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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이상우의 정치 추리 소설-방원, 복수의 칼] 32

2024-08-30     이상우 작가

“역적모의를 한 주제에 무슨 변명이 그렇게 많은가? 여봐라, 저 역신의 입을 영원히 봉하라!”
방원이 그렇게 말하고 말고삐를 돌렸다.
“대군…….”

정도전의 절규가 채 끝나기도 전에 종 소근이 들고 있던 칼로 정도전의 가슴을 찔렀다.
“으음……. 네 놈들이…….”
정도전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소근이 다시 들고 있던 철퇴로 그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붉은 피가 사방으로 튀는 처참한 모습을 횃불이 비추고 있었다.
“왕, 왕후 마마…….”

정도전은 말을 잇지 못한 채 땅에 엎어졌다. 그 위에 소근이 다시 짓이기다시피 철퇴질을 해댔다.
뒤에 멀리 서서 이 지옥 같은 모습을 보고 있던 김용세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끔찍한 광경이었다. 그는 정안군 방원을 다시 생각했다. 진취적이고 사려 깊은 장부요, 정의를 숭상하는 무장으로만 알았는데 그의 심장이 저토록 잔인무도한가?

그리고 그를 따르는 자들은 마치 피에 굶주린 이리 같지 않은가? 저런 사람이 정권을 휘두르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면서도 겁에 질려 꼼짝하지 못하는 자신을 불쌍하게까지 생각했다.
이렇게 하여 고려의 형부상서 정운경(鄭云敬)의 아들로 태어나 우여곡절 끝에 이성계와 함께 조선을 일으키고 제도와 문물의 개혁을 주장하던 당대의 인물 봉화백 정도전은 50대의 나이로 처참하게 죽었다.

정도전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선혈로 물든 수잔방 솔재, 일타의 집 앞 유혈 참살은 계속되었다.
“나는 이무다. 죽이지 마라!”
불타고 있는 일타의 집 대문 밖으로 상투 바람의 남자 한 명이 뛰어나오며 소리질렀다. 그는 정도전과 방원 양 진영을 오가며 강한 편에 끼어든 참찬 문하부사였다.
“어이쿠! 나는 이무다!”

“이숙번의 갑사가 활을 쏘았다. 화살이 빗나가 이무의 왼쪽 팔에 꽂혔다.
“쏘지 마시오. 나는 정안군 나으리를 모시는 이무요.”
그가 숨 넘어 가는 소리를 하며 왼팔을 움켜쥐고 피가 흥건한 골목길에 나섰다.
“그를 죽이지 말라!”
방원이 소리쳤다.

“이무 대감을 쏘지 말라!”
정안군의 종 김부개金夫介가 복창을 했다. 이무는 뛰어와 방원 앞에 엎드렸다. 그때였다. 불타는 지붕 위에서 불을 끄는 남자들 중의 한 사람을 마천목이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기 지붕 위에 있는 놈이 남은이다. 죽여라.”

여러 집이 불타고 있었기 때문에 수진방 일대는 대낮처럼 밝았으며 아녀자와 종들이 자다가 일어나 울부짖으며 동네를 헤매기도 하고 불을 끄느라 필사적으로 달려들기도 했다. 이경二更이 가까운 심야, 김용세는 떄 아닌 연옥이 여기로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자 빨리 여기서 도망치고 싶었다.

갑사들과 칼을 든 종들이 지붕 위로 달려갔다. 이숙번이 활을 쏘았으나 빗나갔다. 불을 끄는 척하고 있던 사나이는 쏜살같이 지붕에서 뛰어내려 사라져 버렸다.
한편 남산 밑 정안군의 집에서는 멀리 불길을 보면서 불안으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저기가 어디쯤이냐? 웬 불이야? 저기가 혹시 대궐이 아니냐?”
부부인 민씨가 가만 있지를 못하고 대청마루 끝에서 있다가 대문 밖까지 달려 나가기도 했다.
그쪽에서 보면 수진방의 불길은 대궐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봐라, 거기 아무도 없느냐?”
민씨가 목청을 높였다.
나이 많은 여종이 달려왔다.

“불러계시옵니까? 부부인 마님.”
“빨리 등불을 잡고 나오너라. 내가 저쪽으로 가야겠다.”
“안 됩니다, 마님. 큰일 납니다. 장안에는 지금 난리가 났는데 어떻게 나가신다고 하십니까?”
종이 펄쩍 뛰었다. 그러나 민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 나으리께서는 목숨을 걸고 큰일을 하고 계신데 내가 비록 아녀자이지만 지아비의 일을 어찌 모른다고 하겠는가. 빨리 앞장서라!”

민씨의 고집이 워낙 강경한지라 종들이 하는 수 없이 나설 차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한 사나이가 허둥지둥 어둠 속으로 달려왔다.
“마님! 부부인 마님.”
그는 손에 옷가지 같은 것을 들고 있었다. 정안군을 따라 갔던 종 김부개였다.
부부인 민씨가 달려나왔고 종들이 등불을 밝혔다.
“너는 부개가 아니냐? 그래 정안군 나으리는 어떻게 되셨느냐?”
민씨가 다급하게 물었다.

“나으리는 지금 놈들을 멸살하는 일을 진두에서 지휘하고 계십니다. 정도전은 이미 나으리의 명으로 요절이 났습니다.”
“봉화백이 죽었다고? 그게 정말이냐?”
민씨는 다그쳐 몇 번이나 다시 물었다.
“이것이 봉화백의 옷과 갓입니다.”
김부개는 들고 온 옷가지와 갓을 펼쳐보였다. 갓은 찌그러져 있었고 옷은 여기저기 검붉은 선혈로 얼룩져 있었다.

“이것이 진정 삼봉의 옷과 갓이란 말이냐?”
민씨는 그것을 마치 흉물이나 되듯이 찡그리고 보면서 말했다.
“제가 마님께 대역 죄인이 처단된 것을 알리기 위해 일부러 가지고 왔습니다.”
“봉화백이 죽었으면 일은 성취된 것이나 다름없다. 얘들아, 그 흉측한 갓과 옷은 멀리 가서 불살라 없애라. 그리고 방으로 들어가자.”
“마님, 그럼 도성에는 나가시지 않는 것인지요?”
여종이 물었다.

“일이 잘되어 갈 때는 아녀자가 나서지 않는 것이 좋은 일이니라.”
그렇게 해서 민씨는 방안으로 다시 들어가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
한편 대궐 안에서도 긴박한 상황은 계속되었다. 그날 밤 숙위(宿衛) 책임자로 금군과 갑사들을 지휘하고 있던 박위는 궁의 사문에 경비를 강화하고 장안의 반군을 타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궁전 안에 보관하고 있던 갑주와 무기들을 끄집어내서 정비하기도 했다.
“대감, 수진방의 정 대감 집 부근에 맹렬한 불길이 일고 있습니다. 아마도 큰 화재가 난 것 같습니다.”

바깥 동정을 살피던 산원 한 사람이 급히 박위 앞에 와서 보고했다.
“빨리 정탐병을 내보내 실상을 알아보아라.”
그가 급히 지시하고 있을 때 승정원 승전색이 달려와 일렀다.
“전하께서 밖의 동정을 보고하랍십니다.”
박위는 곧 근정문 안으로 들어가 사정전과 강령전을 지나 등촉을 휘황하게 밝힌 교태전 섬돌 앞에 이르렀다.

“그래 밖의 동정이 어떠하오?”
마루에 있던 홍안군 이제가 물었다.
“수진방 정 대감 집 부근에 큰 불이 난 줄 아룁니다.”
“누가 질렀다고 합니까?”

“그것은 아직 알 수 없으나 역모를 꾀한 자들의 짓이 아닌가 합니다.”
“역모라니, 그게 누구를 가리키는 말이오?”
“아직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안산 지사 이숙번이 두령인 것 같습니다.”
박위가 자신없이 말했다. 
 

[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