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카지노

[연재-이상우의 정치 추리 소설-방원, 복수의 칼] 29

2024-08-09     이상우 작가

왕의 신열은 좀처럼 내리지 않았고 게다가 해소까지 겹쳐 가끔 비몽사몽을 헤매기도 했다.

“현비! 현비! 어서 이리오오.”
가끔 이렇게 현비의 환상이 보이기도 했다. 왕은 교태전의 사방을 둘러보았다. 궁을 처음 지어 들어왔을 때 현비는 이 교태전에 주로 있었으나 나중에는 강령전의 서침을 주로 침실로 사용했다.

왕의 곁에는 어린 세자 방석과 세자빈 심씨가 무릎을 꿇고 지키고 있고 조금 떨어져 홍안군 이제와 무안군 방번, 그리고 전의감 양홍달이 앉아 있었다. 제조 상궁과 승지, 김사행 등은 밖에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가 받들던 천축국 불상은 어디로 갔습니까? 그 앞에 가서 빌어보겠어요.”
세자가 현빈 심씨를 보고 말했다. 그러나 빈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비취 불상은 현비가 가지고 갔느니라.”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 왕이 대답했다.
“예? 어마 마마께서 가지고 가셨다고요?”

세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설명해 주지 않았다.
“내일 날이 밝거든 흥천사에 연락해 정릉에 가서 불경을 읽도록 하여라.”
왕은 몇 번이나 쉬어 가면서 말을 했다. 그때였다.
동궁에 있는 상궁 한 사람이 들어와 세자의 귀에다 무어라고 말했다.
“무엇이? 대궐로 말 탄 사람들이 몰려온다고?”

세자가 겁에 질려 큰 소리로 말하는 바람에 방 안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놀라고 말았다.
무안군 방번이 벌떡 일어나 나가며 소리쳤다.
“정안군이 마침내 일을 저질렀구나!”
그때 가만히 있던 왕이 일어나 앉았다.
“무슨 소란이냐? 도승지 게 있느냐?”
“예, 전하.”

도승지 이문화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봉화백은 지금 어디 있느냐?”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만 집으로 초패를 보내는 것이 어떠할지요?”
“중추원 당상관 누구 있거든 시켜서 봉화백을 빨리 찾아오너라.”
이문화가 급히 나가자 방번이 다시 들어왔다.
“궁 안에 있는 군사를 모아서 무찔러야 합니다. 전하.”

그러나 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한참 만에 왕이 입을 열었다.
“지금 몰려오고 있다는 기병이 누구의 병사인지도 정확히 모르지 않느냐? 또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고……. 그런데 덮어놓고 군사를 끌고 나가 싸우자는 말인가? 삼군부 도통사인 봉화백이 올 때까지 기다려라.”
삼군부 도통사는 실제 정도전이 겸하고 있는 많은 직책 중 하나이다.
숨 막히는 순간이 흐르고 있었다. 왕은 정사가 위급해지자 당신이 병중이라는 것도 잊은 것 같았다.
“봉화백은 어떻게 되었느냐?”

 

왕이 독촉을 했다. 시간은 벌써 2경에 이르렀다고 누국에서 통지가 왔다. 그때 김사행이 급히 들어왔다. “전하! 일을 저지른 사람은 지안산군사 이숙번인 줄 아룁니다. 그 자가 정안군을 업고 일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뭐야? 방원이와 이숙번이?” 왕은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고 누워버렸다. 세자와 무안군이 밖으로 나왔다. “예빈시(禮賓侍)에 누구 없느냐?”

 

세자의 말을 들은 상궁이 예빈시 소경(少卿)인 봉원량(奉元良)을 데리고 왔다. 예빈시란 원래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기구였으나 세자궁의 일을 맡아 하기도 했다.
“너는 빨리 광화문 누에 올라가서 저들의 군사가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고 오너라.”
세자의 명을 받은 그가 쏜살같이 홍례문과 영제교를 지나 광화문으로 갔다.
그 사이 세자는 그날 밤 궁내 직숙인 도진무 박위를 불렀다. 박위는 갑옷 차림으로 급하게 달려왔다.
“지금 일이 위급하게 되었으니 숙위(宿衛)하는 군사를 모두 불러 모으시오. 그리고 전화를 호위하는 갑사들도 다 모이게 하시오.”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숙위병과 별시위병은 물론이고, 내노들도 모두 모아 싸울 태세를 갖추시오.”
급히 돌아서 가는 박위의 뒤통수에 대고 세자가 황급히 소리쳤다.
“모두 몇 명이나 되오?”

박위가 돌아서서 우물쭈물하다가 대답했다.
“한 5백 명 될 것입니다.”
“5백? 오합지졸 5백이라?”
원래 궁정 갑사들만 2천 명이 넘었으나 1천 명 이내로 줄었고, 그나마 밤에는 숙영 번제로 하기 때문에 숫자가 많을 수 없었다.
그때 광화문 누에 올라갔던 소경 봉원량이 뛰어와 세자 앞에 엎드려 보고했다.

“말 탄 군사들이 광화문에서 목멱산까지 가득 찼습니다.”
“뭐야?”
사람들은 모두 기겁을 하고 석상처럼 굳어졌다. 세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싸우면 피만 볼 뿐이다. 이길 수 없을 것이야.”
방번이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런데 소경 봉원량의 보고가 터무니없는 과장 보고라는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일부러 과장 보고를 했다. 그는 평소에 예빈시에 복직하는 것을 기회로 이숙번의 첩자가 되어 세자궁의 일들을 일일이 은밀하게 보고하는 궁내 간자였던 것이다.
세자는 전의를 잃고 방 안으로 들어가 왕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한편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이지만 군사를 일으켜 도성 안으로 뛰어오기는 했으나 정안군은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막연했다.
일행은 의흥 삼군부 영문 옆 감순청 앞에 일단 머물렀다.
“횃불을 꺼라!”
이숙번의 지시로 불씨만 남기고 불이 모두 꺼졌다. 그들의 위치를 동서 십자각이나 광화문 누에서 알아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