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보다 더한 난장판이던 22대 총선이 끝났다. 한 달 남짓 지나면 22대 국회가 시작된다. 시민단체들은 후보자들이 마구잡이식으로 던졌던 공약을 두고 4년 후 다시 이행 여부를 가릴 것이다. 하지만 공약한 자나 판단하는 자나 소용없는 일을 하는 셈이다. 만들어진 공약이 대부분 엉터리인데, 그 엉터리 공약 이행 여부를 두고 성적을 매긴다는 것 자체가 부질없기 때문이다. 농부들이 농막 하나 만들어도 이것저것 계산하고, 예산도 따져서 만든다. 그런데 수십, 수백, 수천억짜리 공약을 불과 며칠 만에 뚝딱 만든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장담컨데, 본인도 내용을 잘 모르고 한 공약이 태반일 것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책과 공약에 대한 철저한 사전 검증도 없이 대파나 흔들면서 투표장에 드나든 국민 수준이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공약(公約)은 그야말로 국민에 대해 하는 공적 약속이다. 그만큼 구속력이 있어야 하고, 실현 가능성도 높아야 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공약을 단시간에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법안 하나 만들어서 본회의를 통과하는 데만도 수년이 걸리는 국회다. 이런 나라에서 수년, 십수 년이 걸리는 공약을 내던진다는 것 자체가 국민을 기망하는 것이다. 게다가 그들이 하는 공약이란 것의 대부분은 기존에 정부나 지방자치단체 치원에서 진행 중이거나 진행할 예정인 사업들이 대부분이다. 정책공약에도 저작권법을 적용한다면, 아마 대부분의 국회의원이 저작권법 위반으로 기소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현재와 같은 식의 공약 발표나 공약 이행 여부를 검증하는 과정과 절차는 개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정치인은 정책을 집행하는 관료집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계획에 의해 만들어진 사업들은 관료집단들이 투명한 절차와 과정을 통해 성실하게 집행하면 된다. 정치인은 그런 일을 하라고 존재하는 집단이 아니다. 정치인은 (비전)’을 보여주는 사람이다. 대다수 국민의 눈에 지키지 못할 허황된 공약으로 보여도, 공약을 내건 후보자의 눈엔 반드시 해낼 수 있는 실현가능한 공약이라는 확신이 드는 경우는 어떤가. 모두가 라고 할 때 아니라고 할 사람도 필요하지만, 모두가 아니라고 할 때 라고 할 사람도 필요하다. 정치인만이 자유롭게 그런 꿈을 꿀 수 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사람’. 이런 사람을 일러 선지자, 개척자라 한다. 오늘날 도박의 도시 라스베이거스의 기초를 닦은 사람 중에 큰 역할을 한 벤저민 벅시 시걸(Benjamin Bugsy Siegel)이다. 비록 마피아 중간보스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한 미래와 가능성을 봤다. 그것이 오늘날의 라스베이거스를 만들었다. 이렇게 선구적인 혜안(慧眼)을 가진 사람들의 사례는 숱하게 많다. 세계적인 부를 이룬 뛰어난 사업가들의 특징 중 하나도, 남들이 보지 못한 미래를 미리 내다보는 혜안이다.

물론 공약 하나하나에 재정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 등을 요구하는 선거관리위원회, 매니페스토(manifesto) 관련 시민단체, 언론 등의 감시활동은 긍정적인 면도 많다. 하지만 정치인들의 상상력까지 지나치게 제약하고, 그것이 결국 인류 또는 국가가 이뤄나가야 할 담대한 비전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할 수 있다. 꿈을 크게 꾼 것이 결격사유가 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4년 안에 지킬 수 있는 공약만 하라면, 그런 사회에서 무슨 번영의 싹을 틔울 수 있겠는가. 우리가 허언(虛言)의 대명사처럼 불렀던 허경영 후보의 황당 공약중 시간이 흘러 현실의 정책으로 실천된 경우가 적지 않다. 어쨌거나 그는 남들이 보지 못한 세상을 미리 본 셈이다.

국회의원, 대통령의 공약이란 것이 정부 부처나 지방자치단체가 추진하는 사업의 연장선상에만 머문다면, 사실 공약은 소용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관료들이 보지 못하는 새로운 미래, 새로운 세상을 내다보고 큰 그림을 그리는 것이 정치인의 존재 이유다. 인류를 진보시키는 숱한 과학계의 발명 역시 필부들의 눈에는 엉뚱한 상상이 그 단초였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풍부한 상상력으로 새로운 세상, 새로운 미래를 제시하는 정치적 상상력까지 과도하게 금기시하는 현재의 공약 검증 환경이 안타깝다.

정치인들이 자유롭게 꿈꾸도록 해야 한다. 그들의 놀라운 상상력이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낼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정치인들의 꿈의 크기가 줄어들면, 진보와 변화, 발전의 폭도 그만큼 줄어든다. 그들에게 을 허락하라. 그것이 결국 언젠가는 우리 모두의 꿈이 될지 누가 알겠는가. “아이디어를 내고 실험해 볼 생각은 없이, 책에서만 답을 찾고 권위에만 의존하면 창의가 죽는다. 창의력이 죽으면 변화도 없다.”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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