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혜는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았다. 조금 전 아랫도리 벌거숭이의 남자 밑에 깔려 추잡한 육욕으로 신음을 토하며 사지를 허우적거리던 여자와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었다. 여자란 참 묘한 변신의 천재라는 생각도 들었다.
오명자가 계단을 내려갔다. 

신지혜는 오명자의 발자국 소리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생각되자 숨었던 게단에서 내려 왔다. 그녀는 핸드백에서 가스총을 꺼냈다. 이것은 며칠 전 남대문 시장에 있는 잡화상에 부탁해 구해 두었던 것이다.

그녀는 가스총을 오른 손에 들고 살며시 도어를 열고 들어 갔다. 가리개가 서 있어서 방태산의 모습이 정면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오 여사?”
인기척을 느끼고 방태산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했다.
“흠”

신지혜가 약한 기침 소리를 냈다. 그는 오명자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오 여사. 기분 좀 확 풀렸지? 내 힘 어때?”
신지혜가 코앞에 다가설 때 까지 방태산은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신지혜는 책상 위에 아랫도리를 다 드러낸 채 널부러져 담배를 피우고 있는 방태산을 보자 얼굴이 찌프러졌다.

“이것 봐 방태산!”
신지혜가 방태산 앞에 가스총을 불쑥 내밀며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를 냈다.
“윽! 아니 당신은⋯ ”
방태산이 놀라 일어나려고 했다.

“꼼짝하지 말고 그대로 있어. 방태산 물건도 형편없군.”
신지혜는 위축되어 볼모양 없는 그의 심벌을 내려다보며 빈정대듯이 말했다.
“그 물건 가지고 아직 제 버릇 못 고치고 나쁜 짓이나 계속하고⋯ 당신 같은 인간은 빨리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해!”
“아니, 저⋯ 저⋯ ”

방태산은 당황해서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꼼짝하지 말고 내 말 들엇”
그러나 방태산은 가만히 있지 않고 벌떡 일어났다.
“펑!”

신지혜의 손에서 가스 총이 발사되고 방태산은 그대로 도로 쓰러졌다.
여기까지는 추 경감의 추리였다.
“분명히 이렇게 됐을 거야.”
“반장님이야말로 문학 공부 하셨어요? 나보고 맨날 소설 쓴다고 하시고는...”
강 형사가 놀렸다. 

“그랬군요. 과연 우리 반장님이십니다. 그러나 또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어요.”
강 형사는 추 경감의 추리를 곧 받아들였다.
“또 뭐야?”
추 경감이 담배를 꺼내 물고 지포라이터를 켜려고 철거덕거렸다. 그러나 고물 지포라이터는 좀처럼 불이 켜지지 않았다.

“우리 나가서 목이나 좀 축이고 와서 다시 시작할까요?”
강 형사가 갑자기 엉뚱한 제의를 했다.
“이런?”
그러나 추경감은 그를 한번 흘겨 주고는 일어섰다.

32. 경감님 미안해요

김포 공항 하오 3시30분. 서울 발 뉴욕행 유나이티드 에어라인 8080편이 금방 이륙을 시작했다.
벨트를 매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신지혜는 약간의 현기를 느껴 눈을 감았다.
지옥으로 떨어지는 듯한 난감한 심정을 참고 견뎌야만 했다.

비행기는 채 5분도 안 가 평온을 회복했다. 자기 고도를 찾은 것이다.
지혜는 벨트를 풀고 눈을 떴다. 창 밖을 내다보았다. 늦가을의 오색 물결이 추상화처럼 발아래 펼쳐졌다.
구름 사이로 잠깐잠깐 보이는 조국이 웬지 안타깝게만 느껴졌다.
이제 무슨 미련이 있어 여기 다시 올 것이냐고 마음속으로 되뇌어 보았지만 언젠가 먼 훗날엔 그래도 저 강산에서 늙어 가고 묻혀야 한다는 생각은 영 떨쳐낼 수 없었다.

그녀는 출국 사열대를 나올때까지 심장이 콩콩 뛰고 얼굴이 상기되었던 것을 다시 생각했다. 
‘신지혜! 출국 금지’
누군가가 불쑥 이 말을 할 것만 같았다. 
‘사람을 해치고 유유히 이 나라를 빠져 나갈 수 있을 수 있을 것 같아? 어림도 없는 일이야’

추 경감이 수갑을 흔들며 달려와 그녀의 팔목을 잡을 것 같은 환상을 보면서 그녀는 가까스로 출국 수속을 마쳤었다. 보세 구역에서 탑승을 기다리면서도 안내 방송이 나올 때마다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바쁜 공항 종사자들은 그녀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그녀가 서울에서 저지른 일은 결코 용서받지 못할 일이 아니라고 그녀는 스스로를 위로했다. 어절 수 없이 저지른 일이다. 아니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자기가 신을 대신해서 심판한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이제 미혜는 웃을 수 있을 거야. 이담에 저세상에서 미혜를 만났을 때는 나를 위로해 줄거야. 내가 서울에서 저지른 일을 고마워할 거야.’
그녀는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나고 곽진과 결혼해서 새로운 미국 생활을 펼친다는 것이 어쩐지 즐거운 일만은 아닌 것 같았다.
울적하고 착잡한 기분을 잊으려고 지혜는 지나가는 서비스 박스에서 신문 한 장을 집어들었다. 석간이었다.
「00당 전국서 압승」

어마어마하게 크고 시커먼 활자가 눈에 들어왔다.
개표가 거의 끝나가는 국회의원 선거의 결과가 자세하게 보도되었다.
신지혜는 개인별 득표가 실린 면을 펼쳤다. 제일 먼저 서울 13선거구를 보았다.
「차주호(자) 62,337(당)」

그 외의 후보들인 보수당, 민족당은 차주호 득표의 3분의 1도 되지 않았다.
화제 기사 속에는 차주호가 전국 최다득표 10명 중의 한 사람이라고 소개되어 있었다.
신지혜는 쓴웃음을 입가에 담으며 신문을 접었다.

[작가소개] 이상우;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학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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