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 독재 정부를 무너뜨리고 이 땅에 진정한 민주 독립 정부를 세우는 길은 이 방법밖에 없었어.

당신들 목에 칼을 들이대지 않으면 정권 내놓겠어? 우리가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썼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야. 그리고 국민들은 막 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알지 못할 거야. 독재자들은 여편네 목숨 하나 건진 것을 감지덕지 하고 쉬쉬하며 권좌에서 물러서지 않을 수 없을 거야.”

“하지만 그렇게 당신 뜻대로 되지는 않을 걸. 당신도 소위 독재 정부의 장관이 아니오?”
“하하하... 그야 그렇지. 그래서 당신 상전들이 일괄 사표를 내고 적어도 겉으로는 자연스럽게 권좌에서 물러간 뒤 임시 과도정부가 세워 질 것이오. 그때 사람들은 평생 민주주의를 위해 싸워 온 나를 과도 정부의 수반으로 추대하게 될 거야. 이제 어떻게 돌아가게 될 것인지 알겠소?”

“정말 어리석은 망상이군.”
서차관이 코웃음을 쳤다.
“두고 보면 알게 될 거요. 우리들은 이미 독재 정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정부를 만들어 놓고 있었거든.”

“저런 배신자가 정부 속에 있었으니 정부의 비밀이 새 나가지 않을 수 있었겠어?”
조준철도 한마디 거들었다. 곽 경감은 정채명의 엄청난 음모를 듣고는 가슴이 뛰어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그의 음흉한 반란이 성공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질이 다시 두 명 더 늘었군. 내무 차관까지 자진해서 우리 쪽으로 왔다고 정부 쪽에 알릴까요?”

백성규가 정채명을 보고 말했다.
“다른 인질들은 모두 어디 있지요?”
정채명이 총을 든 청년들을 보고 물었다.
“저 안에 있습니다.”
젊은이가 그들이 나온 문을 가리켰다.
“일단 그 곳으로 들어가지.”
정채명의 말이 떨어지자 그들이 서종서와 조준철을 앞장 세웠다.
“당신들은 일이 끝나고 새 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좀 숨어 있어야 겠는걸.”

백성규의 혼잣말이었다. 곽 경감은 저들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차 있었다. 그의 눈에 얼른 띤 것은 빨간 색의 소화기였다. 소화기가 눈에 들어오자 화재경보기 생각이 났다. 마침 화재경보기 스위치는 계단 밑 곽 경감이 숨어 있는 눈앞에 있었다.
곽 경감은 이때를 놓쳐서는 일생 후회하면서 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화재경보기 스위치를 힘껏 눌렀다.
“따따르르릉...”
벌떼가 수만 마리 덤벼드는 것 같은 요란한 경보음이 지하실 벽을 뚫을 것 같았다. 평생에 그처럼 시끄러운 소리는 처음 들었다.
“이게 뭐야!”

백성규가 놀라서 소리를 질렀으나 그 음성은 요란한 경보음에 묻히고 말았다. 정채명 장관이나 총을 든 청년 두 명도 놀라서 돌아섰다.
그때였다.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곽 경감은 빨간 색의 소화기 한 대를 집어 들고 일행이 서 있는 지하실 한복판으로 집어 던졌다. 그리고 남은 소화기를 재빨리 거꾸로 세우고 소화 분말을 뿜기 시작했다.
“준철아 빨리 피해라!”

곽 경감이 소화기로 허연 분말을 뿜어 대면서 소리를 질렀다. 곽 경감은 권총을 든 두 청년의 얼굴에도 분말을 쏘았다.
“으악! 이게 뭐야?”
기습을 당한 청년이 미끄러지면서 소리를 질렀다. 그 틈에 조준철은 곽 경감이 집어던진 소화기를 재빨리 집어 들고 남은 청년에게 물총처럼 쏘기 시작했다.
“탕!”

당황한 청년이 권총을 쏘았다. 그러나 그 총소리도 경보음이 삼켜 크게 들리지 않았다.
“저기다!”
그때 계단 위에서 요란한 발자국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곧 이어 수십 명의 무장 군인들이 밀려 내려 왔다.
“탕! 탕!”

몇 방의 총소리가 들렸다.
“꼼짝 마라!”
휴대용 마이크에서 위협적인 말소리가 들렸다. 이어 지하실에 빽빽하게 군인들이 들어찼다. 그들은 모두 기관총이나 M16 같은 무기를 들고 방탄 조끼를 입고 있었다. 무력 폭동이나 인질극을 벌이는 무장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특수 훈련을 받은 병력 같았다.

그들은 천사 유치원 작전을 위해 이 청산빌딩 1층에 진입해 있던 병력이었다. 천사 유치원 작전이 허탕으로 끝나자 막 철수하려고 했을 때 화재 경보기가 울렸던 것이다.
그들은 곧 두 청년의 권총을 빼앗고 그들을 결박했다. 그리고 백성규와 정채명, 서종서, 조준철, 그리고 곽 경감이 꼼짝 못하게 양팔을 붙들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나는 내무 장관 정채명이다. 이거 놓아!”
정채명이 군인들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군인들이 주춤해졌다.
“나는 내무 차관 서종서다. 저자는 반역자이니까 놓아주면 안 된다.”
서차관이 소리를 질렀다.
“맞아요. 우리는 저 정채명 장관과 이 사람들이 인질로 잡고 있는 국무위원...”
“그만.”

그때 서 차관이 조준철의 입을 막았다.
“저기 있는 분은 서울 시경의 곽영도 경감이랍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이 저지르고 있는 나쁜 짓을 캐내려고 온 사람들입니다.”
조준철이 다시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어느 까마귀가 암까마귄지 알 수가 있어야지. 모두 본부로 연행한다.”
 

[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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