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3일 오후 덕수궁으로 간다. 시청역 1번 출구로 나왔다. 아스팔트가 이글거리며 타고 있다. 열기가 숨을 막는다. 휴대전화기를 봤다. 현재 기온이 36.2. 어제보다 3나 높다. 손 선풍기를 목덜미에 댄다. 열기를 날리기에 역부족이다. 대한문에 도착했다. 무료 개방이다. ‘1,000(입장료)의 행복이다. 이글거리는 아지랑이가 가라앉는 듯하다.

덕수궁 풍경.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덕수궁 풍경.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두 차례나 왕위를 놓친 월산대군의 집터가 덕수궁
- 고종 대한제국 궁궐 덕수궁선택 석어당과 즉조당 한몫

본격적인 탐방에 앞서 덕수궁에 관한 프롤로그를 하자.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무엇일까. 대한제국 건립이 아닐까. 경운궁(덕수궁)은 대한제국의 황궁이었다. 황궁이란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비좁다. 또 궁궐 건축의 원리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전각 배치가 제멋대로다. 배후에 산이 없다.

세조->광해군 경운궁격상, 고종 덕수궁 개칭

이렇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갑자기 궁궐로 지정됐기 때문이다. 덕수궁은 원래 월산대군의 집터였다. 월산대군은 세조의 맏손자이자 성종의 형이다. 세조는 의경세자가 일찍 죽자 월산군을 세손으로 지명하지 않았다. 나이가 너무 여려서다. 대신 둘째 아들 해경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두 차례나 왕위를 놓친 월산대군에게 하사한 집터가 바로 덕수궁이다. 월산대군의 사후에도 왕족의 집터는 비어 있었다. 이를 선조가 임시 행궁을 사용했다.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난 갔던 선조가 한양으로 돌아왔다. 환궁할 궁궐이 없었다. 경복궁과 창경궁, 창덕궁이 모두 불탔다. 당시에는 정릉동 행궁이라고 불렸다. 이것이 광해군에 의해 경운궁으로 개칭됐다. 정식 궁궐 중 하나로 격상된 것이다.

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다시 궁궐로 사용하게 됐다. 순종이 1905년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왕위에서 물러난 고종을 위해 1907년 경운궁을 덕수궁으로 바꿨다. 덕수궁은 고종의 만수무강을 기원한다는 의미다.

덕수궁의 상징 대한문...본래 정문은 아니였다?

대한문.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대한문.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현재 덕수궁의 상징은 대한문이다. 대한문은 본래 덕수궁의 정문이 아니다. 동문이었다. 이름도 대한문이 아니라 대안문이었다. 위치도 지금의 자리가 아니다. 훨씬 도로 쪽으로 나와 있었다. 그것이 세종로 확장공사를 하면서 수십m 안쪽으로 들어간 것이다.

덕수궁 돌담길을 걸어 정동로터리쪽으로 걷다 보면 이질적 돌담이 나온다. 중화전의 대문이었던 중화문 자리다. 경운궁의 정전인 중화전의 정면에 있었다. 이질적 돌담 앞에는 운교표지판이 서 있다. 중화문을 폐쇄한 뒤 이곳에 운교(雲橋)’를 놓았다. 경운궁 건너편에 대한제국의 재정을 담당하던 탁지부(현재 서울시립미술관)가 있었다. 경운궁과 탁지부를 연결한 구름다리다. 아마도 운교 밖에 어딘가 정문(남문)인 인화문이 있었을 것이다.

왜 인화문이 아니라 대안문이 정문 역할을 하게 된 것일까. 대한제국 설립과 함께 경운궁은 황궁이 됐다. 하지만 행정의 중심기관인 육조 관아는 옛 궁궐인 경복궁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국정운영이 원활할 수가 없었다. 황궁과 육조 관아를 잇는 도로를 뚫었다. 또 황궁과 대한제국의 종묘인 환구단을 잇는 도로였다. 그게 바로 소공로다대한제국의 탄생과 함께 경성(옛 한성)의 도시구조가 완전히 바뀌게 된 것이다. 안창모 경기대 교수(건축학과)의 주장이다. 필자는 이 길이 일제에 의해 설계됐을 것으로 생각했다. 일제의 랜드마크인 조선총독부(철거)와 경성부청(현재 서울도서관)이 이 길에 있었기 때문이다.

광명문, 고종이 기거하던 함녕전으로 입구

함녕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함녕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대한문을 들어갔다. 오른편에 종전에 왔을 때 보지 못한 신축 건축물이 하나 있다. ‘광명문이다. 세종대왕 동상이 있던 자리다. 생각해보니 덕수궁을 돌아본 지가 10년이 넘는 듯하다. 덕수궁 복원사업이 시작되기 전이었다. ‘광명문은 바로 고종이 기거하던 함녕전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1919년 고종이 승하하자 국장 때 고종의 재관(梓宮)이 이 문을 통해서 나갔다. 그렇다. 생각이 난다. 광명문은 이 자리로 옮겨오기 전 중화문 자리 근처에 있었다. 일제가 고종의 흔적으로 지우기 위해 옮긴 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기억하는 광명문 주변에는 세종대왕의 흔적이 쌓여 있었다. 자격루, 측우기 등이 있었다. 아무런 연고가 없는 세종대왕 동상을 덕수궁에 세운 이유가 궁금하다. 덕수궁에 자격루는 또 웬 말인가.

중화전 대문.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중화전 대문.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광명문을 지나며 대한제국의 정전인 중화전이 나온다. 박석이 깔린 조정(朝廷)이 있다. 품계석이 어도를 따라 정연하게 늘어서 있다. 이곳에서 국가 의식이나 행사를 치렀다. 옛날에는 어도를 밟으면 곤장 80대를 맞았다. 결례를 무릅쓰고 어도를 밟고 중화전으로 다가갔다. 답도(踏道 : 계단)를 딛고 중화전에 올라섰다. 계단 한 가운데는 용이 새겨진 돌판이 있다. 다른 궁궐의 봉황과 다르다. 오른편에 입을 벌린 드무가 있다. 일종의 방화수다. 겨울에도 장작을 태워 얼지 않도록 관리를 했다. 드무에는 만세라는 글자가 보인다. 다른 궁궐의 드무는 천세(千歲)’란 글자가 쓰여 있다.

중화전...국가 의식이나 행사 치르던 장소

중화전에는 근정전(경복궁), 인정전(창덕궁), 명정전(창경궁), 숭정전(경희궁)보다 훨씬 노란색을 많이 썼다. 황색은 황제의 색이다. 황제국에서만 쓸 수 있는 단어, 문양, 색깔이다. 중화전 천장에는 황금색 용이 날고 있다. 답도에 용을 그린 것과 같은 이유다. 일본에 의해 실추된 국왕의 권위와 국격을 회복하기 위한 몸부림이 정전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눈썰미가 있는 독자는 궁궐의 정전에 ()’자가 공통으로 들어간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러나 덕수궁은 다르다. 중화전이다. 중화전이란 현판은 당시의 시대정신을 담고 있다. ‘중화중용에 나오는 표현이다. 서로 다른 성질을 가진 것이 섞여 각각의 성질을 잃거나 그 중간의 성질을 띤다는 의미다. ‘중화란 현판은 고종의 외교 노선인 중립국화와 맥이 닿아 있다. 열강의 간섭과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한 외교적 의지와 그 간절함이 배어 있다는 얘기다. 중화전은 1902년에 세워졌다. 고종의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는 칭경 행사를 위해서다. 당시에는 중층 구조의 장엄한 건축물이었다. 그런데 완공되자마자 덕수궁 대화재(1904)로 소실됐다. 궁핍한 재정으로 복층 재건은 하지 못했다.

돌로 지어진 서양식 건물, 석조전

석조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석조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중화전을 바라보고 왼편에 있는 석조전으로 자리를 옮겼다. 초록으로 덮인 등나무 아래를 지났다. 분수대도 지났다. 분수대에 물개 조각이 있다. 석조전 앞은 마치 공원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일제가 석조전을 미술관으로 개조하고 공원으로 만든 흔적이 아닐까. 어떻든 나무 그늘 밑에서 땀을 식히는 사람이 부럽다. 쉴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피서지는 없을 듯하다. 석조전 앞으로 다가가자 배롱나무가 빨간 꽃을 활짝 피우고 있다. 자태가 화려하다. 흰색의 석조전과 대조를 이룬다.

돌로 지어진 서양식 건물, 석조전은 근대국가의 위용을 드러내기에 손색이 없다. 육중하면서도 아름답다. 그렇지만 촘촘히 늘어선 열주는 그리스의 유산이다. 이것이 한국 고궁에 당당하게 서 있는 게 아무래도 이질적이다. 경운궁에는 정전이 중화전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유일하게 두 개의 정전을 가진 궁궐이 덕수궁이다. 나머지 하나가 바로 석조전이다. 대한제국 황궁의 제1정전이다. 1900년에 착공했다. 10년만인 1910년에 완공됐다.

고종은 서양식 정전 건축을 통해 서양 문명의 적극적 수용 의지를 밝힌 것이다.고종은 더 나아가 근대국가의 운영 능력도 과시할 기회로 삼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일이 꼬였다. 석조전 공사는 계획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기술과 자본이 부족했다. 부랴부랴 1902년 즉위 40주년 칭경 행사를 위해 중화전을 지은 것이다.

당시 대한제국은 열강의 이권 다툼, 한 가운데 있었다. 각축장이었다. 국가의 존립이 위태했다. 고종은 국가의 주권을 지킬 유일한 방법은 유길준이서유견문에서 제시한 중립화뿐이라고 생각했다. 칭경 행사를 통해 대한제국의 중립국화를 추진할 절호의 기회로 삼으려고 했다. 고종의 꿈은 깨졌다. 콜레라가 대유행했다. 거기다가 러일전쟁까지 일어났다. 즉위 40주년 행사조차 할 수 없었다.

근대식 카페정명헌과 서양식 연회 돈덕전

고종의 카페 정명헌.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고종의 카페 정명헌.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돈덕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돈덕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근대식 황궁임을 보여주는 것은 석조전만이 아니다. 일명 고종의 카페로 알려진 정명헌과 칭경 예식의 서양식 연회를 위해 건축한 돈덕전 등이 있다. 특히 정명헌은 현존하는 덕수궁 내 최고(最古)의 서양식 건물이다. 서양식과 한국 양식이 접목된 건축물로 화려한 난간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돈덕전은 최근에 복원된 화려한 유럽풍의 외관을 가진 건물이다.

이젠 덕수궁이 있게 한 모태 공간으로 간다. 석어당과 즉조당이다. 선조의 정릉동 행궁을 잊지 않기 위해 남겨둔 건물이다. 의주에서 돌아온 선조는 창덕궁을 중건했다. 그동안 머물렀던 곳이 바로 석어당이다. 석어당이라는 이름은 옛날 임금이 기거했던 전각이라는 의미다. 선조는 환도해서 승하할 때까지 16년간 어소로 사용했다. 그 시절을 아픔을 기억하기 위해 이 전각을 남겨뒀다고 한다.

석어당.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석어당.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즉조당.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즉조당.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다. 왕이 16년 동안 머문 전각인데 단청이 되어 있지 않다. 왜 그럴까. 원래 건물은 1904년 화재로 탔다. 중건한 뒤 가칠(假漆)을 하지 않았다. 석어당처럼 단청하지 않는 전각을 백골 집이라고 한다. 석어당을 지나면 즉조당이 나온다.

즉조당은 1623년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가 즉위식을 가진 곳이다. 즉조당이라는 이름도 그런 연유에서 붙은 것이다. 두 건물의 역사적 중요성을 인정해서 남겨놨기 때문에 고종 때 대한제국의 궁궐로 덕수궁이 선택될 수 있었다. 두 건물이 없었다면 궁궐이 되지 않았다. ‘국가적 위기를 극복한선조처럼 국난을 이기고(?) 굳건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의지가 담겼던 것은 아닐까. <계속>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