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은 집권 후 미국, 일본과의 긴밀한 협조체제를 구축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고, 그 일환으로 1964년 초 한일국교정상화의 조기 타결을 추진했다. 긴축정책 및 외화 부족으로 심한 어려움을 겪을 때였다. 미국도 강력히 한일 수교를 지원했다. 하지만 야당과 대학생들의 강력한 역풍(3·24데모, 6·3사태) 때문에 국교정상화는 1년 넘게 지연되고 있었다.

65년 5월18일. 미국을 방문한 박 대통령은 기자클럽에서 한·일국교정상화에 대해 이렇게 연설했다. “이 긴박한 국제사회의 경쟁 속에서 우리는 지난날의 감정에만 집착해 있을 수는 없다. 아무리 어제의 원수라 하더라도 오늘과 내일을 위해 필요하다면 손을 잡는 것이 현명한 대처가 아니겠는가.”

우여곡절 끝에 한국은 일본 식민 지배로부터 해방된 지 20년 만인 65년 12월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했다. 그때 당시 야당은 ‘일본이 무서워서 교류할 수 없다’, ‘일본과 교류하면 잡아먹힌다’는 논리로 한일협정을 반대했다. 박 대통령은 반대자들을 설득했고, 한일국교정상화의 영단(英斷)으로 경제발전의 불씨를 댕겼다.

우리 정부는 한일협정으로 무상 3억 달러, 일본 정부차관 2억 달러, 민간 상업차관 1억 달러(후에 3억 달러로 늘어남)를 제공받게 됐다. 금액보다도 물자와 인력의 교류 통로가 열렸다는 게 더 중요했다. 단기적으로는 일본산 자본재와 부품을 들여와 한국에서 조립해서 미국에 수출하는 ‘3각 무역체제’가 성립했다. ‘조립 가공형’ 무역과 산업의 탄생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마침내 한국경제는 산업발전사(史)에 본격적인 ‘극일(克日)의 역사’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일본으로부터 받아낸 청구권자금은 포항제철 건설에도 요긴하게 쓰였다. 연산 60만t 규모의 종합제철소를 짓기 위해 한국은 67년 3월 대한(對韓)국제차관단을 결성했으나, 세계은행과 미국수출입은행은 “경제성이 없다”는 이유로 포항제철에 대한 차관 제공을 거부했다. 바로 그때 해결책을 찾아낸 것이 대일청구권 자금이다. 포철에 들어가야 할 외화는 1억6천8백여만 달러였는데, 박 대통령은 청구권자금을 포항제철 건설에 투입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해공(海公) 신익희 선생은 독립운동, 임시정부 활동, 건국 과정에 참여한 민주당의 시조 격이며, 초대 국회에서 민주당의 원조인 대한국민당을 창당한 ‘진보의 아버지’다. 1956년 대선을 앞둔 시점에 당시 민주당 대선후보 해공은 한 강연회에서 “만약 내가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일본 지도자들과 회담할 용의가 있다” “한·일 양국 정부는 무엇보다 먼저 부당한 감정을 청산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장면 총리는 ‘한국의 경제개혁 비망록’을 작성해 미국 국무부에 전달했다. 이 문서에는 물자부족 문제해결을 위해 대일무역 확대를 추진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일본과 국교 정상화를 시도할테니 미국이 도와달라는 메시지였다. 이 계획서는 박정희의 ‘경제개발 5개년계획’ 수립의 방향등이 되었으며, 1965년 한·일 협정의 촉진제가 되기도 했다.

이처럼 해공과 장면은 일본에 대해 실용주의에 근거해서 극일(克日)·용일(用日)하려 했다. 그런데, 그들의 진보 적통을 이어받았다고 자랑하는 민주당의 ‘친일잔재 청산’ 강조는 위선적인 ‘사이비 민족주의’이다. 지난 8월 15일. 제79주년 광복절 경축식이 정부와 여당, 광복회와 야당 두 쪽으로 따로 열렸다. 광복절 행사가 이렇게 양단(兩斷)된 것은, 1949년 광복절 제정 이후 초유의 사태로 참담하기 그지없다.

이종찬 광복회장은 “진실 왜곡과 친일사관이 판친다”고 광복절 기념식을 파탄 냈고, 일본의 식민 지배기에도 나라를 잃은 적이 없다고 강변하는 데, 이런 주장은 궤변이며 국론분열 행위이다. 오죽하면 유정복 국민의힘 시도지사 협의회장이 이 회장의 사퇴를 촉구했겠는가. 야당의 반일 선동은 더 망국적이다. 박찬대 민주당 대표 직무대행은 “정신적 내선일체 단계에 접어든 친일 매국 정권”이라고 했고,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는 “윤 대통령은 조선총독부 10대 총독이자 왕초 밀정”이라고 망언을 했다.

한일관계는 1965년 국교 정상화 이후 많은 갈등 속에서도 늘 미래지향적으로 발전해왔다. 윤석열 대통령이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셔틀 외교를 복원하여 1965년 국교 정상화 이래 가장 바닥에 있던 한일관계를 정상화에 재진입시킨 것은 외교 성과이다. 내년이면 해방된 지 80년이 된다. 1948년 건국을 부인하는 건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일이다. ‘친일’ 프레임을 국내 정치에 악용하는 것은 애국선열과 미래세대에게 죄를 짓는 일이다. 역사를 내다보고 통일조국을 생각하는 성숙한 한일관이 필요하다.

일요서울 논설주간 우 종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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