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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이상우의 정치 추리 소설-방원, 복수의 칼] 12

2024-04-12     이상우 작가

이들의 불같은 공세에 밀린 왕이 무마책으로 마침내 교지를 내렸다.
‘요즘 들어 대소 사찰의 기강이 해이해져 과인은 몹시 걱정스럽다. 사찰에 있는 사람은 마음을 깨끗이 하고 탐욕을 버려야 함에도 이를 저버리고 세속의 나쁜 버릇을 되풀이하는 경우가 많다. 주지들은 불도를 닦기보다 살림 밑천을 장만하는 데 정신이 없고 여자들과 사통을 하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며, 죽은 뒤에도 제자가 법손(法孫)이라고 주장하며 살림과 노예를 물려받겠다고 야단이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개국 초 이 폐단을 없애지 않으면 안 될 것인즉 도당에서는 엄중히 조처하라.’

왕의 이러한 교지는 엄중히 시행되기가 어려웠다. 이런 교지가 있은 뒤에도 왕은 많은 돈을 들여 회암사에 자초(自超), 즉 무학 대사의 부도를 만들게 했다.
“살아 있는 중의 무덤을 만드는 데 국고를 없애고 있으니, 쯧쯧쯧.”
정기준은 이제 술에 취해 자신의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가 되었으나 독설은 여전히 그치지 않았다.

정도전과 정안군 양측에서는 계속해서 자기들에게 유리한 상소를 계속 내놓았다.
도승지 이문화(李文和)는 관청의 기강이 해이해져 있으니 적발되는 나태 관리는 처벌하되 그 기준을 태형 40대 맞은 자는 그 직을 유지케 하고, 태형 50대 맞은 죄인은 그 직을 박탈하자는 상소를 내놓았다.

또 의흥(義興) 삼군부에서는 군졸들의 군율이 풀어져 길에서 상관을 만나도 서로 인사를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개탄하고, 앞으로 길에서 상사를 만나면 반드시 인사하라는 안까지 내놓았다. 당시 삼군부의 계급은 위衛에 상장군이 있고 그 밑으로 대장군, 삼군장군, 영장군, 중랑장, 낭장, 별장, 산원, 대장, 대부 등의 열개의 계급이 있었다.
그러나 무신들의 사병이나 다른 군사 조직에 속한 잡다한 병졸들이 많았기 때문에 통제가 쉽지 않았다.

이렇게 되니 양 진영에서 앞 다투어 상소를 올렸다. 정도전은 특히 좌정승 조준과 김사행의 일을 공격했다. 도당에서 조세 제도를 엄격하게 하지 않으니 이를 맡은 자들을 벌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왕은 견디다 못해 또다시 교지를 내렸다.
‘개국하기 전부터 과인이 주장해 온 전제의 개혁이 이루어진 지 몇 해 되지도 않는다. 그런데 벌써 전왕조 때처럼 문란해지고 있다니 한심스럽다. 앞으로 왕실에 속한 전답, 녹봉으로 내린 전답, 공신에게 내린 전답, 역과 객사에서 사용하는 전답 외에는 조세 제도를 엄격히 하라.’

여기저기서 상소는 그치지 않았다. 좌산기상시는 신덕 왕비의 제례 실무를 보는 관원 외에는 모두 일상 업무에 복귀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왕의 진노를 사기도 했다.
“가장 큰 문제는 군사를 일으키려는 정도전 일당들의 음모야.”
정기준이 술잔을 허공에 대고 흔들며 말했다.
“음모라뇨?”

김용세도 술이 올라 정신이 가물가물해졌다.
“진도법 연습 말이야. 나라를 온통 전쟁 도가니로 몰려는 것이지.”
정기준이 말하는 진도법 연습이란 정도전이 지은 <오진법>, <진도> 등 군사 전략 서적에 따라 군사 훈련을 시키는 것을 말한다.

“정도전이 하는 짓은 뻔한 거야. 이방원 등 왕자들이 거느리고 있는 사병들을 다 빼앗아 국가 병졸로 만들어 자기 밑에 두려는 술책이야. 명나라를 친다고? 개가 들어도 웃을 일이야. 명나라 치러 가다가 위화도에서 되돌아온 사람이 누구야? 이성계와 자기들 아니야? 그래놓고 이제 와 요동을 친다고? 하하하. 이봐 여기 술 더 가져와!”
김용세는 아무리 취중이라고 하지만 금상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을 듣고 있기가 거북해 입을 열었다.

“정 형, 거 전하께 불충한 말씀은 좀 삼가시오.”
“뭐라고? 위화도 회군 때는 왕도 아니었다고. 지금 그때 이야기하는 거야. 이봐요, 부인 여기 술, 술…….”
“나도 정안군 댁에서 이숙번(李叔蕃)이란 사람한테 들은 이야긴데, 봉화백이 모든 군사에게 진도를 익히게 하고 명나라의 요동을 쳐서 고구려 땅을 되찾는 일은 두 가지 목적이 있다고 하더군요.”
“두 가지? 열 가지도 넘어.”

그때 머리에 목잠을 찌르고 무색 옷을 단정히 입은 여비가 새 술상을 들고 왔다. 그리고 나직하고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방님, 2경이 지났다고 큰방 마님이 말씀 여쭈랍니다.”
그리고 그녀는 뒷걸음질로 방을 나갔다.
“그래, 김 형 그 두 가지를 말해 봐요.”
그는 여비가 나가자 다시 술잔을 흔들어댔다.

“첫째는 대명국 황제 폐하가 표문(表文) 사건으로 봉화백을 잡아오라는 독촉을 모면하기 위한 것이요, 둘째는 정형이 말한 것처럼 무관들의 사병을 해산시켜 그들을 무력하게 만들고자 하는 것이지요. 세자를 모반에서 지키자는 뜻도 있고. 봉화백은 문관이면서도 재주와 견문이 뛰어나 무관도 생각지 못한 진법을 쓰지 않았어요? 가히 당대의 지략가요 학자지.”

여기서 말하는 표문 사건이란 새해를 맞아 왕이 명나라 황제에게 신년 하례 문안을 보낸 것인데, 그 글의 일부가 황제를 모욕했다 하여 조선국의 연루자를 전부 명나라로 잡아오라는 것이었다. 여기에 책임자로 정도전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
그 글은 성균관 대사성 정탁(鄭擢)이 지었고 전교시 판사 김약항金若恒이 관여했기 때문에 그들은 이미 명나라로 갔다. 정도전은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가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명에서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사람을 보내 정도전을 오라고 독촉하였다.

전법을 익히고 요동을 치는 것을 맹렬히 방대하고 있는 사람은 정안군 진영의 좌정승 조준이었다. 그는 정도전, 이방원 등과 힘을 합쳐 개국했지만 정도전에 눌려 힘을 못 쓰고 있었다. 그는 명나라에 정도전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었다.
“정도전이 아무리 꾀를 쓴다 해도 왕자들이 사병을 해산하겠는가?”
그것은 맞는 말이라고 김용세는 생각했다.

그러나 왕은 진법 훈련을 적극 권장하여 배를 건조하는 사수감司水監에 직접 나가 격려하기도 했다.
또한 우복야(右僕射)의 건의를 왕이 받아들여 진법 훈련을 게을리하는 왕자들을 꾸짖었고, 진법 훈련의 원칙을 어긴 개성 판사 박천상(朴天祥)의 재산을 몰수하는가 하면 경력(經歷) 최관(崔關), 경상도 관찰사 이제(李悌) 등은 파직시켰다.

김용세는 남문이 닫히는 바람에 집에 가지도 못하고 4경 파루가 칠 때까지 정기준과 함께 술을 마셔야 했다. 새벽에 집에 도착한 그는 노모가 그때까지 자지 않고 자기를 기다렸다는 것을 알자 얼굴을 들지 못했다. 그는 어머니 앞에 꿇어앉아 사죄를 했다. 노모는 한참동안 아무 말도 않고 앉아 있다가 입을 열었다.

“네가 죽은 아이 때문에 그러는 모양인데 이제 잊어버리고 장가를 들어라. 네 나이 지금 몇이냐? 조상님이나 먼저 가신 네 아버지의 대를 잇는 것이 가장 큰 효도다.”
노모는 그 말만 남기고 안방으로 건너가 버렸다. 그는 죽은 동의를 생각해 보았다. 그녀의 미소 띈 얼굴이 금방 떠올랐다. 그는 언제나 자기가 보고 싶을 때 동의가 같이 있어 준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잠시 후 채비를 하고 등청했다.

그날 오후 늦게 김용세가 서운관 일기를 승정원에 가져다 주고 올 때였다. 승정원은 경복궁의 중앙인 근정전 서쪽에 있기 때문에 담 하나 사이지만 그곳까지 가는 길은 상당히 멀었다. 그는 승정원 앞에서 때마침 전하에게 문서를 전달하는 사알(司謁) 한 사람을 만나 그것을 전했다. 그리고 빈청 뜰을 지나 유정문, 영제 다리와 홍례문을 거쳐 광화문으로 가는 정원 앞에 이르렀다.

거기서 다시 왼쪽으로 돌아 갑성문을 나오면 궁의 서쪽 바깥 마당이 나온다. 거기서도 서운관으로 가자면 내사복시(內司僕寺)를 지나야 하는데, 거기서 그는 정안군 집에 드나들던 마천목(馬天牧)이란 사람을 만났다.

“장군께서 여기는 웬일이시오?”
김용세는 마 장군이 정4품 서반이긴 하지만 자기보다 품계가 높기 때문에 허리를 굽혀 공손히 인사했다. 그는 유난히도 커다란 입을 쩍 벌리고 답례를 했다. 기골이 당대하고 키도 훌쩍 컸다.

“그간 안녕하시오? 정안군 나으리께서 저하를 뵈러 가셨기에……. 곧 부르실 때가 되었는데.”
내사복시란 왕을 비롯한 궁 안의 행차를 맡은 부서다. 

[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