 날 어디에 있었습니까?”
“곽진 박사와 함께 춘천에 놀러 갔습니다. 곽 박사란 저의 보이프랜드라고 하는 게 옳겠지요.”
“어떤 사람입니까?”

“미국 대학에 있는 사람입니다. 정필대 씨를 알기 전부터 저를 좋아한 사람인데⋯ 정필대 씨에게 배신당하고 그냥을 못 견딜 것 같아 그를 서울로 불렀지요.”
“여기선 무슨 일을 하는 분입니까?”
추 경감이 물었다.

“내가 다닌 학교는 흑인 학생들이 많은 학교 였습니다. 흑인들은 우리 동양인들을 항상 인종적으로 한 수 아래의 종족으로 보고 있거든요. 툭하면 가지고 놀려고 한답니다.”

“그녀는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말을 계속했다.
“그날도 저는 도서관에서 늦게까지 공부하다가 어둠이 깔릴 무렵 캠퍼스로 나왔었지요. 숲이 많은 보도를 걸어 오자니까 갑자기 숲속에서 흑인 생 두 명이 튀어 나와 다짜 고짜 나를 숲속으로 끌고 들어가 스커트를 벗기기 시작했어요. 내가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지요. 급하니까 한국 말이 튀어 나오더군요. 사람 살리라고 목청껏 고함을 질렀지요.

“그때 달려온 사람이 곽진 박사였군요”
강 형사가 거들었다.
“예”
“혼자서 흑인 두 사람을 해치웠습니까?”

“그이는 태권도 유단자였어요. 그때 키가 큰 흑인 학생 하나는 내 두 다리를 붙잡고 있고 또 한 학생은 내 위에 올라가 스커트를 찢어 내려고 기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누가 와서 자기들의 머리를 한 대씩 먹이는 줄도 모르고 당했습니다.”
“그 뒤 곽진 씨와는⋯ ”

추 경감이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서로 의지하는 사이가 되었다고 할까요. 친척 오빠 같기도 하고 연인 같기도 하고⋯ ”
“꼭 한 가지만 더 물어봅시다.”

강형사가 약간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만일 방태산을 만났더라면, 죽지 않은 방태산을 만났더라면 어떻게 대했습니까?”
“그런 인간은 상대할 가치가 있겠습니까?”
신지혜는 끝까지 냉정을 잃지 않고 있었다.

20. 저울 위의 세상

“뭐야! 최장배가 연행되었다고?”
남봉철은 전화통에 대고 깊은 신음을 토했다.
“바보 같은 자식, 일을 어떻게 처리한 거야.”
전화 상대방의 긴 설명이 있었다.

“알았어. 당분간 그건 들여오지 말고 모두들 은신해 있도록.”
남봉철은 최장배의 충성심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경찰 역시 만만히 볼 상대는 아닌 것이다.

남봉철은 머리 위로 주르르 흐르는 땀을 닦으며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제일 먼저 걱정이 되는 것은 경찰이 사건을 어디까지 알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젠장맞을! 하필 그곳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날 건 또 뭐람?”

그는 누구에게랄 것 없이 분노를 터뜨렸다. 그러나 그 분노는 공허히 메아리쳐서 자신에게 돌아올 따름이었다. 본래대로 일이 되었다면 8억 원이라는 이번 히로뽕 판매 수입의 절반이 차주호에게 전달되었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지금까지 건네 준 20억이라는 막대한 자금과 더불어 자신의 위치도 확고부동하게 굳혀 나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니었던가.

남봉철은 자리에 앉아 머리를 쓸어 넘기며 자신의 나이를 새삼 떠올려 보았다. 이제 예순다섯. 더 이상 암흑가의 보스로만 있기에는 너무 늙은 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은퇴하려는 마당에 이게 무슨 꼴인가?’
그는 씁쓸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리고 전화를 들었다.
“차 위원장님 계십니까? 난 남이라는 사람이오.”
차주호는 자리에 없었다.

“위원장님 돌어오시면 빨리 이리로 전화를 해 달라고 전해 주시오. 아주 긴급한 문제가 발생했다고 말씀드리면 됩니다.”
그는 전화를 끊은 뒤 깍지를 끼고 다시 깊은 생각에 빠졌다.

이상하게도 처음 떠오른 것은 자신의 유년 시절이었다.
큰형님의 이름은 지금은 남봉철이라고 하고 있었지만 그의 고향 충청북도 산골에서는 덕배라고 불렸었다. 서울에 올라왔던 것은 해방 직후였고 그때만 해도 혈기 왕성한 촌무지렁이에 지나지 않았다. 

좌우익의 치열한 싸움터에서 처음 그는 못 배우고 헐벗은 사람들의 벗이라는 좌익의 편에 서게 되었다. 그 자신이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아왔던 탓이기도 했다. 그는 두려움이 없이 선봉에 서서 대열을 지도했고 그러한 그의 모습은 곧 남로당 간부들의 눈에 띄었다. 사실은 그것이 그의 화려한 변신의 시작이기도 했다.

여순 사건과 대구 폭동 등 일련의 실패를 보면서 또 그와 함께 날로 위력을 더해 가는 우익의 힘을 보면서 그는 점차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좌익의 선봉에 서 있는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화려한 호칭 이외의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생활은 여전히 궁핍했고 그것은 생명의 위험을 늘상 받는 그에게도 도무지 양에 차지를 않는 것이었다.

그의 전향 이유는 그렇게 단순했다. 그는 다만 편안한 삶을 살고 싶었던 것이다.
남봉철의 추억은 거기서 끊겼다.
‘그렇지. 형주라는 놈의 배반도 거기에 이유가 있을 것이다.
계집까지 달고 달아났으니⋯ ’

그는 물론 구형주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절대로 용납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의 좌익 조직 탈퇴 이후 그가 속해 있고 그가 관할하던 조직은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다시 좌익으로부터 쫓기게 되었다. 그러나 그 위험이 다가오기 전에 전쟁이 일어났고 거기서 그는 새로운 활로를 뚫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그는 한 조직원의 탈퇴가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잘 알고 있었다. 구형주가 바로 그런 녀석이었다. 그 녀석 때문에 그는 인생 최후의 도박에서 궁지에 빠져들고 만 것이었다.
“나는 정치와는 마가 낀 놈인지도 모르지.”

남봉철은 중얼거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에게도 자유당 시절 이정재의 부하로 들어갈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밀수에 재미가 들린 그는 보다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길을 택했고 그것이 현명한 판단이었다는 것은 5.16이 증명해 주었다. 용하게 법망을 피해 온 그는 단 하나의 전과도 가지고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정재, 유지광 일파와는 아무런 연관도 없었기에 정치 깡패 소탕과 불량배 소탕에서도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한 그가 늘그막에 정치인과 손을 잡은 것은 물론 정계에 나가고자 하는 욕망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조직을 인계시키고 합법적인 그늘 아래서 자신의 여생을 마치고 싶었던 것이다. 권력의 후계자가 자기를 헐뜯지 않고 보호해 주기를 바랐다.
그는 다시 한번 구형주를 생각했다.

그를 먼발치에서 한 번 본 적이 있다. 그때 최장배는 충성심이 대단한 놈이고 재간도 대단하게 갖춘 놈이라고 칭찬했었다. 그런 놈이 갑작스럽게 배반했을 리는 만무했다.
“왜일까?”

그는 자신의 생각이 본궤도에 올랐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형주라는 놈은 도망갈 구멍을 파고 있었던 것이다. 여자를 데리고 나간 치밀성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박정자라는 여자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몸만 빠져나갔다고 했다. 그것은 구형주가 그 여자의 옷가지를 준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봉철은 도리질을 했다. 그가 돈을 혼자 갖고 있을 기회란 주어질 수가 없는 것이었다. 자금은 둘이 운반한다. 구형주와 함께 돈을 운반했던 것은 최장배였다. 그가 이 배반을 사주했을 리는 없다. 그다음에는 자하문장의 박철호와 함께 있게 된다. 그 역시 조직을 배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배반했다면 구 형주와 함께 도망을 쳤어야 옳다.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렇다면 결론은 명확한 것이다. 구형주는 그날 자하문장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는 목줄기가 당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가 조직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남봉철은 그가 누구인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름다운 전화벨 소리가 그의 깊은 생각을 깨웠다. 그는 비서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전화를 들었다.
“여보세요?”

뜻밖에도 여자의 목소리였다. 차주호를 기다리고 있던 그는 전화를 다시 끊어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형님 계신가요? 저는 황금 살롱의 주  마담이에요. 형님이 들으면 기뻐하실 소식이 있다고 좀 전해 주실래요?”

“내가 형님이오.”
“형주라는 사람에 대한 소식인데 얼마에 사시렵니까?”
주마담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무슨 정보인지도 모르는데 그건 너무 빠르지 않소?”

“세상이란 원래 저울질하면서 사는 것 아녜요? 싫으시면 그만두어요.”
“좋소. 무조건 사기로 하지요. 가격은?”
“한 장이면 되겠어요?“
남봉철은 주 마담이 진담으로 하는 소린지 농담인지 몰라 한참 생각했다.
“좋소. 정보를 넘겨줄 장소와 시간을 대 주시오.”
 
“오늘 저녁 6시 황금 살롱, 저희 집에 오세요. 술잔이 앞에 있어야 이야기가 나오죠.”
“그건 안 되오. 거기는 경찰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어요.”
결국 이 여자는 술을 팔겠다는 목적으로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다고 남봉철은 생각했다. 형주에 대한 정보라면 그가 단숨에 달려올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천하의 남봉철이 겁쟁이가 되었어요?”

“좋아요. 나 또 주 마담한테 속아 주지. 허허허.”
“경찰 겁나지 않으세요?”
마담이 다시 약을 올렸다.
“왜 겁나지 않겠어요. 하지만 좋은 정보가 있고 나긋나긋한 매미들만 있다면 사나이 장부가 목숨인들 아깝겠어요? 허허허...”

그러나 그의 웃음은 어딘지 공허한 데가 있었다.
“매미는 없지만 물 잘 오른 영계는 몇 마리 있는데⋯ 남 회장님 솜씨라면 하루 저녁에 두세 마리는 문제 없을 거예요.”

“이거 왜 이러슈. 내가 뭐 고기에 환장한 놈인 줄 아시요? 하긴 그것도 다 젊은 한때의 일이지.”
“60청춘이란 말도 못 들어 보았어요?”

“하여튼 준비나 잘 해 놓으시오. 영계 보다는 정보 쪽이니까. 만약 시시한 얘기나 꺼냈다가는 술값커녕 물 값도 못 받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해!”
남봉철의 끝맺는 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21. 미치고 싶은 밤

초라한 어머니의 영혼과 만나고 오던 신지혜와 곽진은 우울 한 기분이었다. 양주군 백석면에 있는 망월사에 어머니의 혼령을 위탁했다. 평소 불교 신자였던 어머니는 망월사에 있는 한 스님을 알고 지냈기 때문이었다. 누가 죽였든지간에 미혜의 원수로 생각해 온 방태산이 죽었다는 것을 어머니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곽진은 미국에서부터 가장 가깝게 지낸 보이프렌드였다. 보이프랜렌드라고밖에 표현할 수가 없지만 정필대에게 배신당한 후 그를  배우자로 몇번 생각해 보기도 했다.
미국에 건너가 고학으로 공부를 마친 곽진은 시카고의 한 대학에서 조교로 일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동물학과를 나온 곽진은 그곳에서 수의사 공부를 다시 하고 대학 부속 동물원에서 일했다.

정필대가 떠난 후 한참 방황하던 신지혜를 붙잡아 준 사람이 곽진이었다. 그때는 순수한 친구였다. 서로를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해주고 싶은 사이였다.
그는 이제 갓 서른을 넘겼지만 고학하느라 너무 고생을 했기 때문에 30대 중반으로 보였다.

신지혜의 부름으로 서울에 머물고 있는 그는 웬만하면 여기 신지혜와 함께 남을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미스터 곽, 언제 갈 거야?”
거의 십여 분 동안 아무 말도 않고 북한산 꼭대기만 바라보고 있던 지혜가 입을 열었다.

렌터카를 운전하고 있던 곽진은 흘깃 지혜를 돌아보고는 다시 묵묵히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그는 서울에 오자마자 렌터카를 타고 다녔다.
“아직⋯”
한참 만에 곽진이 대답했다.
“난 도로 미국으로 갈까 봐요.”

“왜?”
곽진은 여전히 지혜를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여기서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 정든 사람은 다 죽고, 미워해야 할 사람까지 허무하게 가 버렸으니 무슨 이유로 여기 남아 있어?”

“대학 강사 자리 얻어 놓은 것은?”
곽진이 비로소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작가소개]

이상우;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학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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