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대 전반기 국회의장 후보로 5선의 우원식 의원이 됐다. 당초 6선의 추미애 당선인이 무난하게 국회의장직에 오를 것이란 관측이 많았지만 빗나갔다. 우원식 의원이 선수도 낮고 대여 전투력도 추 당선인에 못미치지만  1차에서 선출됐다.

당초 추 당선인이 국회의장직에 오를 것으로 본 이유는 많았다. 비노.비문.반윤에 친명으로 돌아선 상황에서 윤석열 정부에 맞서 강하게 싸울 의장감이라는 게 주된 이유였다. 또한 사법리스크로 위기에 빠진 이 대표를 여의도 최전선에서 방어할 것이라는 기대감도 한몫했다. 6선의 친명 조정식 의원과 후보 단일화까지 하면서 어의추’(어차피 의장은 추미애)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추 당선인의 헌정사 최초 여성 국회의장의 꿈은 무산됐다.

DJ 제안으로 정치에 입문한 추 당선인은 이 대표만큼 정치 이력이 화려하다. 1996년 광진을에서 당선돼 5선을 했다. 또한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에 찬성했다가 역풍을 맞는 비운의 정치인으로 전락하기도 했다. 당시 여파로 추 당선인은 같은 해 열린 총선에서도 낙선했다. 이후 그는 2년 동안 미국 유학을 다녀오며 정치 공백기도 가졌다.

2015년 문 전 대통령이 대표로서 이끌었던 새정치민주연합(더불어민주당 전신)의 지도부에 지명직 최고위원으로 들어가 친문 핵심으로서 문 전 대통령 곁을 지켰다. 이후 그는 2016년 전당대회에서 54.03%의 득표율로 민주당 대표에 선출됐다. 당대표직 임기인 2년 동안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연달아 승리하며 민주당의 위상을 높였다. 특히 당시 최서원(최순실씨 개명 이름)씨의 국정농단과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이라는 초유 사태에서 정치력을 발휘하며 촛불정국을 이끈 일등공신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다.

조국 사태직후인 20201월엔 문 정부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되면서 윤석열 대통령(당시 검찰총장)과의 대립 국면으로도 주목을 받았다. 검찰인사를 통해 내부의 윤석열 사단을 솎아내는 것은 물론, 윤 대통령의 정직 2개월 징계도 주도했다. 이후 그는 같은 해 12법무부 장관으로서 소임을 다했다며 문 전 대통령에게 장관직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그러나 문 전 대통령의 핵심 측근이었던 추 당선인은 정권 교체 후부터 점차 친문에서 친명계로돌아섰다. 이 과정에서 정권교체 책임론을 들어 문 전 대통령을 새로운 타깃으로 집중 공격하면서 반문전사 로 거듭났다. 그리고 이재명 대표의 단식 정국 등에서도 힘을 실어주며 신친명계가 됐다.

결국 이 대표는 추 당선인을 지난 총선에서 전혀 연고도 없는 야권 강세지역인 경기 하남갑 전략공천을 했고 당선됐다. 6선에 오른 추 당선인은 총선에서 당선되는 순간부터 혁신의장을 내세워 강력한 국회의장 후보에 거론돼왔다. 측근들사이에서는 국회의장을 넘어 더 큰 꿈이 있다는 말도 흘러나왔다. 추 당선인은 이를 의식해 이 대표가 대권에 도전한다면 적극 도울 것이라고 말했다. 거꾸로 말하면 이 대표가 사법리스크로 중도낙마할 경우에 자신이 직접 나설 수 있다는 취지로 읽힐수도 있는 대목이다.

결과는 낙마. 추 당선인이 국회의장이 될 경우 가장 우려하는 것은 돈키호테식 자기정치였다. 특히 이 대표는 총선을 거치면서 당내 잠재적 경쟁자들의 싹을 다 잘랐다. 추 대표의 낙마는 포스트 이재명을 노릴 수 있다는 꿈이 결정적인 걸림돌로 작용한 게 아니냐는 시각이 나온다. 또한 당내 30여명에 이르는 친문 의원들의 비토도 한몫했다.

당 일각에서는 거야발 강대강 정치의 정점인 추미애 국회의장 카드가 향후 여야 협치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감도 작용했을 것이란 시각도 있다. 추 당선인이 후반기 국회의장직에 오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전반기 국가서열 2위의 꿈과 함께 차기 대권의 꿈도 함께 멀어지게 됐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