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태풍이 온다. 얼마나 더우면 피해가 발생할지 모를 태풍을 기다릴까. 덥다. 더워도 너무 덥다. 가중치를 매긴다면 요즘의 더위는 극염(極炎)’이다. 폭염(暴炎)과 혹염(酷炎)을 지났다. ‘극염의 날씨. 습도까지 높다. 최적 습도에서 습도가 10% 높아지면 체감온도는 1높아진다. 20일 서울 최고 기온은 36. 태풍 영향으로 습도는 70%. 체감온도는 거의 40에 육박할지도 모른다. 푹푹 찐다. 외출이 두렵다. 더욱이 아스팔트 열기를 뚫고 서울 도심을 걸어야 한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청계광장,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청계광장,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 차도 고층빌딩 사라진 곳, 바쁜 일상 지친시민 힐링의 공간
- 우리나라 사람보다 외국인이 더 많이 찾는 세계적 명소 거리

오후가 되도록 게으름을 피웠다. 애당초 중구에 있는 조선시대 관청 터를 둘러볼 예정이었다. 생각을 바꿨다. 청계천으로 가기로 했다. 청계천 다리 밑은 요즘 핫 플레이스다. 최고의 피서지다.

스프링조형물...그리고 최고의 피서지 된 청계천

도심의 청계천은 중구와 종로구를 가로지른다. 중구가 차지하는 영역이 얼마나 될까. 네이버 지식창의 도움을 받았다. 불과 2km 남짓이다. 청계천 광장부터 세운교까지다. 다리로 설명하면 22개의 다리 중 8번째까지다. 짧은 구간이다.

하지만 그곳에 잃어버렸던 청계천의 역사와 문화가 압축되어 있다. 청계천은 청계광장에서 시작된다. 하늘을 향해 휘돌아 올라가는 다슬기 모양의 조형물이 있다. 20069월 청계천 복원 1주년을 맞아 설치한 청계천의 상징물, ‘스프링이다. 클라에스 올덴부리 부부작품이다. 광화문 일대를 오가면서 수없이 봤다.

하지만 작가가 누군지도 몰랐다. 그의 작품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본 일이 더욱 없다. 올덴부리? 눈이 번쩍 띄었다. 꽤 오래전 이탈리아 밀라노 카도나 전철역 광장에서 보았던 그의 작품이 떠올랐다. ‘실과 바늘 그리고 매듭이었다. 이 작품을 보는 순간, 내가 패션의 메카인 밀라노에 와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역시 공공 설치예술작품의 핵심은 장소성이다.

그런데 스프링? ‘다슬기청계천이 무슨 연관이 있나. 연결되지 않는다. 작품 설명문의 도움을 받았다. “탑처럼 상승한 다슬기 모양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역동적이고 수직적인 느낌을 연출함으로써 청계천의 샘솟는 모양과 문화도시 서울의 발전을 상징하고 있다라고 적혀 있다.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순간, 탄성이 나온다. 작가의 상상력에 찬탄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다슬기에서 흘러나와서 청계천 인공폭포로 이어진 도랑이 인상적이다. 이 구불구불한 물길은 청계천 전체의 모형이다. 청계천은 600분의 1로 축소한 것이다.

청계천의 수원 삼청동천과 백운동천

청계천 풍경,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청계천 풍경,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본격적인 청계천 산책에 나섰다. 제일 먼저 분홍색 해치 인형이 탐방객을 맞는다. 웃고 있다. 눈인사라도 보내는 것일까. 계단으로 내려오자 청계천 폭포가 한층 시원하게 느껴진다. 사실 이 폭포수가 청계천의 수원(水源)’이다. 원래 청계천의 원류는 경복궁을 사이에 두고 좌우로 흐르는 삼청동천(중학천)과 백운동천이다.

백운동천은 옛 현대해상 광화문 사옥 골목, 삼청동천은 지금의 교보빌딩 뒤편으로 흘려 청계천에 합류한다. 모두 복개됐다. 그 흔적을 교보빌딩 옆에서 확인할 수 있다. 화단처럼 꾸민 개천이 바로 삼청동천을 재연한 것이다. 복개된 하천은 건천이 됐다. 청계천도 말랐다. 지하철에 나오는 지하수와 한강 물을 끌어와서 목마른 청계천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천변으로 가기 위해 계단을 내려왔다. 폭포가 콸콸 쏟아진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물줄기가 바람에 날린다. 물보라가 날리어 머리를 적신다. 쿨링 포그가 따로 없다. 시원하다. 불과 한 층 정도의 계단을 내려왔을 뿐인데 전혀 다른 세상이다. 차가 안 보인다. 높은 빌딩의 숲도 시야에서 거의 사라졌다. 대신 낭만적인 수변공간이 나타난다. 수로의 중간중간에 아름다운 다리가 있다. 걷는 동안 한순간도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바쁜 일상에 지친 시민에게 힐링의 공간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런데 한 여름의 청계천은 비어 있다. 인적이 많지 않다. 생각해보면 흐르는 물이 특별한 볼거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 뜨거운 뙤약볕에 맞설 용기를 낸 필자가 스스로 가상하게 여겨진다.

과일 팔던 거리....첫번째 다리 모전교와 광릉교

모전교,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모전교,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광통교,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광통교,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광교,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광교,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이런저런 상념에서 벗어날 즈음 청계천의 첫 번째 다리인 모전교에 도착했다. 다리 밑으로 들어서자 찬 바람이 불어온다. 전율이 느껴진다. 다리 밑에 앉아서 흐르는 물에 말을 담그고 있는 사람이 몇몇이 보인다. 우리나라 사람보다 외국인이 더 많아 보였다. 모전은 옛날 과일 팔던 거리다. 다리 모퉁이에 과일가게가 모여있어서 모전교라고 했다. 모전교는 일제강점기에 태평로와 무교동 거리를 신작로로 만들면서 이 다리를 철거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금 더 내려가만 두 번째 다리 광통교가 나온다. 광통교는 도성 내주요 도로를 잇는 가장 중요한 다리였다. 조선시대 궁궐에서 남대문으로 가는 통로(육조거리~황토현<세종로 네거리 일대>~운종로(종각)~광통교~남대문)였다. 당연히 도성에서 가장 큰 다리였다. 하지만 최초의 이 다리는 흙과 나무로 만들었다. 홍수가 나면 늘 무너져 내렸다.

태종 10(1410)에도 그랬다. 태종은 돌다리로 다시 만들었다. 당시에는 다리에 쓸만한 큰 돌을 구하기가 어려웠던 것일까. 태종은 태조의 계비였던 신덕 왕후의 무덤을 사대문 밖 정릉으로 옮기고 무덤의 석물을 다리 재료로 썼다. 일종의 사후 보수 성격도 배제할 수 없을 듯하다. 무덤을 지키던 돌을 백성이 밟고 지나도록 했으니 그런 오해를 받고도 남을 듯하다.

신덕 왕후는 자신의 소생에게 왕자를 물려주려고 했다. 이에 반대하던 태종 이방원은 두 차례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실권을 잡은 뒤 스스로 권좌에 올랐다. 정적이던 신덕 왕후가 사망한 뒤 그를 후궁으로 격하시켰다. 그리고 무덤을 이장했다. 거기서 나온 신장석(神將石)을 재활용해서 광통교를 다시 지은 것이다.

교대에는 신덕왕후 무덤 주위의 돌에 새긴 조각이 남아 있었다. 글씨와 당초와 구름 문양이 매우 정교하다. 그런데 글씨가 거꾸로 새겨진 돌도 보인다. 이방원의 원한을 새긴 것일까. 교각에는 여러 시기에 걸쳐 청계천을 준천한 기록이 새겨져 있다. 그 자체가 역사의 증언처럼 보인다.

역사의 이면을 읽을 수 있는 광통교. 원래는 이 자리에 있지 않았다. 한 칸 위에 있는 다리, 광교 자리에 있었다. 광통교의 석물이 훼손되는 걸 우려했다. 자동차 왕래를 할 수 있는 광교를 새로 놓은 것이다. 광통교 위로 자동차는 다니지 못한다.

정도대왕 능행반차도...기네스북에 오른 벽화

정조 행궁반차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정조 행궁반차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광교를 벗어나면 청계천의 모습이 조금씩 달라진다. 딱딱한 석벽과 돌길이 줄어든다. 인공의 떼를 조금씩 벗겨지는 것이다. 하천을 따라 자연이 보이기 시작한다. 다양한 나무와 풀이 우겨져 있다. 특히 냇가에 가지를 담그고 있는 버드나무들이 인상적이다. 버드나무 그늘에서 아이 팔뚝만 한 잉어가 떼를 지어 유영을 즐기고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작은 물고기 천지다. 새삼 청계천이 생태하천으로 되살아났음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필자는 청계천 복원을 추진하던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과 함께 복개된 청계천 안을 둘러봤다. 역겨운 악취가 나는 어둠을 잊을 수 없다. 그 냄새는 자연 파괴에 대한 복수처럼 느껴졌다. 복개천에서 나온 당시 이 시장은 암흑 같은 청계천에서도 똥 참외가 싹을 틔우고 있었다라며 감격해했다. 아마 지어낸 얘기일지도 모른다. 가능한 일도 아닐 것이다. 죽음에 이른 청계천을 자연으로 환원시키겠다는 생각에 환영을 봤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환영이 현실이 됐다.

광교를 지나면 기네스북 기록을 가진 벽화가 나온다. 바로 정조대왕 능행반차도다. 무려 5,000여 장의 도자타일로 만들어진 벽화다. 그 길이가 무려 186m에 이른다.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회갑을 기념하기 위해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광통교를 지난 화성으로 가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김홍도와 김득신, 이인문, 장한종, 이명규 등 동화서 화공 작품이다. 반차도 속의 의전 행렬에서 조선시대의 행차 격식, 복식과 악대 구성 궁중문화를 청계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청계천 수위를 측정하던 곳 수표교

장통교,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장통교,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수선전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수선전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장통교로 간다. 장통교는 광통교와 마찬가지로 한성의 지명에서 따온 이름이다. 장통교가 있는 지역은 장통방, 광통교가 있던 지역은 광통방이었다. 조선시대 수도의 한양의 행정구역은 552방으로 나뉜다. 이는 청계천 벽화 중 하나인 수선전도(김정호 제작)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수선(首善)’은 수도, 도읍을 뜻한다.

수표교에 이르렀다. 수표교는 광통교와 함께 한양도성에서 가장 유명한 다리다. 1420년에 축조된 수표교는 청계천의 수위를 측정하기 위해 수표가 있어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매년 큰비가 내리면 수표의 수위를 임금께 보고했다. 수표교는 지금 있는 22개의 청계천 다리 중 유일하게 나무로 만들어졌다. 그 이유는 본래의 수표교가 장충단공원으로 옮겨졌기 때문이다. 언젠가 원상 복구를 위해 나무로 만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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