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애잔함 전하는 흔적 남아⋯그래서 아련한 골목길 ‘정동’

[사진제공=중구청]
[사진제공=중구청]

[일요서울 | 김정아 기자] 세계의 메트로폴리스로 부상하고 있는 대한민국 수도 서울은 2000년의 유구한 역사를 품은 도시로 선사시대부터 현재를 망라한 시대별 유적과 유물이 발견돼 오고 있는 곳이다. 한강 물줄기를 품은 서울은 시대마다 위례성, 한산, 한성, 한양, 양주, 남경, 경성 등으로 달리 불리며 삶의 격전지이자 터전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지령 1441호부터는 수도 서울 탐방기와 연계 기사로 서울 구석구석을 들여다보며 독자에게 소개할 명소, 명인을 찾아 나서 보겠다.

근대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중구에는 역사와 문화가 살아 있는 현장을 대변하는 유적지가 잘 보존되어 있다. 과거 경운궁으로 지칭 됐던 덕수궁과 돌담길을 따라 이어져 있는 정동은 대한 제국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조선시대 고종의 거처였던 덕수궁은 1897년 러시아공사관에서 이곳으로 옮기면서 중화전을 비롯해 정관헌, 돈덕진, 즉조당, 석어당, 경효전, 준명전, 흠문각, 함녕전, 석조전 등이 지속적으로 지어졌다. 고종 재위 말년 약 10년간 정치적 혼란의 주무대가 되었던 장소로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됐다.

건물 배치는 정전과 침전이 있는 부분, 선원전이 있는 부분, 중명전이 있는 부분으로 크게 나뉜다. 궁의 중심이 되는 곳은 정전과 침전이 있는 곳으로 정전인 중화전이 남향, 중화문은 정남향, 인화문은 남향, 대안문은 동향, 생양문은 북향, 평성문은 서향으로 향해 있다. 

궁의 배치는 1904년 화재 후 서양식 건물들이 지어지면서 기존의 건물과 이질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기 시작했다. 후에 지어진 석조전 등 서양식 건물등이 기존의 정전 건물들과 축도 일치되지 않고 위치도 정전과 인접해 큰 규모로 지어지면서 궁궐의 공간적 규범을 깨뜨렸다는 말이 나왔다. 

덕수궁은 구한말의 역사적 현장을 대변하는 장소로 전통목조건축과 서양식의 건축이 공존하는 조선왕조 궁을 대변한다. 

▶정동 
19세기 후반 대한제국을 통해 부구구강병을 이루려 했던 고종의 야망이 살아 숨 쉬는 정동은 최초의 근대 교육을 꿈꾸던 아펜젤러가 머물렀던 곳이다. 그래서일까. 꿈의 흔적으로 남은 곳이라는 아련한 골목길이 된 정동길을 걷고 있노라면 아련한 마음이 어슴프레 올라온다. 궁궐과 빈민촌락이 공존했던 정동은 개화기 초 19세기 후반 크게 변모 됐다. 

한국전쟁으로 건물이 소실된 러시아 공사관 터는 현재 세월의 무상함을 느낄 정도로 애잔한 모습이다. 최초의 근대식 학교인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이 들어선곳으로 개화기 근대 문물이 가장 먼저 들어온 곳이다. 

현존하는 교실은 1915년 세운 이화박물관만 남아있다. 일제식 붉은 벽돌로 지어진 이 건물에는 100년도 더 이전에 교실에서 울고 웃던 여학생들이 사진이 아련하게 걸려 있다. 

▶정동 제일 교회 
1885년 미국인 목사 아펜젤러가 마련한 정동제일교회는 한국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교회 건축물이자 한국 기독교대한감리회의 대표적인 교회이다. 배움의 집, 무의촌 진료, 직장인을 위한 예배, 군선교, 방송선교, 미자립교회 보조, 해외선교사 파송 등 여러 선교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약현 성당
중구 중림동에 있는 약현성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벽돌조 고딕성당으로 1892년 지어졌다. 1891년 박해가 끝나고 교회의 전통에 따라 서소문 성지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고 그 정신을 본받기 위해 약현성당을 세웠다. 한국 근대 건축사의 중요한 의의를 지녀 건축된 이후 한국 교회건축의 본보기가 되었다. 현재 건물은 1998년 화재로 훼손되었다가 복원 공사를 거쳐 완성된 것이다.

▶을지로 골목
낮과 밤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을지로의 대표골목이다. 한산한 낮과 달리 퇴근시간이 되면 북적거리며 한국의 옥토버페스트라는 별명도 붙었다. 직장에서의 스트레스를 날리듯 시원하고 톡 쏘는 생맥주, 세상만사 잊게 하는 남을지로 노가리 골목. 쓰면서도 달콤한 소주의 단짝인 노가리로 오랜 시간 을지로의 밤을 화려하게 빛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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