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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이상우의 정치 추리 소설-방원, 복수의 칼] 23

2024-06-28     이상우 작가

남은은 누가 보든지 세자와 정도전의 오른팔 노릇을 하고 있는 실세 중의 실세였다. 전주 의령이 본향으로 전왕조의 문하부 시중 남을번의 아들인 그는 일찍부터 관운이 있었다. 왕의 위화도 회군을 앞장서 지지한 공로로 밀직부사를 지냈다.

 그와 정도전의 관계는 운명적이라 할 만큼 끊을 수 없는 사이였다. 공양왕 때 대간들이 정도전을 죽이자고 간하여 정도전이 옥에 갇힌 일이 있었다. 그때 남은은 목숨을 걸고 정도전의 구명 운동을 했었다.

이 일로 왕의 미움을 사 결국 벼슬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그 후 정도전 등과 함께 개국하는 일을 도와 개국 공신 52명 중 일등 공신이 되었다. 원래 군사 지략에 출중해 외구를 물리친 공적도 있는 문무를 겸한 인물이었다.

벼슬이 문하부 참찬, 판성서시사, 우군절제사 등에 이르러 있었다. 그뿐 아니라 의령백의 복장까지 제수 받았다. 이러니 세자와 정도전을 꺾기 위해 그를 없애자고 하는 말이 나오는 것은 당연했다.
“심효생.”

누군가가 또 말했다. 심효생은 세자 방석의 장인이다. 부성군 봉작을 받은 그는 비교적 나이가 많아 쉰을 넘기고 있었다.
“이근.”
그는 중추원 판사로 정도전 세력을 물리적으로 지탱하는 중요한 자리에 있었다.
“변중량.”
우산기상시로 바른 말 잘하는 문관이다.
“이무.”

그는 문하부 참사직에 있는 사람이다. 김용세는 그들이 호명하는 소리를 들으며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름이 하나하나 불릴 적마다 깜짝깜짝 놀랄 지경이었다.
정말 그들이 다 죽임을 당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는 끔찍한 생각이 들고 아래턱이 덜덜 떨렸다.
“흥성군 장지화(張至和).”
“이직.”
“좌부승지 노석주!”

김용세는 더 이상 듣지 않으려고 밖으로 나왔다. 그때 마침 정안군의 근수노비인 소근이 와서 그를 찾았다. 그는 겁간 사건으로 도형을 살다가 나왔다.
“안방 마님께서 들라십니다.”
김용세는 깜짝 놀랐다.
“뭐라고?”
“안방 마님꼐서 들랍십니다.”
김용세가 노비 소근에게 안내되어 안방에 들어섰을 때 거기에는 언제 왔는지 민무질이 와 있었다.

“어서 오시오.”
부부인 민씨가 일어서서 김용세를 맞이했다. 전에 몇 번 안방 마님을 본 적은 있었으나 항상 발을 치고 모로 대했을 뿐인지라 이렇게 방 안에서 가깝게 보기는 처음이었다. 김용세는 절을 하고 단정히 앉았다.
“서운관 승 김용세 문안드립니다.”

김용세가 예를 갖추어 정중히 인사를 했으나 부부인은 손을 저었다.
“우리들 사이에 어려운 말은 거둡시다. 그 동안 우리 대군 나으리를 위해 애쓰신 것이 고마워 은공을 조금이나마 보답할까 하고…….”
김용세가 얼굴을 들고 쳐다보았다. 이제 막 나이 서른을 넘긴 부부인은 아직 젊게 보였다. 오똑한 콧날과 야무진 입, 그리고 사람을 꿰뚫어보는 듯한 눈이 보통 여자와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누님께서 공의 수고를 특별히 마음에 새기고 계십니다.”
민무질이 말을 거들었다.
“그래서 내 조그만 성의로 이것을 드리니 공은 사양 말고 받으시오.”
부부인은 붉은 보자기에 모양 있게 싼 조그만 보따리 하나를 내놓았다.
“명나라에서 온 비단 옷감이오. 변변치 않으나 나라 안 물건이 아니라서 귀하다면 귀한 것이지요. 공의 수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민무질이 보따리를 받아 김용세 앞에 밀어놓았다. 이것은 지난 번 현비의 능에 봉서를 넣은 보답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김용세의 뇌리를 스쳐갔다.
“정말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난감할 따름입니다.”

“앞으로도 공의 지혜를 빌려야 할 일이 많을 것입니다.”
“힘 자라는 대로 무슨 일이든지 성의를 다하겠습니다.”
“고맙소. 그래 대궐의 사정은 어떠한가요?”
“전하께서는 아직도 중전 마마의 그림자를 완전히 물리치지 못하신 것 같습니다. 거의 매일 정릉에 납시고 정사는 도당에 맡기다시피…….”
“도당이 아니고 내시 김가나 봉화백에게 옥새를 내놓은 것 아닌가요?”
“…….”

김용세는 그 말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잘못 이야기 헀다가는 나중에 빌미가 되어 큰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가다가는 왕실은커녕 이씨 종실도 보존하기 어려운 지경이 될지 모르는 일이오. 이 나라가 이씨 나라인지 정씨 나라인지, 아니면 김씨 나라인지…….”
“무도한 자들을 베는 수밖에 없는데, 정안군 나으리께서는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고만 하시니 딱한 일입니다. 개국 직후에 흥국사에 모인 공신들이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고 오직 왕실을 위해서만 모든 일을 하자던, 그 흥국사의 맹세가 헌신짝이 된 지는 이미 오래인 것 같습니다.”

민무질이 입을 실룩거리면서 말했다.
“나으리께서는 반대를 하시더라도 죽을 각오로 일을 진행시켜야 합니다.”
민 부인이 단호하게 말했다. 김용세는 여기서 들은 이야기들이 밖으로 새어나갔다가는 목이 열 개 있어도 당하지 못하리란 생각이 들었다.
“저는 그만 자리를 물러나겠습니다.”
김용세가 선물 보따리를 들고 엉거주춤 일어섰다.
“앞으로도 계속 도와주시오. 좋은 일이 있을 것입니다.”

김용세가 그 집을 나올 때 객사에서는 큰 소리로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흥분한 무인들이 울화를 터뜨리고 있는 것 같았다.
김용세는 정기준의 집으로 갔다.
“어서 오시오. 정안군의 집에서는 지금 나라 망칠 모의들을 열심히 하고 있겠구먼.”
그의 독설은 알아주어야 한다고 김용세는 생각했다.
“아마도 똑 같은 일이 정도전의 집이나 동궁에서도 벌어지고 있을 것이오. 정말 큰일 낼 사람들이니까.”

김용세는 듣기가 거북해 헛기침을 한 뒤 한마디했다.
“세자 저하 춘추가 아직 연소하신데 무슨 그런 흉측한 일을 꾸미겠습니까?”
“아니, 노형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요. 윗대로부터 배운 것이 모반이요, 권모술수인데 서로들 눈치를 못 보고 있겠소? 두고 보시오. 이제 큰일이 나고 말 거요.”
“아무리…….”
김용세는 그렇게 말은 했으나 정기준의 관찰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한 짓이 뭐요? 남의 집에 문병 온 충신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철퇴로 죽인 사람들 아니오?”

“그건 전하나 세자 저하도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일 아닙니까?”
“노형도 참 딱하시오. 그렇다면 그건 방원이 장사 조영규를 시켜서 한 짓이라고 칩시다. 위화도에서 칼을 거꾸로 돌려대고 상관인 최영을 벤 사람이 이성계가 아니고 누구요? 하극상의 표본이지요. 솔직히 말하면 그들은 나라의 혁파를 내세워 왕위를 찬탈한 데 불과한 것이오.”

이 날 따라 정기준의 독설이 더욱 심했다.
“어제 엄친의 친구 분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최근 왕이 방원을 불러 밖의 동정이 수상하니 조심해야 한다고 말하고 이 말을 너의 형들에게도 알리라고 했답니다. 왕은 세자 편이라서 방원을 미워한다고 세상 사람들은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소. 역시 정든 아들이야 한씨 부인의 아들들 아니겠어요?”

[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