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등장 화려했던 86운동권…과거와는 사뭇 달리는 86그룹 현주소

[일요서울ㅣ이기우 언론인] 당권 출마 대신 침묵하는 86그룹.’ 민주당 이재명 전 대표가 당대표 연임을 공식 선언한 가운데 86그룹(80년대 학번·60년생)은 침묵하고 있다. 5공 시절 전두환 정권의 억압을 뚫고 876월항쟁민주화를 이룩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는 등 한국정치 개혁 상징이었던 이들의 침묵을 두고 민주당에 민주주의가 살아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평가하는 이들도 적잖다. 이에 김두관 전 의원이 이 전 대표에 맞서 출마해 이재명 일극체제비판을 피했지만 약속대련을 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까지 제기되는 상황에서 86운동권 그룹의 침묵이 더욱 아쉽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는 86운동권 비판으로 이어지는 모습이다.

임종석 전 의원 공천배제 입장 기자회견 바라보는 이재명 대표. 뉴시스
임종석 전 의원 공천배제 입장 기자회견 바라보는 이재명 대표. 뉴시스

- 이인영 등 86운동권 이재명 대항마거론됐으나 전대 불출마
- 이재명 일극 체제 인정하며 현실론택하는 86운동권
- 민주당에서 민주주의도, 패기도 사라졌다는 비판도 나와

86운동권의 등장은 화려했다. 16대 총선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전대협 출신의 이인영 의원, 우상호 전 의원, 임종석 전 비서실장 등 80년대 학생운동의 중심인물들을 대거 공천했다. 이들은 당시 30, 80년대에 대학을 다녔고, 60년대생 이란 공통점을 지녔다.

특히 80년대 학생운동이라는 강렬한 경험을 했던 집단이다. 그들은 대부분 각 학교의 학생회장은 물론 전대협의 간부로 활동하면서 끈끈한 결속력을 유지했다.

또 학생운동 내의 권력투쟁 및 노선투쟁을 거치면서 권력의지를 길렀고, 야당 지도부와 연결되어 활동하면서 여느 기성 정치인에 뒤지지 않은 정치 감각을 키웠다.

화려했던 86운동권 그룹, 총선땐 쇄신 대상으로 거론

86정치인이 하나의 집단으로 떠오른 것은 200417대 총선에서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역풍으로 열린우리당이 총선에서 승리할 때 86정치인들이 대거 원내에 진입했다. 특히 원내 입성해 전대협 출신들의 집단적 의사는 당의 진로를 결정하는 핵심 동력이었다.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당대표 선출 과정에서도 이들의 판단이 주된 변수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2008년 대선 패배 후 치러진 18대 총선에서 86정치인들도 줄줄이 낙선하면서 86그룹 당내 비중이 줄었다. 그들이 민주당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한 것은 19대 총선이다. 86그룹은 민주당 한명숙 민주당 대표와 손을 잡았다. 총선을 앞두고 임종석이 당 사무총장이 되면서 총선 공천을 좌지우지했다. 권력투쟁 능력도 발휘하며 이후 86그룹은 민주당의 중심이 됐다. 당 대표를 제외하고, 원내대표, 사무총장 등 당의 요직을 독차지했던 것이다.

201620대 총선에선 김종인 비대위원장에게 잠시 주도권을 넘겨주었지만 문재인 당시 대선후보를 다시 세워 19대 대선에서 승리했고, 문재인 정부 내내 당과 권력의 중심에 자리했다.

하지만 현시점 86운동권 그룹은 실종상태나 마찬가지다. 이재명 전 대표가 당 장악을 위해 이들과 함께 정치 생명을 연장하려는 시도가 있기도 했다. 과거 송영길 전 대표의 서울시장 출마 역시 그런 시도의 일환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선 쇄신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국민의힘은 총선 당시 ‘86세대1980년대 대학을 다닌 1960년대생 운동권 출신으로 규정하고 이들이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주로 정치권에 수혈돼 문재인 정부를 거치면서 한국 정치권의 기득권 세대가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86세대 척결을 외쳤다.

이 대표와 악수나누는 이인영 의원, 뉴시스
이 대표와 악수나누는 이인영 의원, 뉴시스

86그룹 전대 불출마, 86그룹 붕괴될 수도

상황이 이렇다 보니 86그룹의 점진적 퇴진은 피할 수 없는 흐름이 됐고, 이번 전당대회를 통해 더욱 여실하게 드러났다. 이 때문에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에서 86운동권 그룹의 출마 가능성이 점쳐졌다. 86운동권이 거쳐온 정치 행보나 당내 위상을 고려할 때 전당대회 출마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평가가 나왔던 것이다.

22대 총선을 거치면서 원내 86그룹 비중이 크게 줄었고, 이들의 정치적 위상도 급감함에 따라 86운동권의 위상을 되찾기 위해서는 전당대회 출마가 필요해 보였다. ‘이번 기회에 민주당이 이재명 당이 아니라는 목소리를 내야 한다’, ‘전대에서 지더라도 건강한 목소리를 내야 당내 민주주의가 산다’, ‘86그룹이 이재명의 대안이 될 수 있다’, ‘전대에 나서지 않으면 86그룹 전체가 붕괴할 수 있다는 의견도 줄을 이었다.

이같은 맥락에서 1980년대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 초대 의장인 이인영 의원, 1기 부의장 우상호 전 의원, 3기 의장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 등 86그룹 중 한명이 전당대회에 출마할 것이란 전망이 이어졌다.

하지만 우상호 의원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고, 서울 중·성동갑 출마를 선언했던 임종석 전 비서실장은 민주당이 이 지역을 전략 지역으로 지정한 뒤 전현희 전 국민권익위원장을 공천하면서 22대 원내 입성이 무산됐다. 다만 두 사람은 모두 원외라는 점에서 통일부 장관과 원내대표를 지내고 22대 국회에 입성한 이인영 의원이 이재명 대항마로 강력하게 부상했다. 그러나 이인영 의원조차도 출마하지 않았다.

이재명 독주 인정하며 현실론 택한 86운동권

이에 86그룹이 오히려 현실론을 택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86그룹이 전당대회에 출마할 경우 개딸(이재명 극성 지지자)에게 집중공격을 받고 정치적으로 소모되고, 다음 기회가 없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는 해석이다.

86그룹 한 인사는 지금 이재명 쪽이 원하는 건 들러리다. 추대되면 책임도 100% 지게 되기 때문이라며 이인영이 나가서 떨어지면 이재명만 좋은 거 아니냐고 했다.

그래서일까. 86그룹 내에서는 지금은 이 전 대표에게 주도권을 줘야 하는 시기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오고 있다.

21대 국회에서 이 대표와 대화하는 우상호 의원, 뉴시스
21대 국회에서 이 대표와 대화하는 우상호 의원, 뉴시스

실제 86운동권 그룹인 우상호 전 의원은 어차피 결과는 이재명 전 대표가 유리한데 그렇다고 의도적으로 후보를 만들 필요는 없지 않나라며 누가 밀어서 억지로 나온다는 게 말이 되나, 그럴 필요는 없다고 밝혔다. 사실상 이재명 일극체제를 인정한 셈이다. 우 전 의원의 이 같은 발언은 이 전 대표가 지방선거 공천을 행사한다는 점을 의식한 발언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우 전 의원은 야권 내 서울시장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모습은 민주주의를 위해 격렬하게 싸웠던 86그룹의 본질을 상실했다는 비판으로 이어지고 있다. 야권 한 인사는 아무도 출마하지 않는 모습을 국민은 현실회피로 볼 것이라며 민주당에서 민주주의도, 패기도 사라졌다고 지적했다.

실제 최근 넷플릭스가 공개한 정치드라마 돌풍을 거론하며 86운동권을 향한 비판의 목소리도 이어지고 있다. 이 드라마에서는 재벌과 유착 관계에 빠진 경제부총리 정수진(김희애)와 그의 남편 한민호(이해영)를 통해 타락한 운동권을 그려냈다. 한민호는 학생운동권, 정확히 전대협 문화선전국장과 의장 출신으로 나온다. 민주당 관계자는 드라마가 인기를 얻는다는 건 대중의 공감을 샀다는 것이라면서 이 공감대는 대중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민주와 진보를 참칭하면서 자기 안의 민주와 진보를 잃어버린 몇몇 민주진영 정치인들에게 경고를 날리는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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