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카지노

[김경은 여행작가의 서울이야기-마포구③] 외국인 선교사 묘원과 아소정

2024-06-21     여행기자

절두산 성지를 벗어났다. 절두산으로 가기 전에 봤던 이정표를 따라 외국인 선교사 묘원으로 갔다. 당산철교 북단에 있는 묘원을 들어서자 제일 먼저 눈에 띈 건은 만국기다. 영국, 미국,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7개 나라의 국기가 펄럭이고 있다. 

외국인 선교사 묘원.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 일본 선교사 조선에서 선교활동을 했다는 사실에 놀라움
-천하 호령흥선대원군 가택 연금되어 있던 곳...아소정


직감했다. 일제강점기, 어둠과 절망뿐인 우리나라에 복음을 들고 찾아왔다가 여기에 묻힌 선교사의 조국이라는 걸. 그런데 만국기 중에 조선을 침탈하고 탄압했던 일본의 국기가 있다. 일본 선교사가 조선에서 선교활동을 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왼편에 있는 묘역 안내도를 봤다. 안장자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다. 그중에 일본인 이름을 발견했다. 소다 가이치(C-2묘역). 그의 행적이 궁금하다.

외국신 선교사 묘원 휘날리는 만국기

홍보관과 선교기념관을 지나자 묘역이 나타났다. 넓은 부지에 이국적인 묘비와 묘원 풍경이 펼쳐졌다. 길은 깨끗하다. 나무도 무성하다. 다양한 비석은 마치 조각 작품 같다. 묘지가 아니라 공원인 듯하다. 수많은 묘비를 보는 순간 엄숙해진다. 평일에다가 더운 날씨 때문인지 묘원은 비교적 한적했다. 몇몇 단체성지순례객이 전부였다. 묘원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는 순례객 일행에 끼었다. 문화해설사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암울하기 짝이 없던 조선의 교육과 의료분야에 횃불인 된 선교사들의 헌신과 희생에 감사한 마음이 든다.

외국인 선교사 묘원,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묘원에는 15개국 417명이 안장되어 있다. 33명의 선교사와 그들 가족이다. 1979년까지 이곳은 버려진 공동묘지였다. 사실상 무연고 묘지처럼 방치됐다. 어쩌면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던 그들, 그래서 한국에 묻힌 그들. 조국보다 더 사랑했던 한국으로 버림받고 있었다. 심지어 아파트 개발로 인해 한국을 영원히 떠나야 할 위기도 맞았다. 다행히 1985년 한국기독교 100주년을 맞아 묘지공원으로 조성하고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15개국 417명 안장...33명의 선교사와 가족들

양화진 묘원에 제일 먼저 묻힌 분은 J. W. 헬론 선교사(미국). 그는 테네시대학 의대를 수석 졸업했다. 졸업과 동시에 교수로 초빙될 정도로 전도가 양양한 의사였다. 가난과 질병(장티푸스, 천연두)으로 죽어가는 조선인을 위해 이억만 리를 달려왔다. 아내 헤리어트 깁슨(의사)과 함께였다. 그때가 29살이었다. 그는 언더우드, 알렌과 함께 국립병원 제중원에서 의료 활동을 했다. 그런데 불과 5년 뒤 헬론은 이질에 걸렸다.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 이렇게 해서 제1호 의료선교사가 죽음을 맞게 됐다. 그는 너무 일찍 사망하는 바람에 선교사 정규 명단에도 오르지 못한 상태였다. 더욱이 당시 조선에는 외국인 사망자 처리 규정이 없었다. 고종의 명령으로 양화진에 묻히게 됐다. 외국인 선교사 묘원의 시작이다.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문화해설사는 가족 6명이 묻힌 로제타 셔우드 홀 선교사 가족묘로 안내했다. 7명이 안장된 언더우드 다음으로 많은 가족이 한자리에 있다. 로제타는 1호 여성 의사 선교사였다. 그는 조선 여성 교육과 의료 봉사에 평생을 바쳤다. 그는 독신주의자였다. 25살에 미지의 조선 땅에 온 이유도 결혼 의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맨해튼 빈민가에서 만난 의사 윌리엄 홀이었다. 그는 제네타와 결혼을 원했다. 제네타는 결혼 거절할 방법을 찾아냈다. “결혼하려면 조선으로 오라고 역제안했다. 윌리엄 홀은 사랑을 찾아 조선에 왔다. 1892년 한양에서 두 사람은 결혼했다.

지만 4년 뒤 윌리엄은 청일전쟁 부상자를 치료하다가 사망했다. 첫째 딸은 에디스 마거릿 홀도 그 무렵 잃었다. 잠시 미국으로 돌아갔던 로제타는 1897년 다시 조선에 왔다. 그렇게 시작된 조선 생활을 40여 년이나 이어졌다. 그동안 조선의 최초 여성병원인 보구여관을 설립했다. 크리스마스실 제도도 도입했다. 한글 점자를 개발했다. 최초 조선 여성 의사 박에스터를 키웠다. 그의 손자, 소녀 3명도 할머니와 함께 영면하고 있다. 그는 올해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했다. 사후 73년 만이다. 보답이 너무나 늦었다.

조선 최초 여성 의사 박에스터를 키운 제네타

이화학당 설립자 스크랜던 묘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배재학당 설립자 아펜젤러 묘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묘원을 돌면서 귀에 익은 한국의 은인이 많았다. 대한매일신보를 만든 E. T. 베델, 최초 서양식 지리서인 사민필지를 쓰고 조선의 외교 고문 역할을 할 H. B. 헐버트, 천민(백정) 선교의 주역인 S. F. 무어, 한글 성경 번역한 W. D. 레이놀즈, 이화학당을 설립한 M. F. 스크랜던, 배재학당을 세운 루즈 아펜젤러, 한국 선교의 아버지인 H. G. 언더우드 등이 그들이다. 물론 이름도 모르는 수많은 선교사도 만날 수 있다. 헌신과 희생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준 묘원은 그 자체가 한국의 근대역사이고 위대한 유물이었다.

성지순례단을 빠져나왔다. 유일하게 이곳에 안장된 일본인, 소다 가이치 묘지를 찾았다. 알고 보니 일제강점기 한 가운데서 조선을 도운 일본인 선교사다. ‘조선 고아의 아버지로 통했다. 그는 1921년부터 해방되던 1945년까지 부인과 함께 조선 어린이 1,000여 명을 돌봤다. 그 과정에서 간첩으로 오해받기도 했다. 패망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 조선 침탈에 대한 일본의 회개를 주장하고 세계평화운동을 전개했다. 우리 정부로부터 문화훈장 1호를 받았다.

날이 바뀌었다. 618일이다. 낮 기온이 35까지 올랐다. 해 질 무렵에 공덕역으로 나왔다. 아직도 지열은 뜨겁다. 우선 공덕동 금표비를 찾아봤다. ‘금표는 왕실 소유 땅에 흥선대원군과 관계가 있다. 그러고 보니 흥선대원군의 집권 내내 이어진 박해의 희생자들이 잠들어 있던 곳이 외국인 선교사 묘원이 아닌가.

공덕동 금표비...왕실땅 민간인 통제금지 표지

공독동 금표비. 자료사진=마포구청
아소정터.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아소정 유래.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천하를 호령하던 흥선대원군의 권세는 명성황후에게 빼앗겼다. 그 뒤 별장을 짓고 은둔생활에 들어간다. 말이 별장이지 사실상 가택 연금되어 있던 곳이다. 그곳이 아소정(我笑亭)이다. 덧없는 인생을 되돌아보며 조소하다는 의미다. 그의 작명은 선견지명이 있었다. 늙고 병든 흥선대원군은 민씨의 죽음을 이곳에 맞았다. 이 일대를 국태공원(國太公園)’이라 불렀다. 그 역시 이곳에서 죽음을 맞고 묘소와 사당을 뒀으나 이것조차 경기 파주로 옮겼다. 금표비의 역할도 끝났지만, 아직도 그 흔적은 남아 있다. 금표비가 있던 공덕동 일대를 푯돌배기, 표석골이라고 했다. 금표비에는 아소정은 120보 떨어진 곳에 있다고 적혀 있다. 아소정터를 보러 갔다.

대흥창 역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서울디자인고등학교가 나온다. 휴대전화 검색에서 가르쳐준 대로 아무리 찾아봐도 아소정터를 찾을 수 없다. 서울디자인고교 건너편에 아소정이란 음식점이 있다. 혹시나 하고 그곳에 들렀다. 오랜 한옥 음식점이었다. 그 앞에는 커다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다. 음식점 벽면에 아소정의 유래가 적혀 있다. 읽어 보니 아소정이 아니라 은행나무의 유래였다. 흥선대원군의 슬픔을 달래주던 은행나무란다. 그의 슬픔을 알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은행나무에 열매가 열리지 않는단다.

흥선대원군 슬픔 달래주던 은행나무의 사연

음식점 옆 은행나무.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음식점 앞에서 사진을 찍는 것을 이상히 여겼는지 직원인 듯한 분이 사진을 왜 찍냐?’라고 물어본다. ‘분명히 이 근처에 아소정터가 있는 게 틀림없는 데 못찾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도 모른다며 잠깐 기다리란다. 주인어른에 물어보겠다는 것이다. 서울디자인학교 안에 아소정터가 있다는 얘기가 돌아왔다. 허무했다. 역시 흥선대원군의 별장이 학교 터로 바뀌는 과정 역시 권세의 허무함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