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6일 오후 장충단공원으로 갔다. 장충단공원은 필자와 인연이 깊다. 필자는 초등학교 시절 남산에 있던 어린이회관을 다녔다. 20원 하던 차비를 아끼기 위해 남산을 넘어 장충단공원으로 걸어서 귀가하곤 했다. 장충단공원 하면 떠오르는 전시회도 있다. 선천적 기형으로 태어난 기형 동물을 장충단공원에 모아서 전시한 행사다. 할머니와 갔던 일종의 기형쇼(Freak show)였다. 너무 충격적이었다. 머리가 두 개인 소, 다리가 세 개인 말 등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장충단공원은 이런 대형 이벤트만 열렸던 게 아니다. 1970~80년대에는 대규모 선거유세장이었다. 당시 유력한 대선 후보는 장충단공원에서 유세전을 폈다. 민주주의 현장이었다.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대형 이벤트 공간이자 유력 대선후보 대규모 선거 유세장
- 시해당한 명성황후와 조선군 추모 기념 장충단비..최초 현충원

이런 얘기를 하는 데 이유가 있다. 2009년 재정비되기 전까지 장충단공원은 텅 비어 있었다. 광장형 공원이었다. 대부분 빈터였다. 한쪽에 어린이 야구장, 농구장 등 체육시설이 있었다. 광장 주변에 원효대사·유관순·이준 등 위인 동상이 단조로움을 깨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 시절 광장의 풍광은 역사 뒤안길로 사라졌다. 광장은 소거됐다. 대신 공원은 풍성해졌다. 소나무 숲, 맨발로 걷는 숲, 장충단 실개천, 정자(장충정), 어린이놀이터 그리고 장충단비와 장충단 기억의 공간 전시실, 게이트볼 경기장 등이 들어섰다.

조선군 변절자 경복궁 뚫려 처참한 최후 맞은 명성황후

장충단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장충단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공원으로 들어선 필자를 막아선 게 있다. 장충단비다. 장충단비는 장충단공원의 존재 이유이다. 장충단의 역사가 시작된 것은 지금부터 129년 전 즈음이다.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 자객에 의해 시해당했다. 을미사변이다. 일본 낭인 몇 명 경복궁에 난입해 명성황후를 살해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지 않다. 시해 당일 경복궁 정문에는 일본 정규군과 친일 조선군 1,000여 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경복궁을 지키던 시위대장 홍계훈은 경복궁 봉쇄를 명령했다. 그런데 광화문이 열렸다. 변절자가 있었다. 명성황후는 난자당했다. 홍 시위대장을 비롯해 이경직 등 수많은 경복궁 시위대 장병도 죽음을 맞았다. 힘없는 나라의 황후와 병사의 처참한 최후였다.

고종은 이들을 위해 남소영(한양의 남쪽을 방어하던 수비대) 터에 추모 공간을 마련했다. 그곳이 바로 장충단공원 일대다. 이곳에 장충단이라는 사당을 짓었다. 일 년에 두 차례씩 제사를 지냈다. 장충단(奬忠壇)충성을 장려하는 제단이란 뜻이다. 그리고 을미사변과 임오군란 그리고 갑신정변 과정에서 희생된 혼령까지 모셨다. 대한제국의 현충원이었던 셈이다. 물론 우리나라 최초의 현충원이다.

장충단순조 직접 작성...민영환 비문 작성

장충단터.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장충단터.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장충단비가 바로 장충단의 유일한 흔적이다. 장충단비 전면의 장충단글씨는 당시 황태자였던 순종이 썼다. 뒷면의 143자 비문은 당시 육군부장(육군대상)인 민영환이 썼다. 비문에는 난국에 뛰어들어 죽음으로 몸 바친 사람이 많았으니 기록으로 남겨야 마땅하다라고 적고 있다. 장충단은 일제의 만행을 알리고 국권을 더욱 튼튼히 하겠다는 고종과 대한제국 충신의 의지 표현이었다. 장충단 제사는 1900년부터 1909년 말까지 10년 동안 19번 이뤄졌다.

장충단비는 휀스로 둘러싸여 있다. 철책 앞에는 장충단터라는 표지석이 서 있다. “임오군란 갑신정변 을미사변 때 순국한 대신과 장병을 제사하기 위하여 광무 4(1900) 설치했던 제단 터라는 설명이 새겨져 있다. 이를 바라보고 있자니 만감이 교차한다. 최초의 국립 현충원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기에도 민망하다. 너무 초라하다.

무엇보다 장충단에 장충단이 없는 게 가슴이 아프다. 장충단의 복원이 곧 위국충혼을 기리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한민족의 정신 지주를 다시 세우는 일이기도 하다. 장충단이 재구성되어야 하는 이유는 또 있다. 장충단은 우리의 민족정기 말살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훼손된 장충단을 되살림으로써 우리의 민족정신이 굳건함을 보여야 한다.

일제에 의해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는 심각한 변화를 겪었다. 특히 창경궁, 경희궁, 환구단, 장충단 등 대한제국의 상징은 무참하게 짓밟혔다. 장충단도 1919년 놀이공원으로 꾸몄다. 벚나무를 심었다. 벚꽃놀이했다. 군사훈련도 했다. 순국선열의 혼령을 짓밟으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엄숙, 장엄, 경건해야 할 추모공원, 그것도 국립 현충원을 놀이터로 만든다? 말이 되는가. 문화재를 훼손하는 게 아니라 우리 정신을 말살한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이완용 추모공간 박문사 들어와..모욕감

이준열사.​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이준열사.​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우리의 정신이 유린당하는 사이 장충단은 식민제국의 상징물로 채워졌다. 그 결정적 사건은 19091026일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이었다. 이곳에 조선 침략의 원흉이자 민족의 원수인 이토 히로부미의 추모 공간을 만들어진 것이다. 박문사(博文寺)가 그것이다.

대한제국의 현충원에 조선 침략의 원흉을 기리는 사찰이 들어서다니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을 느낀다. 사찰 이름도 이토의 이름을 딴 것이다. 그 순간 일제 침략에 저항했던 영혼을 기리는 제단이 일체 침략자의 정신을 고양하는 제단으로 바뀌게 됐다. 박문사는 1936지금의 신라호텔 자리에 들어섰다. 경희궁 정문인 흥화문을 통째로 뽑아다가 박문사 정문으로 사용했다. 이름도 경춘문(慶春門)으로 바꿨다. 경춘문은 춘무(春畝)를 경사스럽게 한다는 의미다. 춘무는 이토의 호다.

그만이 아니다. 경복궁의 선원전을 뜯어다가 박문사의 창고로 사용했다. 선원전은 역대 조선 왕의 신위를 모시는 사당이다. 더욱 슬픈 일은 나라를 팔아먹었던 매국노, 이완용 등의 신위도 이 박문사에 들어갔다.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일제는 장충단공원에 이토의 동상을 세우려고 했다. 결국 훼손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동상 건립은 무산됐다. 대신 육탄 3용사의 동상을 세웠다. ‘육탄 3용사은 중일전쟁 때 자폭으로 진격의 활로를 개척한, 일본의 용감한 병사. 당시 일본 육군의 정신적 상징으로 여겨졌다. 영웅 대접받았다. 이런 일련 상황을 돌아보면 일제는 자신들이 쓸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동원, 우리의 성역을 훼손한 것이다. 박문사와 동상은 해방 직후 철거됐다. 박문사 자리에는 영빈관이 들어섰다.

일제 치하에서 오욕과 회한의 시간을 견디어야 했던 장충단. 사당과 부속건물 등 많은 흔적은 일제 36년과 6·25전쟁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항일정신이다.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 유관순·이준 동상, 3.1 독립운동기념탑, 순국열사 이한응 선생 추모비 등이 그 자리를 매우고 있다.

유림장서한국 독립 세계 호소하는 서한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장충단비를 지나 울창한 소나무 숲 사이의 산책길로 접어들었다. 공자가 왜 소나무를 후조(後凋)라고 했는지 알 듯하다. 혹독한 무더위에도 소나무 푸르름은 더 깊다. 소나무를 보고 있으니 한결 시원하다. 싱그러운 솔향과 풀 향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장충단 기억의 공간(전시실)을 둘러보려고 했다. 그러나 보수공사 중이었다. 발길을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로 옮겼다. ‘유림 장서19193.1운동 직후 유림이 파리에서 열린 세계평화회의에 보낸 일제의 주권 찬탈을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서한이다. 이 서한에는 곽종석, 김복한을 비롯하여 유림 대표 137명이 연서했다.

그런데 빗방울이 떨어진다. 빗방울이 제법 굵다. 우산도 없다. 흥화문, 한국의 집, 남산골한옥마을 등을 둘러볼 수 없을 것 같다. 서둘러 장충단 실개천 위에 있는 수표교로 갔다. 수표교에서 본 실개천의 수초는 무성했다. 작은 숲처럼 보였다. 마치 계곡에 와 있는 느낌이다. 어느새 빗방울이 소나기로 바뀌었다. 냇물 소리와 빗방울 소리가 합쳐져 풍요로운 화음이 된다. 하지만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 비를 피할 곳도 없다. 급한 대로 수표교와 수표교 안내문을 사진에 담았다. 빛의 속도로 동대입구역으로 몸을 피했다.

청계천 복개공사 철거된 수표교 장충단공원 이전

수표교.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수표교.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안내문을 토대로 수표교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수표교는 원래 청계천에 있던 것이다. 그것이 1959년 청계천 복개 공사를 하면서 철거됐다. 1965년 장충단공원으로 옮겨졌다. 수표교는 청계천에 있는 다리 중 광통교 다음으로 큰 다리다. 청계천 다리 중 원형이 그대로 남은 유일한 다리다. 조선시대 교각 토목 기술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사례다. 특히 교각을 마름 꼴로 세워서 물의 저항을 최소화했다. 화강석을 짜 맞추는 기법을 사용해 상판을 놓았다. 혹시라도 홍수가 나서 떠내려가도 곧 복구가 가능한 이유다.

1760년 보수공사(영조36)가 이뤄진다. 이때 중앙 교각에 병···(···) 네 자를 세로로 새겨 넣었다. 이 역시 수위를 측정을 위한 보조수단이었다. 영조 때는 다리 동쪽에 준천사란 관청을 두어 수량의 변화를 한성판윤에게 보고했다. 홍수를 예방하는 조치다. 갑자기 쏟아진 비가 아니었으면 교각, 상판 등을 샅샅이 볼 수 있었을 텐데 무척 아쉽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