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에서는 석영서의 보고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허위 장계를 올렸다고 파직을 시켜버렸다. 해월은 그 다음날 목을 매 자결했다. 

새로 포도대장이 된 백인추(白仁秋)는 흑장 유령을 반드시 잡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그는 우선 지하도를 면밀히 수색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하도에는 여전히 아무런 단서가 보이지 않았다. 백인추가 초조함을 느끼기 시작하게 되었을 때 포도청으로 편지가 한 장 날아왔다. 누가 어디서 가져온 것인지 모르는 것이었다. 백인추는 겉봉을 열었다.

포도대장 백인추 상전 돈수하고 아뢰옵나이다.
제 편지를 받으시면 무척이나 놀라실 거라 생각됩니다만 이제 흑장 유령이 다시 세상에 나타날 일은 없을 것이오니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 편지를 써놓고 자결을 할 작정입니다. 처를 빼앗기고 죽은 사람으로 세상에 남아있으니 제가 더 살 명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유령이 아니고 인간 옥채유 입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죽은 해월의 남편이었습니다. 석영서는 저를 죽이라고 명하고 제 목을 자른 칼을 바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쉽게 목이 잘릴 수가 없었습니다. 

저를 죽이러 간 포졸들은 저를 형으로, 스승처럼 섬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칼로써 자기의 팔을 죽 그어 피를 묻히고는 저더러 달아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피가 묻은 칼을 바쳐서 석영서를 속였고 저는 산 속으로 달아났습니다.

그리고 4년 동안을 열심히 검술을 연마했습니다. 제가 주로 있던 곳은 포청의 서고였고 거기에는 각종 무술 비서들이 있었기에 저는 틈틈이 그 책들을 읽고 무술을 연마했습니다. 
제 목숨을 구해 준 포졸들도 제게 무술을 좀 배웠습니다. 하지만 저는 본래 근본이 책상물림이라 무술의 진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이 이런 시련을 내려 저는 무술연마에만 혼신의 힘을 쏟아 부어 마침내 대성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하늘이 저를 돕느라 석영서는 해월을 유진사댁에 두었습니다. 저는 포청의 문서 중에서 유진사댁 지하도를 본 적이 있습니다.

저는 산에서 내려와 해월의 행방을 알고는 바로 그 문서를 포청의 서고에서 춤쳐 냈습니다. 세상에 알려진 지하도의 규모는 이 문서의 백분의 일도 되지 않습니다. 이 지하도는 삼국시대로부터 내려오는 것이라고 하며 본래 자연적인 지하 동굴에 여러 가지 장치를 덧붙인 것이라 합니다.

여기에는 기구와 장치들이 있어서 겉으로는 알 수 없지만 장치를 가동시키면 통로가 열리도록 되어 있기에 제가 들고날 때 마치 유령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저 역시 첫날 그 지하도를 들어갔다가 백발의 노인을 만나 유령이 나타난 줄 알고 간담이 서늘해진 적이 있습니다. 이 백발노인이 석영서가 잡았다는 유령인데 저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지하도에서 저를 만나 깜짝 놀란 백발노인은 도망치다가 돌아서서 저와 몇 합을 겨루었는데 그 칼솜씨로 볼 때 왜인이 틀림없어 보였습니다. 

백발노인은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출병했던 왜병인데 낙오해서 섬나라에 돌아가지 못하고 이 지하도에 숨어들어와 이 집 저 집을 드나들며 먹을 것, 입을 것을 훔쳐서 연명해왔습니다.

이 때문에 유진사댁에도 귀신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고, 헐값에 집을 내놓고 말았던 것입니다. 석영서는 이런 사실을 알고도 별로 괴의치 않고 집을 사들였습니다. 저는 첫날 먼저 석영서를 찾아가 불시에 일검을 날렸는데 석영서가 재빠르게 피해 어깨에 가벼운 상처를 주는데 그쳤습니다. 기습이 실패하면 포졸들에게 포위를 당할 우려가 있어서 저는 그 집을 빠져나와 해월의 집으로 행했습니다. 

그곳에서 경고의 의미로 해월의 몸종 둘을 잡아다가 옷을 벗기고 벽장 속에 넣었습니다. 해월에게 파렴치한 행동을 경고하는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늙은 왜놈이 좀도둑질을 하려고 벽장으로 들어왔다가 음욕이 발동해서 한 계집종은 죽이고 다른 계집종은 데리고 지하도로 들어간 것입니다.

욕정을 채우고는 역시 잔인하게 죽여버렸습니다. 그것을 알고 저는 백발 왜놈을 만나는 대로 죽인다고 이를 갈았는데, 어찌나 교묘히 지하도를 숨어 다니는지 좀체 잡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저는 계집종들이 죽은지도 모르고 해월을 응징하고자 해월의 방 앞에서 오락가락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별안간 해월이 고함을 지르며 뛰쳐나와 저 역시 놀라고 말았습니다. 아차하는 사이에 해월은 포졸의 방으로 뛰어 들어가 예기치 않게 칼을 섞게 되었습니다. 이 사내의 창 솜씨는 예사가 아니라 어깨에 상처를 입고 말았습니다. 저는 며칠을 상처를 치료하고 한편으로는 백발 왜놈을 쫓았습니다.

다급해진 백발 왜놈은 집으로 뛰쳐 들어갔다가  포졸들에게 잡힐 뻔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전화위복이라고나 할까, 그 사건으로 석영서가 해월의 집으로 들어와 앉은 것입니다

. 저는 먼저 백발노인을 잡아 내력을 캐물어보고는 다라났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죽여 버렸습니다. 40여 년을 말을 해 보지 못했다고 하니 기가 찰 노릇이었습니다. 저는 이 자를 우물터 입구에 반쯤 걸쳐놓고 포졸의 목소리를 흉내 내 흑장 유령이 이곳에 나타났다고 포졸들을 따돌렸습니다. 

포졸들은 이미 죽은 시체에 다시 도검을 꽂은 다음에야 다가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다음에 저는 석영서와 대결을 해서 그에게 모욕을 주었습니다. 벌거벗고 떨고 있는 그를 보며 통쾌하게 웃었습니다. 제 복수는 그것으로 족했습니다. 저는 살인마도 아니고 무뢰한도 아닙니다. 나리께서는 저처럼 억울한 사람이 다시는 나오지 않게끔 나라를 잘 보살펴 주시기를 엎드려 비옵나이다. '옥채유 근계'

[연재 끝]

[작가소개] 권경희는 한국 여류 추리작가이다. 1990년 장편소설 '저린 손끝'으로 제1회 김내성 추리문학상을 수상하고 문단에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 장편 추리소설 '거울 없는 방', '물비늘', 실화소설 '트라이 앵글', 단편으로 '검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등 수십 편이 있다. 수필집 '요설록', '흔들리는 삶을 위한 힌트'등이 있다. 중견 소설가이면서 상담심리 전문가로 <착한벗 심리상담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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