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은 조선의 성지. 이곳에 조선신궁을 둔 의미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조선과 일본의 성지 대체다. 신궁은 가장 격이 높은 일본 신사다. 일본 건국 신화에 나오는 태양의 신, 아마테라스와 메이지 천황을 신으로 봉안하는 신사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인에게 강제로 1년에 두 차례씩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심지어 남산을 지나는 전차에서는 안내인의 구령에 맞춰 경의를 표해야 했다. 단순 종교 시설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남산에서 본 서울 풍경.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남산에서 본 서울 풍경.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남산은 조선의 성지’. 일제가 이곳 조선신궁을 둔 까닭은...
- 목멱산은 남산의 옛 이름. 도성의 남쪽에 위치해 연원

아직 남산에는 조선신궁 흔적이 남아 있다. 한양도성 유적전시실 바로 위에 있다. 하이덴(拜展) 터와 하이덴의 기초 구조물이 그것이다. 상세하게 설명하면, 펜스로 둘러쌓은 넓은 공터에 유리 뚜껑에 덮인 5개의 구멍이 있다. 조선신궁 터임을 알 수 있는 유일한 흔적이라고 한다. 하지만 겉으로 봐서는 그것이 건물 구조물이라는 것을 알아채기가 쉽지 않다.

하이덴, 신사의 혼덴 일반인 출입 금지구역

하이덴은 신사의 혼덴(本殿·제신과 제신을 상징하는 신체(神體)가 모시는 건물, 일반인의 출입 불허) 앞에 있는 건물로 참배자가 기도를 드리는 장소이다. 신궁에서 가장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는 건물이다. 조선신궁에는 하이덴과 혼덴을 비롯하여 15개 건물이 있었다. 그 건물은 지금의 힐튼호텔 근처부터 명물 중 하나인 남산 계단앞까지 흩어져 있었다.

광복 후 조선신궁은 헐렸다. 이 자리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동상을 세워졌다. 탄신 80주년을 기념한 것이었다. 그 높이가 25m에 이르렀다. 동양 최대의 동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거대한 동상은 4·19 혁명 때 성난 군중에 의해 이승만 독재정권과 함께 끌려 내려왔다. 이 자리에는 1969년 남산식물·동물원 그리고 분수대 등 국민 위락시설이 들어섰다.

조선신궁터.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조선신궁터.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으로 본 조선신궁.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으로 본 조선신궁.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이런 발상은 받은 대로 돌려준다라는 심경이 배어 있다. 일본은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격하시켰다. 여기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조성했다. 유락 시설로 만든 것이다. 일본이 했던 것처럼 일본의 상징인 조선신궁에 식물·동물원을 지었다. 궁궐을 유린한 일본의 만행에 앙갚음한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유치한 자존심 싸움이 낳은 불편한 역사인 셈이다.

남산 되살리기 프로젝트 옛 한양도성 '흔적'

근대의 소용돌이 속에 조선의 역사와 유적은 땅속에 묻혔다. 조선신궁과 남산 분수대, 그리고 식물·동물원의 조성과 철거과정에서 남산 자락에 쌓았던 성벽의 상당 부분은 사라졌다. 다행히 2009남산 지형 되살리기 프로젝트추진과정(발굴조사 2013~14)에서 사라진 줄 알았던 남산 한양도성이 발견됐다. 숭례문에서 시작해 남산 정상까지 이어지는 남산 남서쪽 구간이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시설이 있다. 스트리트 뮤지엄인 한양도성 유적전시관이다. 전시관은 남산 분수대와 하이덴 터 아래에 드러난 성벽이다. 스트리트 뮤지엄은 발견 상태 그대로 한양도성 유구를 전시하고 있다. 전시관의 길이가 무려 189m에 달한다. 특히 14세기부터 19세기까지 달라진 성벽 건축양식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그만큼 역사적 가치가 크다.

한양도성유적 전시실.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한양도성유적 전시실.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지금부터는 본격적인 산행이다. 남산의 명물인 남산 계단을 올라야 한다. 정상인 팔각정까지 330개 계단이 있다. 산행을 즐기는 필자도 한두 번은 숨을 고르기 위해 허리를 펴야 한다. 다행히 숨이 차오를 즈음에는 어김없이 쉼터 겸 전망대가 나타났다.

서울의 풍경이 아름답다. 어깨동무한 안산, 인왕산, 북악산 뒤로 북한산, 도봉산, 수락산이 병풍처럼 감싸고 있다. 파노라마처럼 이어지는 마천루에 호젓한 남산의 소나무 숲의 어울림이 일품이다. 저 멀리에 청와대도, 경복궁도, 그리고 필자가 근무했던 신문사도 눈에 들어온다. 산의 정취를 오롯이 느끼면서 아름다운 도시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어서 좋았다.

도성안은 중구, 도성밖은 용산구

갑자기 성곽이 눈에 들어왔다. 어느새 계단의 담장이 되어 있다. 백범공원에서 사라졌던 바로 그 도성이다. 순간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곽은 도성의 경계다. 필자는 도성 안을 걷고 있다. 도성 안은 행정구역상 중구다. 도성 밖은 용산구다. 어쩌거나 탐방의 출발지인 서울역도, 목적지인 남산 정상도 용산구인걸.

남산 계단의 막바지에 이르자 카페와 케이블 정류소가 나왔다. 펜스와 전망대 난간에는 자물쇠가 빼곡히 매달려 있다. 아니 자물쇠 천지였다. ‘사랑의 자물쇠. ! 젊은이 사이에서 남산에 자물쇠를 거는 게 로망이라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난다. 자물쇠에 적힌 메시지를 둘러봤다. “아이를 낳고 다시 오자”, “헤어지지 말자. 사랑해……. 달콤하다. 젊음이 부럽다.

목멱산 봉수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목멱산 봉수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어느새 정상에 도착했다. 남산의 높이는 해발 265.2m. 수령이 백 년을 넘었을 것 같은 고목이 그늘을 준다. 다시 올라온 계단을 내려다봤다. 수많은 상춘객이 줄을 이어 계단을 오르고 있다. 남산이 사랑받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계단 끄트머리 왼편에는 목멱산 봉수대가 있다. 전국 각지의 소식을 들을 수 있게 한 봉수대가 마지막으로 멈추는 곳이다. 통신시설의 집결체인 셈이다. 경봉수(京烽燧)라고 부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봉수제도는 신호계에 따라 연기나 불을 피워서 변방의 긴급한 사정을 중앙까지 전달하여 알린다. 재난 지역의 주민도 빨리 대처하도록 하는 일종의 통신시설이다. 지금의 목멱산 봉수대는 남산에 있던 5개 중 하나다. 김정호 선생이 그린 지도, 청구도등을 참고해서 다섯 개 봉수대 중 하나를 복원한 것이다.

목멱산은 남산의 옛 이름이다. 남산은 도성의 남쪽에 있다고 그렇게 불렸다. 이외에도 인경산, 종남산, 열경산, 마뫼, 잠두봉 등 여러 가지 이름이 있었다. 11시부터 1230분까지 매일(월요일 제외) 조선시대 외적의 침입과 위급한 소식을 중앙에 전하는 봉수 의식을 재현한다고 한다. 늦게 오는 바람에 봉수대 거화(횃불) 의식을 볼 기회를 놓쳤다.

팔각정 앞 전통무예 시범공연’ 24반 무예

무예공연.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무예공연.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하지만 그에 못지않은 볼거리를 관람하는 행운을 얻었다. 팔각정 앞 광장에서 전통문화 재현행사 중 하나인 전통 무예 시범 공연이 벌어지고 있었다. 일명 ‘24반 무예란다. 공연 안내자의 설명에 의하면 ‘24반 무예정조(14, 1790)가 이덕무, 박제가, 백동수 등의 학자와 무관이 주도하여 편찬한 무예도보통지에 수록된 24가지 기예라고 한다.

긴 칼과 월도를 휘두르며 몸을 날리는 모습은 무예같이 보이지 않았다. 곡예에 가까웠다. 또 긴 칼을 다루는 다른 한 단원은 마치 춤을 추는 듯한 칼을 휘둘렀다. 짚단, 대나무 등을 단번에 절단하는 시범을 보였을 때 팔각정에 모인 청중들은 우레와 같은 환호를 보냈다. 땀을 흘리면 남산 정상에 올라온 보람이 있었다. 공연이 끝나자 사람들이 흩어지는 가운데 사진작가한 분이 필자에게 말을 걸었다. 샘플 사진을 목에 걸고 있는 것을 보니 호객행위였다. 추억이 떠오른다. 사진기가 흔하지 않던 시절 명소 나들이를 할 때면 으레 한 컷의 사진을 남기곤 했다.

국사당, 국가의 안녕을 비는 수호신사

남산 정상을 흔히 팔각정이라고 부른다. 원래는 국사당이 있던 자리다. 국사당은 국가의 안녕을 비는 수호 신사(守護神祠). 국가의 제사를 모시는 사당이라는 얘기다. 국사당은 남산(목멱 신사)과 북악산(북악 신사) 두 곳밖에 없다. 고종 때까지 국가의 제사를 모셨다. 그만큼 중요한 국가시설이었다.

하지만 목멱 신사(국사당)는 일제에 의해 인왕산 선바위 아래로 옮겨졌다. 1925년 일이다. 조선신궁(神宮)보다 위쪽에 목멱 신사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게 그 이유다. 광복 이후 목멱 신사가 있던 자리에는 팔각정이 들어섰다.

사랑의 자물쇠.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랑의 자물쇠.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하지만 우리가 흔히 칭하는 남산 팔각정이 아니다. 지금의 팔각정은 1968년에 다시 지어진 것이다. 그전에 팔각정은 이승만 전 대통령의 호를 따 우남정이라고 불렸다. 우남정 옆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동상도 있었다. 사실상 남산이 이승만 전 대통령의 정치선전장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우남정과 동상은 백범공원에 있던 동상과 함께 4·19혁명 때 헐렸다.

남산 서울타워를 올려다보았다. 서울의 랜드마크로 손색이 없다. 남산의 매력의 마침표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서울타워 전망대에 오르지 못한 아쉬움은 남는다. 하지만 남산 등산은 그 자체가 역사 탐방이고 자연 체험이었다. 서울의 자연과 문화 그리고 남산의 아름다움을 느낄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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