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1월 리일규(52) 쿠바 주재 북한대사관 참사가 가족들과 함께 목숨을 걸로 남한으로 탈출했다. 그는 7월17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를 통해 탈출 동기와 북한 실태를 증언했다. 리 전 참사의 증언을 읽으며 동서독 분단 때 죽음을 각오한 동독인들의 서독 탈출을 다시금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리 전 참사가 토로한 탈북 동기는 “독재국가⋯ 북한체제에 대한 염증, 암담한 미래에 대한 비관, 이런 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한 마음이 탈북을 고민하게 된 출발점 이었다”고 했다. 또한 그는 “허황된 명분으로 핵•미사일 개발에 수억만금을 탕진하고 2500만을 현대판 노예로 전락시킨 김정은 체제를 더 견딜 수 없다”고 토로했다. 그는 “북한 주민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한국에서 살아봤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도했다. 그는 탈북 실행 3개월 전부터는 “밥알이 모래를 씹는 것” 같았고 체중이 7kg 빠졌다고 했다. 아내는 남편의 탈북 기미를 알아차리고는 심장발작을 일으켜 병원에 입원까지 했다.

리 전 참사는 평양외국어학원(중•고과정)에서 프랑스어를, 평양외국어대학에서 스페인어를 전공하고는 1999년 외무성에 들어갔다. 외무성 중남•중동•아프리카 담당 부국장 겸 당 세포비서를 지냈고 9년간 쿠바에서 근무했다. 2013년 쿠바 근무 중에는 김정은 표창장도 받았다. 리 전 참사가 김정은의 표창장까지 받고서도 탈북을 결심케 된 동기는 복잡하지 않다. 김정은 독재체제에 대한 염증, 암담한 미래 비관, 주민들을 “현대판 노예”로 전락시킨 체제를 벗어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데 있었다.

리 전 참사의 탈북 동기는 동독 주민들이 목숨 걸고 서독으로 탈출했던 것과 똑같다. 동독인들도 공산독재 권력에 대한 불신, 만성적 소비재 결핍, 자유와 풍요가 넘치는 서독에서 살고 싶은 욕구, 여행의 자유 제한 등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해서였다. 동독에서 서독으로 넘어온 숫자는 전체 동독 인구 2000만 명 중 무려 460만 명이나 된다. 그로 인해 동독에선 노동인력이 크게 달릴 지경이었다. 460만 명 중에는 공식적으로 동독 정부에서 서독으로의 이민신청을 허락받고 이주한 경우도 있다. 또한 동독의 공산국가 여행허가를 이용,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폴란드,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으로 여행했다가 현지 서독 대사관에 잠입, 서독으로 망명한 경우도 많았다. 또 서독 정부가 동독인의 몸값을 지불해 데려오기도 했다.

특히 적지 않은 동독인들은 동독 한가운데 위치한 서독 관할의 자유도시 서베를린으로 탈출했다. 그러자 동독은 1961년 8월 155km에 달하는 베를린 장벽을 쌓았다. 동독은 철조망을 설치했고 탈출하는 동독인들을 현장 서 사살 했다. 그래도 동독인 1492명이 베를린 장벽을 넘으려 했고 그들 중 139명이 현장에서 동독 경비병에 의해 사살되었다.  
베를린 장벽이 설치되던 1961년 8월17일 18세의 청년 피터 페히터 군이 장벽을 넘다가 동독군의 총격을 받고 쓰러졌다. 동베를린 경비대는 유혈이 낭자한 페히터 군의 시체를 50여분 동안 방치했다가 질질 끌고 갔다. 이 참상을 지켜본 수백 명의 동독인들은 치를 떨었다. 그밖에 베를린을 제외한 동•서독 국경을 넘다 죽음을 당한 동독인들도 200명에 달한다.

목숨을 건 동독인들의 탈출과 리일규 참사의 탈북 동기는 같다. 공산독재를 벗어나 자유와 풍요가 넘치는 자유세계로 가고 싶은 갈망 그것이었다. 김정은 독재 권력도 동독 에리히 호네커 독재 정권처럼 남북경계선에 대전차 장애물과 지례를 묻고 분단선을 넘는 탈북자를 사살한다. 하지만 “현대판 노예” 삶을 벗어나 자유와 풍요를 갈구하는 인간의 본능은 철조망도 막지 못한다. 검정은 1인 숭배 권력도 호네커 권력처럼 무너질 날은 반드시 도래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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