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1, 여정이 이어진다. 다시 옛 러시아 공사관이 있는 정동공원으로 돌아왔다. 덕수궁과 연결되는 고종의 길이 이곳에서 시작된다. 옛 러시아 공사관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 붉은 문이 있다. 궁궐 안 회랑을 이어주는 것과 같은 작은 문이다. 옛 러시아 공사관 흰 탑(전망대)이 이 문을 내려다보고 있다. 고종의 길이 마치 덕수궁과 옛 러시아 공사관으로 가는 길처럼 느껴졌다. 많은 사람이 필자처럼 고종의 길을 덕수궁과 옛 러시아 공사관을 잇는 비밀통로로 여긴다고 한다.

고종의 길,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고종의 길,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경운궁과 경희궁을 잇는 어로(고종의 길)
- 열강 틈새에서 생존을 갈구했던 대한제국의 아픔

그렇지 않다. 오해다. 고종은 대한제국 선포한 뒤 정궁인 경운궁(고종 사후 덕수궁으로 개칭)에서 다양한 국가행사를 계획했다. 경운궁은 비좁았다. 고종은 경희궁을 보조 궁궐로 이용할 생각이었다. 경희궁은 비어 있다. 경운궁과 거리도 멀지 않았다. 적격이다. 하지만 왕의 잦은 행차는 민폐가 된다. 백성에게 번거로움을 줄 수 없었다. 경운궁과 경희궁을 잇는 어로를 새로 만들었다. 어로(고종의 길)는 경희궁까지 이어져 있었다. 지금의 도로 상황을 고려해서 옛 러시아 공사관까지 복원한 것이다.

외부 세계와 차단된 높은 돌담길의 시작

그렇다고 고종이 친일파 내각을 피해 외세에 의탁하기 위해 도망가던 길이라는 사실마저 부정할 수 없다. 궁녀의 가마를 타고 경복궁 후문을 나와 덕수궁 돌담 밖으로 숨어들었다. 아관파천 이후 일제의 감시는 더 강화됐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러야 했다. 비밀통로를 이용해서 수시로 경운궁에 오갔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안창모 경기대 교수가 쓴 덕수궁(시대의 운명을 안고 제국의 중심에 서다)에 나오는 내용이다.

고종의 길로 통하는 문을 들어섰다. 좁은 골목길이 나타났다. 폭은 3m, 길이는 120m 남짓이다. 외부 세계와 차단된 높은 돌담길이다. 도심에서 느낄 수 없는 운치가 있다. 몇 발자국을 옮기기도 전에 그런 감상적 기분은 사라졌다. 높디높은 골목길은 서구 열강의 틈바구니에 낀 대한제국이었다. 실제로 돌담 너머는 미국 대사관전, 하비브 하우스다. 다시 말하면 대한제국 당시 미국 공사관의 뒷골목이었다.

돌담길에서 세월의 무게나 정취는 느낄 수 없다. 돌담이 너무 깨끗하고 세련됐다. 고종의 길은 2018복원됐다. 깨끗한 돌담은 과거 없이 살아온 오늘 같다. 하지만 고종의 길은 여전히 시린 이다. 열강의 틈새에서 생존을 갈구했던 대한제국의 아픔이다. 그 설움을 알 리 없는 서양 여성 두 명이 킹스로드를 걸으면서 연신 이를 드러내놓고 웃고 있다.

선원전 복원...고종의길 복원프로젝트 진행

조선저축은행관사,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조선저축은행관사,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돌담이 돌담길을 막아섰다. 왼쪽으로 돌아섰다. 넓은 세상이 눈 아래 펼쳐졌다. 왼편엔 왼 딴 집 한 채가 있다. 조선저축은행 관사다. 오른편엔 정돈된 잔디밭이다. 저 멀리 빈터(옛 경기여고)에는 한창 공사 중이다. 교정 한복판에 고목 한 그루가 서 있다. 아마도 보호수인 회화나무가 아닐까 싶다.

고종의 길 종착점으로 내려갔다. 가림막 예술 아트펜스가 있다. 그 앞에 선원전 복원 공사 계획을 공지한 알림판이 서 있다. 선원전 복원은 고종의 길에 역사성을 회복 프로젝트 중 하나다. 선원전은 역대 조선 왕의 어진을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던 진전(眞殿)이다. 대한제국 창업의 의미가 원구단에 있다면 선원전은 대한제국의 조선 법통 승계를 상징한다. ‘대한제국의 종묘라는 얘기다. 고종이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뒤 황제 즉위식을 준비하던 중에 건축이 시작됐다.

일제 처지에서 보면, 선원전은 가장 먼저 철거해야 할 대한제국의 상징 공간이었다.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1907년 고종이 폐위됐다. 1910년 대한제국이 패망했다. 선원전은 1900년 경운궁 대화재로 소실됐다. 이듬해 지금의 자리인 수어청 터에 복원했다. 복원된 지 채 10년도 지나지 않아 선원전은 해체됐기 시작했다. 신성(神性)은 탈색되고 세속화됐다. 상업·교육·종교 시설이 신원전 영내에 속속 들어섰다. 조선저축은행과 식산은행이 제일 먼저였다. 고종의 길에서 본 외딴집이 바로 조선저축은행 간부의 사저다. 일본인 교육기관도 한자리를 차지했다. 경성여자공립보통학교(덕수초등학교 터), 경성제일공립고등여학교(경기여고 터)가 그것이다. 구세군사관학교도 들어섰다.

구세군사관학교....현존 가장 오래된 신학대학 건물

구세군 사관학교 표지석.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구세군 사관학교 표지석.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당시의 실체가 온전히 남아 있는 건물이 있다. 1928년 완공된 구세군사관학교(현재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덕수궁 미국 대사관저 앞길에 있는 이 건물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신학대학 건물이다. 정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붉은색 벽돌에 삼각 지붕의 형태의 건물이다.

하지만 정문에는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에서 볼 수 있는 대리석 기둥(포르티코)4개 서 있다. 그리스 양식을 도입한 건물이라는 얘기다. 구세군은 자선사업 빈민구제 NGO. 구세군은 1908년에 대한제국에 들어왔다. 우리나라 공익법인 제1호다. 구세군사관학교 옆에 있는 구세군 역사박물관에 들어갔다. 이 박물관에는 독립 만세운동과 한국전쟁 당시 희생된 독립운동가 순교자관, 자선사업의 역사를 볼 수 있는 사회봉사 나눔관, 구세군의 상징인 자선냄비 체험관, 구세군 악기전시관 등으로 꾸며져 있다.

킹스로드는 선원전 터에서 끝났다. 이곳에서 미국 대사관저 앞 덕수궁 돌담길을 만날 수 있다. 정동로타리와 옛 경기여고를 잇는 이 길은 1920년에 만들어졌다. 이 길이 열리면서 덕수궁은 조각났다. 현재의 모습으로 굳어지게 됐다. 현재 덕수궁은 본래 크기의 1/3에 불과하다.

덕수궁 돌담길 회화나무,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덕수궁 돌담길 회화나무,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속이 빈 회화나무.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속이 빈 회화나무.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선원전 터 건너편 작은 골목을 들어갔다. 덕수궁 돌담길이 다시 시작됐다. 이 길은 덕수궁을 잠시 들어갔다가 나온다. 영국대사관이 길을 막아서 있기 때문이다. 이 길을 나오면 바로 영국대사관 정문이다. 불과 수십m밖에 되지 않는 덕수궁 구간에는 십여 그루의 회화나무를 볼 수 있다. 회화나무는 거의 전부가 속이 비어 있거나 깁스하고 있다. 대한제국의 굴곡진 역사를 보면서 산 회화나무도 속이 타들어 간 게 틀림없다. 속까지 비운 회화나무의 심정을 알 듯하다.

대영제국 대사관....촬영 금지 현판도 안보여

영국대사관현판이 정말 작다. 눈곱만하다. 경찰과 가림막이 쳐진 철문이 아니라면 이곳에 대영제국의 대사관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을 듯하다. 사진기를 쳐들었다. 경찰이 다가왔다. 간판만 찍겠다는 데도 허락하지 않는다. 아예 자기가 촬영해주겠다며 글자만 찍고는 됐냐?’고 묻는다. ‘됐다라고 말했다. 만족하지 않았지만 고생하는 젊은이와 다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서울주교좌성당,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서울주교좌성당,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영국대사관 옆에 있는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이다. 우선 시청역 방향으로 내려갔다. 시청역 부근을 오가다가 본 ‘4·19혁명 발원지표지석을 사진기에 담기 위해서다. 서울시의회 앞 인도에 검은색 표지석이 서 있다. 그런데 표지석이 뒤돌아서 있다. 차도 쪽에 치우친 표지석 글씨가 차도를 향하고 있다. 누가 대한민국 민주주의 뿌리가 이곳에서부터 내렸음을 인지할 수 있을까.

다시 길을 되돌아왔다. 내려갈 때 본 세실극장 앞에 섰다. 폐관 위기를 넘기고 단장한 정동극장-세실이다. 감회가 새롭다. 1990년대 초까지 세실극장은 대한민국의 연극의 메카였다.

6월항쟁발원지표지석.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6월항쟁발원지표지석.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그만이 아니다. 정치의 현장이기도 했다. 19876·10 항쟁 당시 민주화 선언이 낭독됐던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다. 정치인이 이곳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필자의 취재현장이기도 했다. 정동극장-세실 옥상은 세실마루 전망대다. 덕수궁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우거진 나무에 가려서 제대로 볼 수 없는 게 아쉽다.

대한문 근처에 있는 서울시청 별관의 정동전망대(12)에 가면 계절에 상관없이 덕수궁의 전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대신 지척에서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을 볼 수 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이국적인 성당은 정동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건축물이다. 특히 서양과 한국의 멋이 어우러져 있다. 세실마루에서 한국풍의 붉은색 기와지붕을 눈앞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세실마루에에서 본 덕수궁 풍경.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세실마루에에서 본 덕수궁 풍경.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성공회 서울성당...서양과 한국미 어울러져

이젠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의 탐방 순서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자 탐방객을 맞는 것은 교구 사무실로 쓰는 경운궁 양이재다. 유럽 한 가운데 있는 한 채의 한옥 같다. 양이재는 원래 덕수궁 안에 있던 대한제국의 황족과 귀족 자제의 교육을 전담하던 수학원이었다. 조금 더 가면 양옥집에 기와를 덮은 수녀원이 나온다. 그 앞에는 유월항쟁진원지라는 표지석이 서 있다. 박종철 물고문 사건으로 시작된 6월 민주화 항쟁은 성공회 성당에서 계획했다.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높은 아치형 천장과 조명이 이국적이다. 또 재단에는 최후의 만찬의 장면을 그린 모자이크 그림이 있다. 마침 보수공사 중이었다. 똑같은 자막 그림이 모자이크를 가로막고 있었다. 성당 한 관계자는 9월에 오면 진품 모자이크를 볼 수 있다면 꼭 다시 오라고 당부했다.

성당내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성당내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성당내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성당내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한국 창호식 스테이글라스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이 성당 내부를 환하게 밝히고 있다. 12개의 기둥이 성당 지붕에서 내려오는 아치들을 받치고 있다. 돌아서면 2층에 파이프오르간이 있다. 이 성당의 품위를 높이는 거룩한 악기다영국에서 210개월간 제작해 1985년 설치됐다. 이 오르간에는 1,450개의 파이프가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이 파이프오르간이 성공회 성당에 설치된 데는 특별한 사연이 숨어 있다. 중동 붐 때 여러 가지 도움을 받은 건설회사들이 당시 큰 도움을 준 중동 지역의 대사 한 분의 노고에 보답하기 위해 기증한 것이다. 이 대사는 성공회 신자라고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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