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역사는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를 극복하기 위한 도전과 응전의 과정이다.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는 자유주의를 억압했으나 1880년대에 세계 최초로 의료보험, 산업재해보험, 연금보험 등 사회보장제도를 시행함으로써 독일 정부가 국민의 복지를 책임지는 복지국가의 길을 선택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의료보험제도를 도입함으로써 대한민국이 오늘날 세계 최고 수준의 의료 시스템과 의사양성 시스템을 갖추게 되었다. 외국인이 한국에 와서 가장 부러워하는 게 건강보험 시스템이다. 한국은 OECD 국가에서 의료 접근성이 제일 높은 나라이며, 임상의학 부문의 의료수준은 미국에 버금간다.

의료보험제도가 국민을 상대로 제대로 시행되기 시작한 것은 1963년 의료보험법이 제정된 지 14년이 지난 1977년부터이다. 1,500명 이상의 사업장에 직장 의료보험제도가 처음 실행된 것이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몸이 아플 때 병원 진료비가 과중한 부담이 되어서 약국에 가서 약으로 때우던 상황을 직시했고, 의료기관이 환자가 돈이 없다는 이유로 진료를 거부해 사망자가 속출하자 14년 동안 유예했던 의료보험법을 전격적으로 시행했다. 당시 예산이 부족했던 정부는 의료보험제도 도입에 필요한 재원을 전적으로 대기업에 의존했다. 대기업 종사자 중심의 의료보험제도가 처음 시작된 이유이다.

지역 의료보험은 1988년 1월 농어촌 주민을 시작으로 1989년 7월 도시자영업자로 확대되어 마침내 전국적 의료보험이 달성되었다. 우리나라는 1977년 7월 처음 직장 의료보험을 시작으로 1989년 7월 지역 의료보험으로 확대 적용해 전국적인 의료보험 실시까지 12년이 걸렸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의 전국민 의료보험 확대까지는 100여 년, 일본의 전 국민 의료보험 달성까지는 36년이라는 기간이 소요된 것과 비교하면 세계 유례없는 단기간의 성과였다.

박정희 정부하에서 의과대학 신설도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1950년대에는 전국에 의과대학이 8개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서울에 다섯, 부산·대구·광주에 각각 한 곳이 전부였다. 이후 박정희 정부에서 의대는 19개로 늘었고, 전두환 정부에서 30개로, 김영삼 정부에서 40개의 의과대학 체제가 완성됐다. 역대 보수 정권이 국민의 건강과 복지를 위하여 일을 했다는 증거이다. 이것이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좌파 정권 이후 그대로 유지되어 오고 있다.

역대 정부가 주저했던 의료개혁을 윤석열 정부가 필수의료 및 지역의료 개선을 명분으로 의대 증원에 착수했으나, 지난 2월 20일 의대 2천 명 증원에 반대하는 전공의 이탈 장기화로 의료체계 기반이 무너질 위기에 놓였다. 의대 증원 정책이 의정 갈등과 전공의 공백, 의료진 이탈로 이어지면서 지방 대학병원과 지역 종합병원이 가장 큰 타격을 입고 있다. 대학병원이 ‘전문의 중심’으로 운영된다는 전망에 지방의대 교수 중 상당수가 수도권 대형병원으로 옮겨가고 있어 의대 증원으로 지역 간 의료 격차가 더욱 커질까 우려된다.

설상가상으로 근근이 버텨오던 비상진료체계가 응급의료에서부터 마비가 오기 시작하여 응급 환자가 받아줄 병원이 없어 뺑뺑이를 돌다 사망하는 사고가 잇따르고 있다. 의료진 내부 인력을 재편해 응급의료에 추가 투입하는 방안 등 다각도의 대책이 필요한 상황이다. 응급실만큼은 제대로 가동되도록 하는 것이 정부의 책임이다.

정책은 선의(善意)로만 성공할 수 없다. 정부는 27년 만에 의대 증원이라는 중요한 정책을 추진하면서 예상치 못한 파생 문제에 대해 미리 대비책을 세워놓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 지난 7월 국회에서 “의료공백이 이토록 오래 지속될 것은 예상하지 못했다”고 밝힌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정부는 필수의료 인력 확보를 위한 긴급 지원책, 수련병원 정상화, 의대 교육의 질적 보장을 위한 현실적인 대책을 조속히 제시해야 한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2026학년도 의대 증원을 유예하자는 안을 대통령실에 전달했다고 한다. 내년도 의대 정원은 정부 결정대로 기존(3,058명)보다 1,509명 늘려 뽑되, 그 이듬해에는 다시 3,058명만 뽑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의료현장 불법 이탈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의대 정원을 늘리지 않고 의사 부족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는가. 정부도 증원 규모를 재논의할 수 있다는 열린 입장이니, 이탈 전공의들은 ‘증원 백지화’ 주장을 거둬들이고 의료현장으로 당장 돌아오는 게 마땅하다.

일요서울 논설주간 우 종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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