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 지났다. 불볕더위가 추석까지 이어졌다. 올여름은 뒤끝이 장난이 아니다. 추석을 하석(夏夕)’으로 이름을 바꿔야 할 지경이다. 이러다가 가을이 사라지는 게 아닐까. 기후 위기가 걱정된다.

명동성당,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명동성당,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고풍스러운 서울대교구 구교좌 한국 근대건축사 전형적 고딕양식
윤선도.이항복.이덕형.이회영 형제.이봉구.박인환 명동 낳은 인물

철없는더위를 무릅쓰고 추석 연휴인 15일 명동을 찾았다. 명동은 계절과 엇박자였다. 북새통이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거리는 오랜만에 경험했다. 절로 한가위 분위기를 빨려드는 듯했다. 말 그대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쇼핑 천국’, ‘관광 1번지였던 명동의 옛 명성을 되찾은 듯했다. 특히 외국 관광객이 눈에 많이 띄었다.

# ‘쇼핑천국’, ‘관광1번지명동 옛명성 회복

(가톨릭 평화방송 앞) 중앙차선의 버스정류장에 내려 오른편 언덕으로 올라갔다. 20여 년 전까지 이 길은 중앙극장 액자 골목이라고 불렸다. 당시 이곳에 오면 비록 액자 속 얼굴이지만 오드리 헵번, 제임스 본드, 비틀스 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월드 스타를 만날 수 있었다. 벤허 등 세계 명화 포스터가 빼곡히 골목 벽면에 기대어 서 있었다.

이 골목을 빠져나가자마자 자장면 가게가 있었다. 19876월항쟁 중이던 어느 날 필자는 명동 입구 골목의 그 중국집에 있었다. 가게 이름은 생각나지 않는다. 시위 학생인 걸 알아본 중국집 주인이 자장면값을 받지 않았다. 그때 공짜로 얻어먹은 자장면 맛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명동 문화공원.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명동 문화공원.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그 자리에 작은 공원이 새로 만들어졌다. 명동문화공원이다. 공원이라기보다는 공원형 명동안내소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길게 펼쳐진 패널 안내판에는 어제와 오늘의 명동 이야기그리고 명동이 낳은 인물(윤선도, 이항복, 이덕형, 이회영 형제, 이봉구, 박인환 등)을 소개하고 있다.

명동성당으로 오르는 계단 앞에는 천막이 줄지어 서 있다. 좌판도 있다. 명절을 앞두고 바자회가 열리는 듯했다. 땅값이 제일 비싼 명동에서 시골 오일장 분위기를 느끼다니 생소하기 짝이 없다.

명동성당 계단으로 올랐다. 갑자기 천국의 계단이라는 단어가 생각났다. 19876월 항쟁 때 이 계단을 그렇게 불렀다. 경찰의 감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안전지대였다. 계단의 길목에 조그마한 비석이 서 있다. 이재명 의사를 기념하는 표지석이다. 이곳이 이 의사의 의거 터임을 알리고 있다.

#‘이완영 모살 미수사건이끈 이재용 의사

이재명 의사 거터.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이재명 의사 거터.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김범우 집터.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김범우 집터.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19011222일 매국노 이완용이 벨기에 황제 추도식을 마치고 명동성당 앞을 지나고 있었다. 23세의 이재용 의사는 칼로 인력거를 탄 이완용을 찔렀다. 인력거꾼이 막아서는 바람에 중상을 입히는 데 그쳤다. 일명 총리대신 이완용 모살(謀殺) 미수 사건이다. 이 의사는 이 사건으로 주모자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결국 옥중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재명 의사’. 잊고 있던 이름이었다. 명동성당으로 발길을 옮기는 수많은 사람도 필자와 상황이 다르지 않은 듯했다. 비석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없었다. ‘천국의 계단을 오르면 이재명 의사를 위해 성호경을 긋었다.

계단 넘어 고풍스러운 서울대교구 구교좌 명동성당이 보였다. 한국 근대건축사에서 규모가 가장 큰, 전형적인 고딕양식 건축물이다. 하늘을 뚫고도 남을 뾰쪽한 철탑, 압도적 높이의 천장, 빨간 벽돌 사이의 뾰족아치의 창문, 가지런하게 포개진 수많은 붉은 벽돌……. 천국과 가까워지고 싶은 바람을 담아내고 있는 듯하다. 한눈에 봐도 손색없는 명품이다. 수많은 시민과 관광객이 작품을 사진기에 담고 있다. 마친 추석 선물을 받은 듯, 사진기를 향한 얼굴이 밝다.[명동성당 가장 오래된 건물 사도회관]

명동 본당은 18985월에 완공됐다. 무려 126년 전이다. 당시 조선에는 서양식 건축 기술이 있을 리는 만무하다.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성전을 지을 수 있었을까. 또 건축에 필요한 자재는 어떻게 공급했을까.

이런 궁금증을 풀어주는 곳이 있다. 본당 옆에 있는 사도회관이다. 서울대교구 주교가 기거했던 사도회관은 지금 서울대교구 역사관으로 쓰이고 있다. 특히 사도회관은 명동본당보다 8년 앞서 지어진 명동성당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이곳에 한국천주교회 발자취를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다. 종교만이 아니다. 억압과 탄압받던 이에게 피난처, 용기가 필요한 이에게 기댈 언덕, 고통과 가난으로 소외된 이의 안식처인 명동성당의 역사를 안내한다.

그런데 왜 이곳, 명동에 성당이 들어선 것일까. 그 역사는 명당성당을 하느님께 봉헌하기 무려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784년 한국천주교회의 첫 신앙공동체(수표교 공동체)가 형성된 곳이다. 바로 수표교 근처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다. 이벽은 같은 해 중국 베이징에서 세례받고 입국한 조선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 신부에게 세례를 받는다. 조선의 1호 세례자였다.

한국천주교회 설립지 이벽의 집터.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한국천주교회 설립지 이벽의 집터.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건을 계기로 서학을 공부하던 남인 학자들, 이벽, 권철신, 정약전 등이 공동체를 꾸렸다. 더 정확히 말하면 천주교 신앙을 일으킨 것이다. 선교사의 도움 없이, 자생적으로 천주교가 형성된 것이다. 이는 전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는 일이다. 이벽의 집을 한국 천주교회 설립터로 기념하는 이유이다.

신앙공동체가 커지면서 1784년 말부터 집회 장소를 옮긴다. 종현(鍾峴)에 있던 김범우의 집이다. 김범우의 집터 표지석은 하나은행 본점 앞에 있다. 이게 명례방공동체의 시작이다.

그러나 명례방공동체는 5년을 넘기지 못했다. 형조 관리에게 발각된 것이다. 공동체에 참가한 양반은 풀려났다. 양민인 김범우만 유배형을 받았다. 그는 유배 가서도 포교 활동을 했다. 결국 유배지에서 2년 만에 고문 후유증으로 순교했다. 자생적 가톨릭 발원지인 종현에 조선 최초의 성당을 짓게 된 것이다. 명동성당의 옛 이름은 종현성당이다. 성당 이름은 지역명을 따라 짓는다. 명동이 바로 명례방의 종현(鍾峴)이었다.

명동성당 옛이름은 종현성당

종현 언덕 위에 성당 위치를 정했다. 판서를 지낸 윤정현의 60여 칸짜리 저택이었다. 그 땅을 1883년에 샀다. 터를 마련했다고 건축이 수월하게 진척되지 않았다. 조선 정부와 마찰이 심했다. 정부는 종현에 있던 영희전을 이유로 성당 건축을 반대했다. 영희전은 조선 후기 6명의 왕 영정을 모신 곳이다. 명동성당 측에서 물러서지 않자 토지소유권을 억류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대세를 겪을 수 없었다. 수많은 박해를 겪었지만 조선 땅에도 신앙의 자유가 찾아왔다. 그 계기가 된 사건은 1886년 한불수호조약이다. 이 조약에서 불완전하지만 신앙의 자유가 공식적으로 인정됐다. 프랑스 신부가 앞장서서 나서는 성당 신축(약현성당과 명동성당)을 막을 수 없었다.

신유박해 순교 정약전 새겨진 청동문

명동성당 내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명동성당 내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성당의 중앙문은 청동문이다. 신유박해 때 순교한 중국 출신의 주문모 신부와 정약용 셋째 형인 정약종 명도회(신도회) 회장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치 미사 봉헌을 준비하는 신자들이 자리하고 있다. 실례를 무릅쓰고 성당 내부를 감상했다.

성당 내부에는 중앙통로가 있다. 이를 중심으로 각각 좌우에 기둥이 줄지어 있다. 기둥 사이의 천정은 아치형이다. 각양각색의 스테인드글라스는 뜨거운 태양 빛을 가린다. 그리고는 다양한 색깔로 바꿔 성당으로 끌어들였다. 제대와 성화, 성상 등이 명동성당의 품격을 높였다. 좌석에 앉아 봤다. 절로 손이 모아진다. 뭔지 알 수 없지만 성스러운 성당 내부 분위기에 압도된다.

내부 설계가 강력한 선교 의미를 담고 있는 듯했다. 황헌이 쓴 매천야록길을 가던 노인들은 지팡이를 짚고 (명동성당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고 떠날 줄을 몰랐다라고 적고 있다. 21세기를 사는 필자도 감격과 감동을 주최하지 못하는 데 당시 사람의 문화 충격이 어떠했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지하성당.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지하성당.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지하 성당으로 갔다. 성당 제대 아래 있는 지하 성당은 성해 안치실이 있다. 이를 지하 묘역이라고 불린다. 안치실이 제대 역할을 하는 듯했다. 안치실에는 붉은 천으로 쌓인 유해가 놓여 있다. 기해·병인박해 당시 믿음을 지킨 순교한 성 앵베르 주교와 성 모방 신부, 성 샤스탕 신부다.

이들은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 됐다. 역시 기해박해 때 순교하고 1984년 시성 된 성 김성우 안토니오,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등 5인의 유해도 이곳에 모셔져 있다. 사진을 찍으려고 하자 신자 중 한 사람이 촬영금지를 지시했다.

# ‘초라한윤선도 집터 표지석...안타까움

윤선도 집터 표지석.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윤선도 집터 표지석.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명동성당을 나왔다. 바로 길 건너에 편 커피빈이 있다. 명동성당 전망대로 불리는 명당 커피숍이다. 컵피숍 앞 외진 곳에 윤선도의 집터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다. 그곳에 있다는 걸 알지 않으면 표지석을 찾는 데 애를 먹었을 것 같다. 표지석이 드러나 있지 않고 구석에 내팽개쳐 있는 느낌이다. 저렇게 세워 둘 거면 뭐 하러 표지석을 세워뒀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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