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뭐 대수야.?”
“여긴 조국이니까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건 아니지⋯”
“미스터 곽은 자기 고향 아냐?”
“난 언젠가 돌아올 거야.”

“요즘 난 괴로워. 모두 떠나고 혼자 남은 것 같아. 괴롭히는 사람도 같이 있어야 사는 맛이 나는가 봐.”
“⋯”
“미스터 곽.”
“응?”

“나 좀 어떻게 해 줘.”
곽진이 다시 신지혜를 돌아다보았다. 차창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에 긴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그녀의 눈에선 두 줄기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의지력 강하고 담이 큰 지혜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그는 처음 보았다.

곽진은 핸들을 쥐고 있던 오른손으로 지혜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우리 맥주 한 잔 마시고 가. 아니, 한 잔이 아니라 오늘은 쓰러질 때까지 좀 마시자구,”

백석면서 서울로 들어오는 좁은 2차선 아스팔트 길 옆에는 여기저기 유흥 시설 안내판이 눈에 띄었다. 그중에는 장흥 유원지라는 간판도 보였다.
곽진은 그쪽으로 차를 돌렸다.
“장흥이라는 데 가 보았어?”

곽진이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그곳이 요즘 잘나가는 유원지인데 아주 그럴듯하대.”
곽진의 말이 맞는 것 같다고 지혜는 생각했다.

장흥에는 음식점, 카페를 비롯해 맥주홀, 디스코 하우스 등 근사하게 단장한 시설이 서울의 강남을 뺨치게 즐비해 있었다.
그들은 그리 크지 않은 술집 앞에 차를 세우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래 위층이 모두 카페 같았다.

아직 이른 저녁이라 손님은 별로 없었다. 실내는 밖에서 보기보다 훨씬 호화스러웠다.
가운데 여러 대의 마이크와 함께 기타, 피아노 등 악기들이 놓여 있었다.
그들은 맥주를 청해 놓고 목을 축였다.
“미스터 곽, 대학 다닐 때 애인 없었어요?”

신지혜가 서툰 솜씨로 담배를 피워 물면서 말했다.
“그건 골백번도 더 얘기했잖아. 가난하다고 차였다는 거⋯”
“미안해. 또 아픈 상처를 건드렸군. 채인 건 나도 마찬가진데. 자, 그런 뜻에서 한 잔.”
지혜는 글라스를 쨍 소리가 나도록 부딪친 뒤 단숨에 잔을 비웠다.

“곽진, 나 오늘 실컷 취하고 싶어. 시시한 맥주로는 안 되겠어요.”
신지혜는 정말 보통 날보다는 좀 달라 보인다고 곽진은 생각했다.
망월사에 가자고 한 것부터가 이상했다. 절에서도 어머니 아버지의 명패 앞에서 너무나 서럽게 우는 것을 멀리서 곽진은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 결혼할까? 계약 결혼이라는 것 있지. 1년, 아니 여섯 달, 아니 한 달만⋯ 어때?”
곽 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하루만이라도...”
신지혜는 얼마 안 가 술주정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곽진은 싫은 내색 않고 그것을 다 받아주었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중앙 무대에 악사들이 나타나고 빛 못 본 가수 지망생 아가씨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홀에는 손님들로 어느새 가득 찼다. 모두가 남녀 짝을 맞추어 온 아베크족 같았다.
신지혜와 곽진이 맥주 열 병 이상을 비우고 났을 때였다.

갑자기 경음악의 톤이 달콤한 멜로디로 바뀌더니 실내조명이 거의 꺼지다시피 어두워졌다.
가운데 무대 위에 붉은 스파트가 비추자 키가 큰 댄서 아가씨가 나타났다. 댄서는 달콤한 선율에 맞추어 흐느끼듯 춤을 추면서 한 가지씩 한 가지씩 옷을 벗어 던지기 시작했다.

객석 여기저기서 탄성과 휘파람 소리가 흘러나왔다. 깔깔거리는 술 취한 여자의 웃음도 들렸다. 어느새 들어 왔는지 사람들이 홀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음악이 점점 클라이맥스를 향해 올라가자 댄서는 가슴에 마지막으로 남았던 브레지어를 뜯어냈다. 탱탱한 유방이 봉숭아씨 터지듯 조명 앞에 튕겨져 나왔다. 댄서의 입에선 신음 같은 소리가 새어나왔다. 여기저기서 교성과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신지혜는 자기가 댄서가 된 듯한 착각을 하면서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음악이 점점 톤을 높여 폭발할 즈음에 이르렀다.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마지막 고음을 낼 때 무용수의 아랫배  끝에 있던 조그만 팬티가 허공으로 던져졌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늘씬한 댄서의 육체가 온 실내를 폭발시켰다.
“우리 딴 곳에 가요.”

신지혜가 갑자기 일어서며 곽진을 끌고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뜨거운 술집 안 공기와는 또 다른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속이 후련해지는 것 같았다. 현란한 네온사인 사이로 별 빛이 영롱하게 보였다.
취기가 한껏 오른 신지혜의 눈에 장흥원이란 여관의 네온사인 불빛이 비쳤다.
“우리 오늘 여기서 자고 가요.”

“서울 안 가고?”
곽진이 뜻밖이란 듯이 물었다.
“서울 가 보아야 기다릴 사람 있나요? 이제 이 넓은 천지에 내가 기댈 사람은 미스터 곽, 자기밖에 없어.”
“어째 오늘 밤은 지혜 같지 않군.”

“내 말대로 할 거야 안 할 거야?”
지혜가 갑자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좋아요, 알았어요.”
두 사람은 차를 장흥원 앞에 세우고 나란히 여관으로 들어갔다. 여관이라기보다는 요즘 흔한 러브 호텔이라는 곳이었다.

아주 깨끗하고 시설이 좋았다. 두 사람은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뜨거운 포옹부터 나누었다.
그들이 육체를 서로 나눈 것은 처음이 아니지만 오늘 밤처럼 뜨겁기는 처음인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누구에게 쫓기는 사람들처럼 급히 옷가지들을 벗어 팽개치고 알몸이 되어 침대로 뛰어 올라갔다. 가슴과 다리가 온통 털북숭이인 곽진은 미끈한 글래머 신지혜의 허리를 으스러지도록 껴안았다. 한쪽 팔은 가늘고 야들야들한 지혜의 긴 목을 잡고 입맞춤을 했다. 지혜가 숨이 막혀 두 주먹으로 곽진의 어깨를 칠 때까지 입맞춤이 계속되었다.

곽진은 그 동안에 지혜의 두 다리를 헤치고 소중한 중심부를 부지런히 공략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혜가 본능적으로 무릎을 붙이고 열지 않는 바람에 꽤 시간이 걸려야만 했다.
“이 털투성이 좀 보아, 짐승 같아 자기는⋯”

지혜가 무릎을 약간 늦추어 주면서 곽진의 가슴털을 쓰다듬었다.
“나야 매일 짐승하고 같이 사니까 닮아 가는가 봐. 동물원의 고놈들도 사랑을 나눌 땐 참 볼 만하거든.”
곽진은 갑자기 자기의 전공을 떠올였다.

“그래요. 아이 천천히⋯”
지혜는 자기의 중심부로 들어오려는 곽진의 남성을 피하면서 말했다.
“동물 중에 가장 멋있는 섹스를 하는 것은 어떤 놈이에요?”
“놈이 아니라 년도 있는데.”

“아이⋯ 젊잖지 못하게⋯”
“사랑을 나눌 때 젊잖은 동물이란 없어.”
“호호호⋯”
“코끼리의 사랑이 가장 정열적인 것 같아. 그들은 땅이 울리도록 서로 애무를 하다가 마침내 육중한 수컷의 몸이 암컷을 짓누르지.”
“어머⋯”

“그런데 말야 어마어마한 수컷의 그것은⋯”
“얼마나 커요?”
신지혜는 물어놓고 혼자 킥킥대며 웃었다.
“길이가 약 90센티, 둘레는 30센티 정도 되지.”
“엄마야, 기둥이군 기둥, 호호호.”

신지혜는 곽진의 겨드랑이를 간지럽히며 웃었다.
“그런데 말야 그 어마어마한 외모와는 달리 사랑 행위는 십 초도 채 안 돼 끝나버려.”
“애걔!”
지혜는 더 못 참겠다는 듯이 곽진을 끌어안았다.
“빨리 나 좀 어떻게 해 줘. 오늘 밤은 정말 미쳐 보고 싶어.”
서서히 일기 시작한 파도는 얼마 안 가 폭풍우로 변했다.
“지혜야.”
“응.”

“오늘 밤은 지혜답지 않아.”
“나도 나를 모르겠어.”
신지혜의 뜨거운 신음과 함께 장흥 유원지의 네온 불빛은 하나둘 꺼져 갔다.
그들의 태풍은 방안을 두 번이나 스쳐 갔다. 한참 동안 서로 손만 꼭 잡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혜! 자니?”
곽진이 그녀의 뺨을 만지며 물었다.
“아니⋯”
그녀가 돌아누워 곽진의 털북숭이 가슴을 다시 쓰다듬으며 나직하게 대답했다.
“우리 정말 결혼할까?”

곽진의 말은 진심인 것 같았다. 그는 한 번도 결혼 얘기 같은 것을 한 일이 없었다.
“난 생각해 본 일 없어.”
갑자기 신지혜가 곽진의 손을 뿌리치고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스위치를 잡아당겨  방안을 환하게 밝혔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그녀의 알몸이 형광등 앞에 눈부시게 드러났다.
“방태산은 잘 죽은 거지?”

그녀가 갑자기 엉뚱한 말을 했다.

22. 여자와 정치

추 경감은 차주호의 주변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제 13선거구의 유력한 후보 예상자 세 사람 중 유일하게 살아 남은 사람이었다.
원래 야당을 할 만한 인물이 못 되었는지는 몰라도 그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여당 쪽에서 일해 온 사람이었다.

자유당 때는 정치 깡패 조직의 문전에서 얼씬거리며 알아주지 않는 주인을 위해 충성을 바치던 사람이었다.
4.19가 일어나자 집권자들의 집에 불을 지르고 동상을 부수는 일에 앞장을 섰었다. 곧 반독재 운동가로 돌변하고 서울 변두리에서 시의원에 출마를 했다 보기 좋게 낙선한 뒤 당시 집권당의 당원으로 들어가 어느 참의원의 비서관을 지냈다.

5.16군사 혁명이 일어나자 재빨리 재건 국민운동이니 뭐니 하는 조직에 끼어들어 자기가 가장 애국자인 척 떠들고 다녔다.

민간 정부가 들어서자 지금 제 13지구가 된 동의 동장 감투 하나를 얻었다.
그 이후 동장을 그만두고 자민당에 입당할 때까지 계속 여권에서 일을 해 왔다.
나이 56세가 되도록 직장이란 것을 가진 것은 1년 반 동안 한 동장 경력뿐이었다.
그는 선거가 있을 때마다 보이지 않는 그의 사조직을 동원해 충성을 바쳐 자기 보스의 득표 활동을 도왔다.

그의 표리부동하고 약은 처세와는 달리 우직한 충성심도 있는 것은, 그가 원래 깡패 조직의 일원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추 경감은 지금도 그가 거느린 사조직의 대부분은 깡패 조직이거나, 그와 유사한 불법 범죄 조직일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추경감은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정보과의 제 13선거구나 자민당 담당 형사들을 여러 명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그들도 차주호가 어떤 조직과 연관이 있을 것이란 의심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집권당의 국회의원 공천 예정자이니만큼 함부로 대하거나 뒷조사를 하는 일 등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란 말을 해 주었다.

추 경감은 자기 모가지 걱정까지 해 주는 동료가 고맙기도 하지만 은근히 화를 나게도 했다.
추 경감은 차주호를 직접 찾아가서 만나기로 작심했다.
추 경감이 자민당 제 13지구당 사무실을 찾아갔을 때는 점심 때라서 그런지 거의 텅비어 있고 비서 격인 진유선만이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턱이 뾰족하고 눈꼬리가 위로 치켜올라가 고집이 셀 것처럼 보이는 진유선은 추 경감을 보자 상냥하게 웃었다.
선거를 앞둔 입후보 예상자의 비서인 만큼 사람을 대하는 부드러움이 몸에 배어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무슨 일을 도와드릴까요?”
추경감은 지나치게 하얀 그녀의 피부가 병적이란 생각을 하면서 함께 빙긋이 웃었다.
“저어, 차 위원장님을 좀 뵈러 왔는데⋯”
추 경감이 존대말을 쓰기도 뭣하고, 그렇다고 초면에 말을 놓을 수도 없어 어물어물했다.

“예, 저는 진유선이라고 합니다. 위원장님의 비서입니다. 선생님은 어디서 오셨다고 여쭐까요?”
“시경에서 왔다고 해 주십시오. 서울 시경의 추라고⋯”
“예, 그러세요. 여기 좀 앉으세요. 위원장님이 점심 식사 나가서 아직 안 들어오셨거든요⋯”

그때였다.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진유선이 전화를 받았다.
“예, 위원장님, 별일은 없구요. 지금 손님이 오셔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진유선은 다시 방긋 웃으며 말했다.

“바쁘지 않으시면 한 십오 분만 기다리시랍니다. 곧 들어오신다구요.”
“좋아요.”
추 경감은 소파에 앉아 담배를 꺼내 물었다.

[작가소개]

이상우;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학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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