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이 이런 이야기를 하며 거의 자정이 지나도록 자지를 못했다. 해월이 잠깐 눈을 붙였는가 싶었는데, 석영서가 그를 흔들었다.
“여봐. 자지 말아...”

석영서는 어딘지 모르게 허전하고 약간 무서운 생각이 들어서 해월을 깨운 것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나으리.”
해월은 눈을 가늘게 뜨고 석영서의 어깨에 하안 손을 올려놓으며 생긋 웃었다.
“잠이 오시지 않습니까?”

“흥, 남의 아내를 뺏은 사람이 잠이 올 리 있어!”
난데없는 소리가 벽장에서 튀어 나왔다. 이어 드르륵 문이 열리며 흑장유령이 나타났다.
“으악!”

해월은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며 석영서의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석영서는 얼마를 정신없이 떨다가 머리맡에 놓인 장창을 휙 잡고는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귀신이냐? 사람이냐?”
“흥, 나리께서 죽였는데도 나타나는 걸 보시면서 그렇게 묻는 것은 어리석은 말씀이 아닙니까?”
흑장 유령은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래 좋다. 옥채유, 귀신이라도 좋다. 그런데 여기는 무엇 하러 왔느냐?”
이때 밖에서 나졸들이 무어라고 떠들며 대문께로 달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에잇! 이 귀신같은 인간!”
석영서는 미친 듯이 창을 휘둘렀다. 
“천만에! 귀신같은 사람이 아니고 사람 같은 귀신이올시다.”
흑장 유령은 여유 있게 창을 피하며 칼을 쑥 뽑았다. 해월이 겁에 질려 마당으로 뛰어 나갔다.

“여기선 비좁을 테니 마당으로 나왓!”
석영서도 마당으로 뛰어나가며 소리를 질렀다. 그들은 마당에서 칼과 창의 불꽃 튀는 싸움이 벌어졌다. 
석영서는 흑장 유령의 주위를 돌며 빈틈을 노렸으나 여의치 않았다. 돌연 흑장 유령이 칼을 번쩍 치켜들었다. 석영서는 이때다 싶어 힘껏 가슴을 향해 창을 내질렀다. 그러나 창대가 댕강하고 떨어져 나갔을 뿐이었다. 

이상한 것은 나졸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석영서는 부러진 창대를 오른손에 잡고 왼손으로 허리춤을 뒤졌다. 하지만 자다 일어난 터에 칼이나 표창이 있을 턱이 없었다. 창날도 없는 봉으로 흑장 유령의 칼을 피하기에 급급할 수밖에 없었다. 흑장 유령의 칼이 현란하게 춤을 추며 석영서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쫙 하고 옷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옷고름이 떨어져 나가는가 싶더니 어느덧 칼이 겨드랑이 밑을 훑고 지나가고, 다시 팔소매를 베어 버렸다. 하지만 살에는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이렇게 칼날이 서너 차례 석영서 몸을 훑고 지나가자 석영서는 알몸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흑장 유령은 대항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는 석영서를 앞에 두고 통쾌하게 웃더니 그림자처럼 사리지고 말았다. 
석영서가 미처 방으로 들어가지도 못했는데, 나졸들이 뛰쳐 들어왔다. 유령을 잡았다고 야단이었다.

잡았다는 유령은 육십 여세의 노인이었다. 머리와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란, 정말 유령같은 노인이었다. 그러나 이미 죽었기 때문에 아무런 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분명 얼굴을 보건대 옥채유가 아닌 것이 틀림없었고, 입고 있는 복장도 흑장이 아니라 여자의 옷을 입고 있었다. 사내가 여자 옷을 입고 있는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었다. 이 노인이 우물터에서 나오는 것을 순라를 돌던 나졸이 발견했고 모두가 쫓아가 창칼을 던져 잡은 것이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흑장 유령이 잡혔다는 것을 인정해 주지 않았다. 오히려 포도대장이 홀랑 벗고 있었던 것이 흑장 유령에게 당한 때문이라고 고소해 하는 판국이었다.

[작가소개] 권경희는 한국 여류 추리작가이다. 1990년 장편소설 '저린 손끝'으로 제1회 김내성 추리문학상을 수상하고 문단에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 장편 추리소설 '거울 없는 방', '물비늘', 실화소설 '트라이 앵글', 단편으로 '검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등 수십 편이 있다. 수필집 '요설록', '흔들리는 삶을 위한 힌트'등이 있다. 중견 소설가이면서 상담심리 전문가로 <착한벗 심리상담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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