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 경감이 놀라 문을 쾅 닫는 바람에 그들이 깼다.
“누구세요?”
조준철의 목소리였다.
“나야. 병태.”
추경감이 대답을 했다.
“응? 영도? 박영도가 웬 일이야.”

조준철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영도라는 친구가 있는 모양이었다.
곽 경감은 속으로 웃었다. 자기를 모두 곽 경감이라고 부르지 그의 이름이
광영도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흔하지 않았다.
“박영도가 아니고 곽 영도요. 곽...”
“예, 곽 경감님이시군요. 하하하..."
조준철의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렸다.
“잠깐만요.”

뒤이어 나봉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금 있다가 문이 열렸다. 나봉주는 어느새 스웨터까지 입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나봉주가 일어서면서 말했다. 얼굴이 상기되고 어딘지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이거 달콤한 데이트를 방해한 셈이군.”
곽 경감이 멋쩍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봉주가 갑자기 올라와서... 하지만 경감님도 눈치 깨나 없군요. 하하하... “
조준철이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뭐? 여자가 올라갔다고?”

“아니참 여자가 어디를 올라가요 올라가긴...”
세 사람이 한바탕 웃었다. 나봉주는 얼굴이 빨개져 고개를 무릎에 묻고 웃음을 참았다.
“그 숫자가 말이야.. 트럭 번호가 맞는 것 같아. 내가 강형사에게 어떤 트럭인지 좀 알아 가지고 오라고 했지.”

곽 경감이 어색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고 얼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 트럭을 찾아서 거기서 어디로 무슨 물건을 싣고 갔는지 알아내면 되겠군요.”
“틀림없이 인질들을 딴 곳으로 싣고 갔을 거야.”
“장소를 알아낸 뒤에 혼자서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사이 나봉주가 밖에 나가 소주 한 병과 간단한 안주를 사가지고 들어왔다.

61. 비서실의 정사

그들은 나봉주가 별다리 마을에서 알아낸 이야기를 들으며 각자 조은하 살인범을 추측하기에 바빴다. 나봉주는 계속 40대 의문의 사나이는 범인이 아닐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었다.
“어쨌든 한 남자가 한 여자만을 생각하고 청춘을 다 보냈다는 것은 우리 시대의 감동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지 않아요?”

나봉주가 정말 감격스러운 얼굴을 하고 말했다.
“20여 년 동안 한 번도 찾지 않다가 자기가 출세하니까 옛 애인을 찾아갔다는 것은 어쩐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지 않아요? 만약 진짜 맹목적인 사랑이라면 사랑 앞에...”
“지금 사랑에 대한 정의를 내리려는 거야?”
곽 경감이 두 사람의 말을 막았다.
“짝사랑으로 말한다면 그 별다리의 고문직 교장도 한몫 껴야할 걸... 내가 보기에는 그 사람도 조은하씨를 꽤 짝사랑한 것 아닌가 싶던데 그려...”
곽 경감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게 못 잊을 사랑을 다시 찾았다면 두 사람은 자기의 인생을 다시 설계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두 사람 다 미혼이었으니까 결혼해도 되는 일이고...”
“조은하가 데리고 있던 소년은 정말 누구지?”
곽 경감이 조준철을 쳐다보았다.

“누군지 나도 몰라요. 그러나 누나의 친자식이 아닌 것만은 틀림없어요.”
“나봉주씨의 말이 맞아. 두 사람은 얼마든지 새 출발할 수 있는 여건을 가지고 있었어. 그런데 죽인단 말이야?”
조준철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종서 차관이 조은하씨를 죽였을 확률은 희박하다고 보아야지요. 내 생각에는 조은하씨가 분명 재야 어느 과격 단체가 주도하는 반정부 음모 같은데 가담을 했을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희생된 것이라고 보아야지요. 반정권 운동을 하다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사람이 이 정권 수립 후 얼마나 많았습니까? 조은하씨도 그 희생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렇게 무리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나봉주의 말에 한동안 아무도 반대 의사를 제기하지 않았다.
“현지 경찰의 공식적인 수사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조준철이 곽 경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경감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천천히 입에 물었다. 그러나 철거덕거리기만 하는 지포 라이터는 꺼내지 않았다.
“내가 내일 하영구 경감에게 전화를 걸어서 한번 물어 보기로 하지. 그건 그렇고...”
그는 한참 만에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린 가든에서 사라진 자들은 지금 어디에 숨어 있을까? 그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나는 경찰청에 돌아 갈 수도 없고 수배 명단에서 빠지지도 않는 영원한 도망자가 된단 말이야...”
곽 경감이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김교중 총리실에서는 새벽 3시가 되도록 은밀한 회의가 계속되었다.
참석자는 총리를 비롯해 정일만 국방, 성유 내각 정보국장, 조민석 육군 참모총장, 변일근 특수여단장, 그리고 김영기 총리 비서실장 이렇게 여섯 명이었다.
이 나라에는 23명의 국무위원이 있지만 대통령을 중심으로 실제 나라를 이끌고 가는 핵심 인물은 이 사람들이라고 봐야할 정도였다. 권력의 90퍼센트 이상을 이 사람들이 쥐고 있었다.
“각하의 최종 결심을 얻어야 합니다.”
 

[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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