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1일 오후 남산골 한옥마을을 찾았다. 충무로역 4번 출구에 나오자 남산골한옥마을 안내판이 보인다. 안내판을 볼 것도 없다. 왼편 골목으로 돌아서자 전통 한옥 정문이 보인다. ‘남산골한옥마을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다.

남산골 한옥마을 현판.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남산골 한옥마을 현판.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한옥마을 광장.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한옥마을 광장.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딸깍발이(청렴하고 지조있는 선비) 샌님 살던 동네, 남촌
1994년 서울시민 생활과 모습을 대표 문물 600서울천년타임캡술

한옥마을에 들어섰다. 넓은 광장 뒤로 남산과 서울타워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이 바로 딸깍발이(청렴하고 지조 있는 선비) 샌님이 살던 동네, 남촌이다. 남산골은 예로부터 울창한 소나무와 숲속 계곡이 유명했다. 청학동천이라고 불린 이유다. 청학동 계곡은 신선이 사는 것으로 여길 만큼 아름다웠다. 특히 여름철 피서를 겸한 놀이터로 이름이 높았다. 청학동은 삼청동, 인왕동, 쌍계동, 백운동과 더불어 한양 5동으로 꼽혔다.

청학동천, 한양 5동 여름철 피서겸 놀이터 유명

광장 왼편에는 청학동의 비경을 재현해 뒀다. 조선 선비들이 피서를 즐겼다는 천우각(누각)과 청학동 이름을 딴 연못 청학지 그리고 청학지 옆에는 청학동천을 재현한 작은 계곡이 있다. 계곡 물소리 들으며 숲 그늘에 앉았다. 남산골의 정취에 빠져든다. 손을 담그고 땀을 씻어냈다. 유유자적하던 선비의 피서를 체험한 셈이다. 선비들은 수려한 경관을 음미하며 마음을 정제했다. 탁족도 즐겼다. 조선 왕조 500년에 깃들인 조선 선비의 문기(文氣)가 살아난 듯하다.

천우각.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천우각.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청학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청학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조선 선비의 문기는 일제강점기에 사라졌다. 남촌이 일본인의 주거지로 바뀌면서다. 개항 이후 일본인은 남촌으로 모여들었다. 한때 일본공사관과 총독부 관저도 남촌에 있었다. 남촌은 사실상 한양의 도쿄였다. 남산을 공원으로 만들었다. 조선신궁도 남산에 세웠다. 관저와 신사를 지키고 주민을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지금의 남산골한옥마을에 조선헌병대를 뒀다. 광복 이후 조선헌병대가 떠난 뒤에도 남산골은 군사시설로 남았다. 수도경비사령부가 들어선 것이다. 1989년 남산골 제모습 찾기 사업이 추진했다. 수도경비사령부는 이전됐다. 그 자리에 서울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던 한옥을 옮겨와 남산골한옥마을을 1998년 조성했다.

1980~90년대는 서울의 도시정비사업이 한창이었다. 그 과정에서 헐려 사라질 전통 한옥이 수없이 많았다. 서울시민이 이를 안타깝게 여겼다. 한옥 보존 운동이 일어났다. 헐린 한옥을 재활용 방법을 찾아 나섰다. 한옥마을에 다시 세우기로 했다. 남산은 한양의 랜드마크다. 왕경(王卿)을 수호하는 산이다. 국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내던 성스러운 신산(神山)이다. 그곳에서 총칼을 쫓아내고 한옥마을을 조성한 것은 매우 잘한 일이다. 조선의 문기를 회복하는 거룩한 사업이다.

한양의 랜드마크 남산...한옥보존운동 산물

서울남산 국악당.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서울남산 국악당.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한옥마을 풍경.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한옥마을 풍경.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한옥마을에서 본 남산타워.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한옥마을에서 본 남산타워.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어떤 한옥을 옮기느냐를 놓고 논란이 빚어진 것이다. 선택의 기준이 정해졌다. 오직 가옥의 가치가 그 기준이 됐다. 그 가옥의 주인이 누구냐는 따지지 않았다. 중요한 학술적, 역사적 가치가 있는 가옥을 우선 선택하기로 했다. 친일파의 한옥이라도 보존 가치가 있다면, 도편수의 솜씨가 발현되어 있다면 나머지는 고려 사항에 포함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1990년대까지 서울 도심에 남아있는 멋진 한옥은 어떤 것일까. 일제강점기의 양반집이다. 상당수가 친일파였을 것이다. 결국 선정된 5채 가운데 삼각동 도편수 이승업 가옥, 삼청동 오위장 김춘영 가옥을 제외한 3채는 친일파의 집이다. 관훈동 민영휘 가옥, 제기동 해풍부원군 윤택영 재실, 옥인동 윤덕영 가옥이 그것이다.

본격적으로 한옥 탐방에 나섰다. 필자는 한옥에 관한 관심이 유별나다. ··일 가옥을 비교한 , 인간이 만든 자연을 저술했다. 사실 이 책을 쓸 때 남산골한옥마을을 둘러보지 못했다. 글을 쓰기 전에 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밀려왔다. 하지만 어느 정도 한옥을 알고 한옥마을을 둘러보게 된 것도 나쁠 게 없다고 위로했다. 삼각동 이승업 가옥으로 들어가는데 타이완 여성 여행객 두 명이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사진을 찍고 있다. 솟을대문을 배경으로 투 샷을 찍어줬다. 한옥의 묘미가 담긴 사진이길 바라며.

조선후기 최고의 도편수(건축가) 중인 이승업의 가옥

이승업 가옥.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이승업 가옥.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우리는 도편수 하면 우두머리 목수로 아는 데 그것은 아니다. 지금의 건축가라고 할 수 있다. 이승업은 경복궁 복원을 참여했던 조선 후기의 최고의 도편수였다. 이 가옥은 이승업이 1860년에 직접 설계, 건축, 시공한 집이다. 이 집에서 이승업 가족이 4대에 거쳐 75년간 살았다. 그 뒤로는 조흥은행 사료관으로 사용됐다.

돌계단 위에 세워진 솟을대문이 꽤 육중했다. 솟을대문 앞에는 두 개의 나무 기둥이 세워져 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형태다. 대문도 두툼한 송판이다. 대문 장식도 매우 아름답다. 재료가 특별해 보인다. 특히 툇마루의 장식은 매우 아름답다. 조선 최고의 도편수 손길이 느껴진다. 하지만 뒷얘기를 들으면 헛웃음이 날지도 모른다. 그가 경복궁 복원을 마친 뒤 버려진 재료를 이용해서 지었다고 한다.

이승업 가옥은 서울에 남은 유일한 중인의 집이다. 사료적 가치를 배가하는 게 있다. 안채의 맞배지붕의 길이가 달리해서 미적 가치와 희소성을 높인 것이다. 서까래를 받치는 나무인 도리를 지붕 앞쪽에 5, 뒤쪽에 4개를 달았다. 반오량 양식이다. 서울에서는 볼 수 없는 매우 독특하고 희귀한 형태다.

이승업 가옥을 돌아나가면 한옥마을 가장 깊숙한 곳에 삼청동 김춘영 가옥이 있다. 김춘영은 궁궐을 지키는 무인, 오위장이었다. 이 가옥은 무인 한옥의 전형을 보여준다. 대문이 이승업 가옥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작다. 또 대문간이 바로 트이지 않고 꺾어 들어가게 되어있다. 장대석 기단 위에 팔작지붕도 홑처마로 처리되어 있다. 당시 무인의 사회적, 경제적 위상을 보여주는 듯했다. 집 안으로 들었다. 역시 고급스럽거나 넓어 보이지 않는다. 다만 대지의 모양에 맞춰 건물을 자와 자로 조화롭게 배치했다. 안채의 중심에 있는 대청이 유난히 커 보이는 게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안내문에 따르면 인구 밀도가 높아지는 도시적 상황에 적응한 전형적인 서울 한옥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한옥은 1890년에 지어져 손자인 김홍기까지 3대가 살았다.

무인의 한옥 김춘영 가옥 조선최고 갑부 민영휘 가옥
 

김춘영 가옥.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김춘영 가옥.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김춘영 가옥에서 다른 한옥에 볼 수 없는 게 있다. 바로 길가에 마주한 방화벽이다. 이는 화재 방지를 위한 게 아니다. 방화벽을 쌓아 가옥의 격조를 높이려 한 것이다.

이제 진짜로 일제강점기의 부잣집으로 간다. 한옥마을 5채의 중심에 있는 관훈동 민영휘 가옥 순서다. 5채 건물 중 가장 크고 화려하다. 한옥마을의 중심을 차지하게 된 이유다. 민영휘는 식민지 최고의 부호였다. 임오군란 때 탐관오리로 유배됐다. 동학혁명 때 위안스카이에게 파병을 요청했다. 결국 일본군을 조선에 불러드리는 원인을 제공한 장본인이다. 하지만 갑오정변을 진압하면서 고종의 총애를 회복했다. 중추원 의장, 헌병대 사령관을 지냈다. 국권피탈 후 일본 정부로부터 작위(자작)를 얻었다.

민영휘의 집으로 들어가면서 그 규모와 화려함에 놀랐다. 민영휘가 1895년 이주해서 살았다. 1998년 옮겨진 민영휘 가옥의 일부일 뿐이다. 별당채, 대문간채, 행랑채는 모두 헐려 사라졌다. 안채와 중문간채을 복원한 것이다. 안채는 장대석 2단에 팔작지붕 겹처마다. 외관만이 아니다. 대청은 가로 3, 세로 2칸이나 됐다. 대청에 매달린 들어열개(문짝 전체를 걸쇠에 들어 걸게 만든 문)는 네 짝이나 됐다. 천장도 사찰이나 궁궐에서나 볼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이고주칠량 양식이다. 마치 나보다 부잣집이 있으면 나와보라고 으스대는 듯하다. 일제강점기의 언론인 김을한이 쓴 <조선 재벌해부>라는 글에서 현하(現下) 조선 제일 갑부는 민영휘라고 지목했다. 민영휘의 집이 아니라 민영휘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국권피탈 8작 중 한명 윤덕영 가옥

천년타임캡슐.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천년타임캡슐.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옥인동 윤덕영 가옥으로 자리를 옮겼다. 1910년에 지었다고 알려진 이 한옥은 순정효황후의 큰아버지 윤덕영이 소유했다. 부재가 낡아 이전하지 못하고 건축 양식을 본떠 복원한 것이다. 윤덕영도 잘 알려진 친일 반민족주의자다. 국권피탈의 8작 중 한 명이다. 그 대가로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칙선 의원을 지냈다. 그의 집은 당시 윤덕영의 위세를 보여주는 데 부족함이 없다. 최상류층 가옥이라는 얘기다. 특히 이 가옥은 2만 평이나 되던 벽수산장의 일부다. 벽수산장(양관)은 일제 때 가장 크고 화려한 서양식 개인주택이다. 조선을 일본에 팔아 넘기 대가로 받은 선물이다. 벽수산장의 일부인 한옥을 이곳에 옮긴 것이다. 특히 안채 앞쪽의 기둥머리는 익공(첨차 위에 얹혀 있는 장여 밖에 걸쳐 달은 짧게 아로새긴 나무)을 치장했다.

민영휘와 윤덕영 가옥을 돌아보면서 더 이상 친일 매국노의 집을 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완용이 조선의 외교권을 팔아먹었다면 윤택영은 조선을 팔아먹은 매국노다. 너무 화가 났다. 제기동 해풍부원군 윤택영의 재실을 지나쳤다.

한옥마을을 벗어나 서울천년타임캡슐로 자리를 옮겼다. 타임캡슐은 남산골한옥마을의 맨 꼭대기에 있다. 전통 조경 양식으로 꾸며진 계곡과 정자를 지나 타임캡슐에 도착했다. 타임캡슐은 마치 과거로 들어가는 듯 설계된 통로를 통과해야 한다. 1994년 당시 시민 생활과 서울시의 모습을 대표할 수 있는 문물 600점을 담은 보신각종 모양의 타임캡슐이 매설돼 있다. 타임캡슐은 400년 후인 2394년에 후손들에게 공개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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