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1일이다. 9일 만에 정동길을 다시 왔다. 필자가 다녀왔던 지난 22()은 정동길에 새겨진 대한제국의 기록은 볼 수 없었다. ‘대한제국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는 덕수궁 중명전(아관파천), 덕수궁 석조전(대한제국 역사관), 그리고 배제학당역사박물관, 심슨기념관(이화학당) 등이 휴관이었다. 거기다가 정동제일교회에서 만난 억수 같은 비도 발길을 잡았다휴관으로 관람하지 못한 중명전부터 다시 탐방을 시작한다.

중명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중명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덕수궁 중명전(아관파천),석조전(대한제국 역사관), 그리고 배제학당역사박물관
- 최초 신식결혼식장이자 구국운동 터전...정동제일교회


정동극장 옆 골목을 들어가면 중명전보다 더 유명한 식당이 있다. ‘정동 추어탕이다. 사실 필자도 중명전보다 정동 추어탕을 훨씬 자주 찾았다. 바로 코앞에 있는 역사를 못 본 채 한 필자가 부끄럽다. 불과 30m도 안 되는 거리인데. 부끄러움이 몰려온다. 달랑 건물 하나 서 있는 중명전의 황량함 때문은 아니다. 북적이는 식당과 달리 한산한 중명전을 보면서 죄책감을 느낀다. 그것은 중명전이 바로 우리 근대사를 바꾼 역사의 현장이어서 더 그렇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됐던 역사적 장소다. 을사늑약으로 일제에 외교권을 박탈당했다. 사실상 식민지로 추락하는 신호탄이었다.

을사늑약 체결됐던 역사적 장소...중명전

재연된 을사늑약 체결현장.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재연된 을사늑약 체결현장.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중명전내 고종어보 전시물.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중명전내 고종어보 전시물.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대한제국문장.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대한제국문장.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중명전에는 그 기록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을사오적과 이토 히로부미의 늑약 체결 현장이 재연되어 있다. ‘을사늑약문도 비치되어 있다. 늑약 체결에 끝까지 반대했던 한규설 참정대신에 대한 설명을 읽으면서 뭉클한 마음이 든다. 을사늑약 무효화를 위해 파견된 헤이그 특사 활동도 볼 수 있다. 왜 여기에 헤이그 특사 전시가 있냐고? 이곳이 바로 고종이 헤이그 특사 파견을 결정한 장소다. 특사 파견은 대한제국의 주권 회복을 위한 고종의 마지막 승부수이자 몸부림이었다.

헤이그 특사를 이곳에서 파견했다면 이곳이 고종의 집무실(편전)이라는 얘기 아닌가. 왜 덕수궁의 귀퉁이에 있는 이곳을 편전으로 사용한 것일까. 이유가 있다. 고종이 대한제국의 정궁으로 덕수궁을 사용한 뒤 두 차례나 큰불이 났다. 고종은 1904년의 화마 피해를 받지 않은, 왕실 도서관인 수옥헌(漱玉軒)으로 옮겨왔다. 거의 2년 동안 거처했다. 집무실 겸 외국사절 접견실로 사용했다. ‘작은 정전(正殿)’이었다. 그래서 수옥헌에서 중명전으로 이름도 바뀌었다. 전각의 위상(殿)이 격상된 것이다.

전시실을 둘러보고 나오는 걸음은 착잡했다. 뒤를 돌아봤다. ‘重眀殿이라고 쓰인 현판의 글씨가 생소하다. ‘밝을 명()’이 아니라 밝게 볼 ()’이다. 왕이 정치를 함에 있어 혜안을 갖고 하라는 뜻일 것이다. 현판은 당시의 시대 상황을 반영한다. 重眀殿에서 국치가 시작됐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콜로니얼 건축양식중명전 변형된 서양양식

들어갈 때보다 나올 때 더 잘 보이는 것일까. 사방을 둘러싼 베란다가 보인다. 안창모 명지대 교수가 쓴 덕수궁-시대의 운명을 안고 제국의 중심에 서다라는 책이 생각난다. 안 교수는 중명전 건축양식에 대해 전통 서양 건축양식은 베란다가 없다라면서 식민지 지배하던 고온다습한 동남아시아에 적용된 변형된 서양건축 양식이라고 밝혔다. 이를 콜로니얼 건축(Colonial architecture)양식이라고 한다. 중명전의 건축양식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일본을 거쳐 들어온 게 아니라는 얘기다. 뒤집어보면 일본의 야욕을 막아보려는 대한제국의 피눈물 나는 노력의 일단처럼 보인다.

정동제일교회.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정동제일교회.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정동극장을 지나 정동 로타리에 도착했다. 덕수궁의 돌담길과 만나는 지점에 정동제일교회가 있다. 한국 기독교 역사가 시작된 역사적 공간이다. 아펜젤러는 1885년 부활절(45)에 조선에 도착했다. 그해 109일 외국인을 대상으로 첫 성찬 예배를 봤다. 정동제일교회의 출발이었다. 한국 기독교는 그날을 한국 교회가 뿌리를 내린 날로 기념하고 있다. 정동제일교회를 한국의 어머니 교회라고 부르는 이유다. 어머니의 역할은 이어졌다. 기독교 잡지(‘교회’)와 주일 성경 학교를 처음 만들었다. 최초의 신식 결혼식장이기도 했다. 교회당으로 들어가는 계단 위에 서 있는 하얀 탑(100주년 기념탑)의 색이 발해있다. 오래된 정동제일교회 역사의 숨결과 마주하는 듯하다.

이승만 전대통령 유창한 영어연설..정동교회

시간의 흔적을 직접 접할 수 있는 유적은 입구에서 들어가면 오른편에 있는 고딕풍의 붉은색 벽돌 건물이다. 유럽의 교회와는 다르다. 건물의 육중함이나 화려함은 없다. 소박하다. 장식도 없다. 고딕 양식임을 확인할 수 있는 기둥 위의 뾰족한 철탑과 창문뿐이다. 한국화된 고딕 양식의 건축물이라고 할까. 하지만 이 건물은 지어질 당시(1895)에 장안의 화제가 됐다. 구경꾼이 몰려들었다.

열강의 침탈이 본격화될 때, 정동제일교회는 구국운동의 터전이 됐다. 정동교회는 처음부터 배제·이화학당과 한 몸이었다. 배제·이화학당 졸업식도 정동제일교회에서 열렸다.
 

정면에서 본 정동제일교회.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정면에서 본 정동제일교회.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3회 배재학당 졸업식 때 한 학생이 졸업식 답사를 했다. 유창한 영어로 했다. 그가 바로 이승만이었다. 그의 스승은 서재필이었다. 윤치호·김규식·신흥우·유관순·김활란·박정동(박에리사) 등 수많은 애국지사와 선각자가 함께했다. 이필주 목사와 전도사 박동완은 3·1독립선언 33인 민족대표로 참여했다. 정동제일교회가 바로 독립선언문을 등사한 곳이기도 하다. 아마도 이 목사와 박 전도사의 역할이 있었을 것이다. 이를 기념하는 조형물(한복을 입은 여학생이 등불을 비춰주고 독립선언서를 등사하는 모습)이 정동제일교회 인근 배제어린이공원에 있다.

정동은 외래종교의 유입지였다. 러시아 정교, 성공회, 개신교의 첫 번째 교회가 정동에 들어섰다. 선교기지를 만들기 위한 사전 작업이 이뤄졌다. 의료와 교육이다. 정동제일교회를 만든 아젠펠러는 미션스쿨, 배재학당을 1885년 설립했다.

신교육의 발상지...아펜젤로 세운 배재학당

정동어린이공원 바로 옆에 아펜젤러기념공원이 있다. 공원에는 붉은색 벽돌의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이 있다. ‘신교육의 발상지인 배재학당(동관)이다. 학교용 시설이 건설된 곳에 그대로 남아 있는 유일한 건물이다. 지금은 배재학당역사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 건물은 1916에 완공됐다.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배재학다아역사박물관 전시실 내부. ​아펜젤러 동상.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배재학다아역사박물관 전시실 내부. ​아펜젤러 동상.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배재학당은 1885년 정동제일교회를 설립한 아펜젤러가 세웠다. ‘학당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는 면목이 없다. 지금 기준이라면 과외라는 말이 더 적합할 듯하다. 개교하던 해, 재학생은 2명이었다. 아펜젤러는 통역관이나 선교사를 양성하려는 게 아니다라면서 자유 교육받은 인재를 키우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듬해인 1886년에 고종이 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이 덕분이었을까. 학생이 10명으로 늘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학생은 늘었다. 드디어 주민의 집을 사들여 교사를 짓게 된 것이다. 주시경·김소월·신봉조·나도향·오긍선·이중화·강매·신흥우·지청천·이승만 등이 배제가 배출한 선각자다.

바다 빠진 여성 구하려다 목숨 잃은 아펜젤러

아펜젤러 동상.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아펜젤러 동상.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들어갈 때 본 아펜젤러 동상 앞으로 갔다. 동상 받침대는 배 모양이다. 아펜젤러는 책을 읽고 있다. 그는 40세 때 군산 앞바다에서 물에 빠진 여성을 구하려다가 목숨을 잃었다. 동상 받침은 침몰한 배를 형상화했다. 아펜젤러기념공원 한편에 독립신문서터라고 쓴 표지석이 보인다. 이곳이 1895년에는 독립협회가 태동하였고 독립신문도 발간한 곳이었다.

다시 정동로타리로 나왔다. 담쟁이덩굴로 덮인 건물이 나온다. 빌딩 신아. 신아일보 본사가 될 뻔한 건물이다. 고풍스러운 외모와 달리 이 건물은 상대적으로 연식이 깊지 않다. 1881년에 지어졌다.

신아빌딩.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신아빌딩.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이 건물이 역사의 거리에 잘 어울리는 이유가 있다. 철거된 고건축물에서 수거한 폐벽돌로 지은 건물이다. 장기붕 전 신아일보 사장의 뜻이었다고 한다. 정동길에 있는, 폐자재로 지어진 유일한 건물이다. 신아일보사 신사옥으로 지은 건물이었다. 하지만 1982년 언론 통폐합되면서 강제로 문을 닫아야 하는 바람에 신아일보 사옥으로 사용되지 못했다. 지금은 신아라는 건물 이름만 남아 있다.

정동길 폐자재로 지은 유일한 건물 신아빌딩

정동길 걷는 사람들.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정동길 걷는 사람들.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정동로터리에 오가는 사람이 많다. 얼굴도 밝고 활기차다. 마치 어둠 속에서 광명의 세계로 나온 기분이다. 그런데 이제 정동의 마지막 코스인, 대한제국의 본령인 덕수궁으로 간다. ‘고종의 길을 통해서 간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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